로엔의 마나뱅크 184화
미리아의 집에 설치해 놓은 장치는 유체이탈을 함과 동시에 섀도우 플레인에 자동으로 진입하도록 해 놓았다. 반대로 섀도우 플레인에서 나오면 영혼이 육체로 들어오게 되어 있고.
그게 가장 효율이 좋고 안정적이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나는 영혼 상태가 되어 호수를 보았다. 내 육체가 마법진 한 가운데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렉스와 마리포즈가 앞뒤로 지키고 있고, 뿌우 또한 지팡이 속에 있긴 하지만 유사시에는 나올거다.
“아아, 이렇게 안전하지 않은 장소에 육체를 놔두는 건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야.”
셰이든의 배신으로 육체를 잃을 뻔한 경험을 하고는 가능하면 미리아의 집에서만 이 짓을 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해보니 과거 신이었다는 자는 슬리퍼의 위치를 찾아내서 거기에 딱 맞는 게이트를 뚫은 것 같다.
어떻게 슬리퍼의 좌표를 알아냈는지도 궁금하지만 지금은 딴생각하지 말고 얼른 게이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
나는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영혼상태라 보일 리가 없지만 그래도 내 기분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렉스가 고개를 들고 멍 하고 짖는다.
“어, 렉스야. 너 내가 보이니?”
“멍!”
헐, 보이는구나. 넌 도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거니.
얘가 새도우 플레인에 몇 번 다녀오더니 영혼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번 마수가 되더니 경험하는 게 모두 능력으로 발현되는 건가?
“아니지. 지금 딴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집중, 집중.”
나는 다시 렉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영혼상태로 들어가니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호수물이 검은 것은 섀도우 플레인의 기운을 흉내 내기 위함이다. 마치 셰이드의 침식과도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궁극마법으로 저주를 걸어서 섀도우 플레인의 침식을 흉내 낸 거구나. 그럼으로써 게이트를 열어 놓은 상태로 유지한 거야.
나는 감탄을 했다.
어쩌면 나는 사상 최초의 대마법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신이 유한자일 때 인간이었다면 그가 최초의 대마법사이리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마리포즈가 말한 호수 밑바닥 지점으로 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정말로 게이트가 있었다.
돌인형들이 게이트로 뛰어 들어 소멸하는 모습도 보였다.
“흠, 돌인형들은 게이트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돌인형들이 소멸될 때마다 게이트 주변의 룬어가 살짝 빛난다. 땅속에 있을 때에는 거의 공간을 고정시키고 시간마저 정지시킨 상태라 게이트 유지하는 데 따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호수의 물로 힘의 소모를 최소화하고, 돌인형으로 힘을 주입하는 시스템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귀찮은 시스템을 만든 걸까? 그냥 엘프들의 숲처럼 마력을 계속 주입해주면 되는 게 아닐까?
이건 마치 내가 초보마법사가 된 것 같다. 이해를 하기 어려운 시스템 구조에 시선이 닿는 곳마다 호기심을 느낀다.
나는 일단 게이트 주변의 룬어를 유심히 살폈다. 이거 혹시 일방통행이면 곤란하다. 마법진을 분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방통행은 맞고, 어, 이건 룬어가 아니네.”
마법진 안쪽으로 숨겨진 언어가 새겨진 부분이 있다. 이건 나도 잘 쓰는 수법인데, 정령어로 마법진을 보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령어도 아니다.
“이건 드래곤 언어잖아! 사라진 고대의 언어가 여기 있네.”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몇 개는 고대유적으로부터 봐서 안다.
인간의 역사 이전에 있었다는 드래곤의 시대에 있었던 문자다.
원래 이 세계는 드래곤에 의해 다스려지는 곳이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성을 가진 드래곤이 대부분 멸종되고, 남은 자들도 거의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서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신은 드래곤이었겠구나.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신이라면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지.”
많은 게 이해가 되었다. 드래곤이라면 9서클 대마법사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들 중 로드라는 종족의 수장은 대정령과 접촉이 가능했다고 하니까.
내가 드래곤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포트라 때문이다. 그가 선사시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해 주었기 때문이다.
포트라의 물건들 중 드래곤 언어가 새겨진 것도 몇 개 있고 해서 이걸 알아볼 수 있는 거다.
나는 새삼 감탄하며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웃, 이곳은 침식이 무척 강하군.”
나는 얼른 의지력을 강화해서 몸에 침투하려는 기운을 막았다. 여긴 그냥 공간의 침식력이 마치 셰이드가 접촉한 것처럼 강하다.
이거 오래 버티지 못하겠는 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느껴졌다.
셰이드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셰이드다.
이게 날 덮어 버리면 도망도 못 가고 침식되어버리지 않을까?
