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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83화 (183/250)

로엔의 마나뱅크 183화

스으윽

모든 것이 멈춘 사이에 땅이 벌어지며 산이 완전히 솟아 올라온다. 이게 어느 정도 진행되면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결계가 해제되는구나.

어느새 헬마니움산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산이 잠에서 깨어나 나를 부르고 있다. 아직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시간의 흐름마저 거의 정지시킨 것이다.

“가자.”

“예, 렌 경.”

내가 걸음을 옮기자 마리포즈는 렉스의 목띠를 잡고 나를 따라왔다.

산에 길은 없었지만 나는 그냥 렉스의 등에 탔다. 그러자 렉스가 알아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신성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네.”

신이 탄생한 산인데 왜 이리 분위기가 칙칙하지? 신성력은 커녕 마녀의 은둔지라 해도 믿겠다.

산을 오르면 오늘수록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식물은 있지만 다른 생물은 전혀 안 산다. 그러니 일종의 귀기가 흐른다고 할까? 이 산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우리 일행뿐인 거다.

아까는 시간이 정지해서 움직이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바람도 안 분다.

하늘을 올려보니 구름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정지한 게 풀리긴 풀렸구나. 이 안에만 조금 이상한 상황인 모양이네.

다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아래쪽에는 어느새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산을 봉인한 결계가 해제되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새로운 결계가 쳐진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바람이 안 불 수도 없는데, 역시 대기의 기운이 막힌 걸까?

“뿌우야, 여기 바람이 안 부는 게 결계 때문인 거지?”

“그렇당. 나 부르지 마랑. 여기 왠지 숨쉬기 거북해서 난 지팡이 속에 있고 싶당.”

머리만 살짝 내민 뿌우는 얼른 대답하고 다시 쏙 들어가 버렸다.

상관없겠지. 급해져서 부르면 안 나올 녀석도 아니니.

나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바삭

“어라?”

뭔가가 움직였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지식으로는 분명히 산에는 어떤 동물도 안 산다고 했는데.

끼릭

돌덩이다. 저건 일종의 소형 골렘인가?

돌덩이 다섯 개를 엉성하게 뭉쳐서 만든 골렘이 있다.

나는 일단 골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는 누구지? 너의 주인은 없니?”

끼릭, 끼릭

역시 말은 못 하는군. 머리라고 언어기관은커녕 귀도 없는 그냥 돌덩이 하나가 뎅그러니 올려져 있는 것뿐이니 내 질문을 듣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끼릭, 끼릭

손가락도 없는 팔로 산 위쪽을 가리킨다.

“이리로 가라고?”

끼릭, 끼릭

말을 들을 수는 있나 보내. 신기하다. 저게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지 나중에 데리고 내려가서 분석을 해보고 싶구나.

나는 일단 공적인 일을 먼저 끝내기로 하고 돌 골렘이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비슷하게 생긴 돌 골렘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돌 골렘은 모두 산 정상을 가리키고는 내가 올라가면 따라오는 것이다.

“벌써 10마리가 넘었네요.”

“저놈들 전투력을 예상할 수 있어?”

골렘의 무서운 점 중 하나가 살기가 없기 때문에 공격하기 바로 전까지 전혀 그런 낌새가 없다는 거다. 저렇게 태연하게 졸졸 따라오다가도 갑자기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거지.

“전투력은 알 수 없어요. 저 골렘은 일반적인 구조물이 아닌, 마법에 의해 돌덩이를 억지로 붙여놓은 듯한 거라 골렘으로 분류해야 할지도 애매하네요.”

“하긴 정상적인 스톤 골렘과는 완전히 다르지. 그냥 임시로 돌인형이라고 부르자.”

“예, 돌인형이라고 기억할게요. 제대로 분석하려면 제가 접촉해야 하는데, 할까요?”

“그냥 놔두자.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

건드렸다가 자동방어 시스템이라도 발동하면 애꿎은 돌인형만 부숴야 한다. 저것들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만약 공격해 온다면 그때 부수면 그뿐이다.

나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갔다.

*

헬마니움 산은 큰 산맥이고. 우리가 목표로 하는 봉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꼬박 일주일을 산을 타야했는데, 도중에 날아서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외부인의 침입을 막는 결계가 하늘을 나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신하게 발로 걸었다.

실제로 새조차 단 한 마리도 산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돌인형들이 가리키는 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은 산맥의 봉우리답지 않게 끝이 뾰족하지 않고 마치 화산처럼 분화구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물의 색이 완전히 검었다.

마리포즈는 손가락을 물을 살짝 찍어 분석을 해보고 말했다.

“석탄 성분이 많이 섞여 있어요. 그 외에 물 자체에도 마법적인 힘이 느껴져요. 이것은 저주의 힘이네요.”

“저주? 축복이 아니라?”