삭풍의 창으로 찔러도 분해되거나 소멸될 사이즈가 아니다.
다시 나갈까?
나는 게이트 입구에 멈춰 서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게 바로 슬리퍼일 것이다. 그런데 이놈한테 어떻게 말을 걸지?
이럴 때 저쪽에서 말을 걸어주면 좋은데, 잠을 자고 있는 상태이니 그럴 리가 없다.
깨워야 하나?
어떻게?
나는 살짝 손을 내밀어 손가락 끝으로 슬리퍼를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손가락이 슬리퍼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우웃!”
나는 전력으로 손가락을 빼려 했다. 그러나 영혼을 흡입하려는 슬리퍼의 힘이 너무 강했다. 의지력을 최대한으로 강화했지만 그래도 손가락이 빠지지는 않고 겨우 더 들어가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이 상태로라면 몇 분 못 버틴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면 끝이다. 일단 셰이드로 변할 것이고, 어쩌면 저 안에서 영원히 못 나올지도 모른다.
“으으으!”
이게 웬 생각지도 못한 위기냐.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왼손으로 삭풍의 창을 소환해서 손가락이 빨려 들어간 부분을 냅다 찔렀다.
팍
다행히 삭풍의 창은 슬리퍼에게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사람 머리통만큼 슬리퍼의 몸체가 소멸하고 나는 무사히 손가락을 뺄 수 있었다.
그러나 삭풍의 창으로 사람 머리통 만큼이라면, 이게 정말 덮치면 답이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빠진 손가락 끝이 검다. 이미 침식이 된 것이다.
“이거 미리아한테 정화를 해 달라고 해야겠네.”
내가 정화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서 돌아가서 미리아에게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손가락 하나만 침식된 거라 당분간은 괜찮다.
나는 일단 게이트 밖으로 나가려 했다. 더 이상 머물 의지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누구지? 이계의 힘으로 나를 깨운 자는?”
나는 얼른 대답했다.
“나는 렌이다. 슬리퍼, 깨어났는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의식의 일부만 열렸을 뿐.”
잠꼬대 하는 수준이라는 건가? 그런데 이제 뭐라고 하지?
에잇, 일단 용건을 말하자.
“신이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난 후 이계의 불멸자들이 이곳을 노리고 몰려들고 있다. 그걸 막기 위해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치고 싶은데, 방법이 있는가?”
“네가 신이 되면 돼.”
“나는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예언에 의하면 200년 뒤에 새로운 신이 탄생된다. 그러니 200년간만 막을 결계가 필요하다.”
“섀도우 플레인에 통하는 힘은 영혼과 의지력뿐이야. 세상에 사는 존재들의 의지력을 모아. 아니면 영혼을 모아도 돼.”
그걸 어떻게 모으라고? 그리고 모아서 어떻게 의식을 행하라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될까? 갑자기 찾아와서 대가도 없이 질문을 하는 것도 문제긴 하다. 어쩌면 난 질문을 할 때마다 내가 인식하지는 못해도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질문만 하자.
영혼을 모아 결계를 치는 것은 하면 안 될 것 같다. 내 예상이지만 영혼으로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치려면 물질계의 인간들 절반은 희생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력은?
막말로 모든 인간의 의지력을 모은다고 해도 영혼만큼 강력한 힘을 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 결계를 유지하려면 의식의 참가자는 다른 거 다 포기하고 명상을 계속해야 할 거다.
둘 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유한자가 섀도우 플레인에 결계를 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다.
말이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게 마법사다. 나는 열심히 궁리하다가 드디어 다시 질문을 했다.
“결계의 유지에 너의 힘을 빌려줄 수 있는가?”
“누군가 부탁하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줄 거야. 하지만 그러면 내가 점점 잠에서 깨어날 걸?”
“네가 깨어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할 일을 하겠지.”
이놈이 자꾸 말을 돌리네.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놈이 점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안 되는 거고.
나는 일단 말을 끊었다. 너의 일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면 또 교묘한 수법으로 말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일단 이놈의 본질부터 파악을 하는 게 중요하겠구나.
나는 기본에 충실하기로 했다. 거래를 하는 대상의 정체를 모르면 큰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세상에서 마족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자들의 대부분이 힘에 눈이 멀어서 상대의 정체나 본질을 파악하여 냉정하게 거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이 뭐지?”
“…….”
어쭈, 대답을 안 하네. 이 질문부터 해야 하는 게 맞군.
“대답해 줘. 너의 이름은?”
“종말.”
젠장, 난 지금까지 이 세계의 종말과 거래를 하고 있었던 거군.
왜 이놈이 깨어나면 안 되는지 아주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