“축복받은 물이라기에는 너무 칙칙해 보이네요. 여기 빠지면 숨이 점점 멎고, 잠에 빠져서 깨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대신 죽지는 않고 영원히 호수 바닥에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쩝, 어쩐지 호수 바닥을 뒤져야 할 거 같은데, 물에 그런 저주가 걸려 있단 말이지? 해제할 수는 없나?”

“호수 전체에 영구적으로 걸린 마법이에요. 궁극마법의 힘이네요.”

“젠장, 세상에 왜 이리 궁극마법의 힘이 많이 있는 거야.”

뭔가 조금 억울했다. 세상에서 10서클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나뿐이고, 대정령인 포트라조차 내가 소환해주지 않으면 물질계에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엘프도 10서클의 힘을 써서 숲의 힘을 만들었고, 여긴 또 호수 전체에 영구적인 저주를 걸었다고 한다.

“이거 신이 한 걸까? 혹시 우리 물질계의 신이 저주에 능한 마녀 출신인 거 아니겠지?”

“그건 모르죠.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신을 비하해도 되나요?”

“이게 무슨 비하야. 그냥 추측이지. 그리고 신은 지금 이 세계를 버리고 떠나서 욕 좀 먹어도 싸거든.”

나는 툴툴거리며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호수에 들어갈 수 있나를 고민했다.

웬만한 저주라면 결계로브가 있으니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저건 10서클의 힘으로 만들어진 저주다. 결계로브가 뚫릴 가능성이 있다. 완전히 안 뚫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고, 물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제대로 대응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때, 우리 뒤를 따라왔던 돌인형들이 모두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놔, 정말 돌인형들은 잠들 일이 없다는 거군. 숨도 안 쉴 거고 말이야.”

“저기, 렌 경. 잠 안자고 숨도 안 쉬어도 되는 건 저도 같은데, 제가 들어가 볼까요?”

“오옷, 마리야. 이제 보니 넌 인간이 아니었지? 하하하하.”

하도 오랫동안 마리포즈와 같이 지내다보니 마리포즈가 일종의 골렘이라는 것을 깜박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걸 잊어버리다니. 요즘 내가 정신이 조금 없나보다.

마리포즈는 그런 나를 보며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골렘인 것을 잊을 정도로 인간과 비슷하다는 데 만족을 느낀 듯 했다.

하긴 내가 헷갈릴 만도 한 게 마리포즈의 언어표현이 요즘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여기사가 아닌 그냥 마을의 처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억양과 표현이 여자애처럼 변했다.

“그럼 수고해 줄래?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신호해.”

“예, 준비하고 들어갈게요.”

모든 일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밧줄을 꺼내 마리포즈의 허리에 묶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 의식을 잃어도 꺼낼 수 있어야 한다.

혹시 강한 힘이 당길 수도 있으니 줄은 최고급 마법로프를 썼고, 그 끝을 렉스와 연결했다. 나도 거인의 힘을 낼 수 있지만 유사시에는 렉스의 괴물 같은 힘과 덩치가 마리포즈를 구할 거다. 그리고 이렇게 밧줄을 렉스의 목띠와 연결해 놓으면 마리포즈가 목띠의 힘을 쓸 수 있다.

준비가 끝나고, 마리포즈는 밧줄을 이용한 신호를 정했다. 위험하면 밧줄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방출하고, 그걸 느낀 렉스는 곧 바로 잡아당기기로 했다.

첨벙첨벙

마리포즈가 걸어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아직도 사방에서 돌인형들이 나타나 계속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우선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밧줄이 가볍게 흔들렸다.

돌아오겠다는 신호다.

위험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고 무엇인가 발견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일이 조용하게 풀리는 건가?

나는 마리포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조금 있으니 마리포즈가 호수 속에서 걸어 나와 안의 상황을 설명했다.

“렌 경의 경험을 제가 기록해 놓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 했어요. 돌인형들은 호수 밑에 있는 검은 구멍으로 들어가요. 그런데 들어가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어요. 제가 판단하기에 그 구멍 너머는 섀도우 플레인이에요.”

“정말?”

“구멍 주변에 있는 룬어가 렌 경의 섀도우 플레인 진입 게이트와 거의 비슷해요. 그리고 안에서 느껴지는 힘이 전혀 없어요. 힘 자체가 없는 공간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럼 섀도우 플레인 맞네. 호수 밑바닥이 섀도우 플레인으로 들어가는 게이트였구나.”

질량이 있는 물체를 게이트 속으로 넣으면 그대로 소멸이 되어 버린다. 돌인형들은 왜 그런지 몰라도 스스로 소멸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네. 숨을 안 쉬고 저주에도 걸리지 않는 상태, 그건 영혼이야. 내가 영혼 상태로 호수 안으로 들어가 섀도우 플레인에 진입하라는 거군.”

돌인형이 왜 스스로 모여들어 소멸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답은 섀도우 플레인 안에 있다.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유체이탈을 위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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