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82화
3장 헬마니움 산
헬마니움 산은 지하에 통째로 묻혀 있다. 산 자체가 결계에 둘러싸여 영겁에 가까운 세월동안 전혀 형태가 변하지 않았다고 내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이 알려준다.
심지어 거기에 자라고 있던 식물들도 굳은 채로 남아 있는데, 만약 결계가 해제되면 식물들은 원래대로 돌아가 다시 자라게 될 것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거대한 평야 지역 한 가운데에 헬마니움 산이 있다. 라큐 왕국의 최고 곡창지대다.
“여기가 산악지대로 변하면 라큐 왕국으로써는 재앙이나 다름없겠는걸.”
나는 헬마니움 산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헬마니움 산이 나타나면 지반이 벌어지면서 평야의 절반 이상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도 기후가 바뀌어 기존의 농사법으로는 소출이 확 줄게 될 것 같다.
라큐 왕국은 식량의 수출로 유지되는 나라인데, 이렇게 되면 자국에서 소모되는 식량도 충당할까 말까 하는 양밖에 생산하지 못할 것 같다.
헬마니움 산의 결계를 해제하고 산을 지표면 위로 부상 시켜야 한다. 이건 이 세계의 평화와 안전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실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걸 위해 왕국 하나를 망조로 들게 하면 그게 나중에 어떻게 나한테 돌아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과응보라고 할까? 인과율의 사슬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은근히 교묘해서 살다보면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더군다나 라큐 왕국은 데빌 헌터의 창설 때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서, 그들이 보낸 식량으로 우리 미스틱게이트에 몰려드는 난민을 구제한 바가 있다.
그러니 이건 도의적으로도 조금 미안한 일이다.
이럴 때가 제일 괴롭다. 대의를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인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해가 된다.
“어떻게 할까? 마리야, 혹시 라큐 왕국이 식량 말고도 왕국을 유지할만한 수출품이 있을까?”
“기록에는 전혀 없는 걸로 나와요. 렌 경이 우려하는 대로 식량소출이 줄어들면 이 왕국은 크게 힘들어질 거예요.”
“역시 그렇지?”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다.
라큐 왕국이 나한테 원한이 있거나 평소 밉보인 왕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그런 개인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다. 굶주리는 것은 왕이 아니라 일반 평민들이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할 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원만한 해결 방법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적당한 구제방법은 있다.
“아무리 급해도 일을 순리대로 풀어야지. 일단 돌아가서 밑작업부터 하자.”
“방법이 있나요?”
“응, 조금 사기지만 어차피 필요한 작업 중 하나니까 이참에 하자고.”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영지로 돌아갔다.
몰래 나갔던 거라 조용히 돌아오니 보름이 넘게 여행을 했는데도 외부인은 아무도 내가 여행을 갔다 왔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케이티 양을 불러 말했다.
“마족의 음모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데, 그들이 일단 일을 벌이면 퇴치를 해도 이미 피해를 당한 왕국이나 조직은 자력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잖아요. 그러니 우리 데빌 베인에서는 그들의 복구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되요.”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평소에 데빌 베인을 지원하는 왕국들로부터 식량과 물자를 지원 받아야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물자를 보낸 왕국들이 만약 마족의 후계자들에 의해 피해를 보면 우리는 비축해 놓은 물자로 그들을 돕는 거지요.”
“아, 그거 나쁘지 않네요.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데빌 베인이라면 실행이 가능한 정책 같아요.”
“그렇죠? 그럼 즉시 미스틱엑스의 이름으로 서신을 작성해서 우리에게 우호적인 곳에 모두 보내세요. 계획이 서면 행동은 바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마족의 발호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라 다들 반대는 안 할 거예요.”
케이티의 말대로 반대를 하는 왕국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미 덴판 제국도 한 번 크게 홍역을 치룬 이상. 다른 크고 작은 왕국들은 마족 문제가 발생하면 자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보험이다. 안 당한 곳 모두가 십시일반 해서 당한 곳을 돕는 거다.
이걸 거절하면?
협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빌 베인에게 협조를 안 했다가 그곳에 마족 사건이 일어나면 과연 데빌 베인이 목숨 걸고 가서 도와줄지는 의문이다. 암, 그런 거지.
아무튼 케이티 양이 어떻게 잘 서신을 작성했는지 연락이 간 왕국에서는 좋은 정책이라고 적극 협조하겠다고 속속 답신을 해 왔다.
그 사이 나는 각 왕국의 규모에 따라 지원받을 물자의 종류와 양을 정했다.
협조하겠다는 왕국들에게 2차로 구체적인 지원 요청 물품을 보내니 그때부터는 딴 소리를 하는 곳도 나왔다.
그러나 케이티 양이 그들을 만나 대부분 이쪽 요청대로 지원을 해주도록 설득을 했고, 케이티 양이 감당하기 어려운 진상 사신들은 미스틱엑스가 직접 나서서 말했다.
“대륙 전체가 마족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귀국도 힘들 테지만 마족이 직접 나타난 왕국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협박이다. 현재 대륙 최고 마법사이자 데빌 베인의 실질적 수장의 협박이다.
어떤 진상 사신도 미스틱엑스 앞에서는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의 요구대로 지원물자가 모두 정해졌고, 약 1개월 뒤에는 일차 지원물자가 속속들이 우리 영지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영지의 일부분에 거대한 창고를 백여 개나 지어야 했다. 관리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 이쪽으로 오던 물자들이 도적의 습격을 받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많지는 않았다. 운반하는 쪽이 왕국의 정예병인 부분도 있고, 이게 데빌 베인으로 가는 물자라는 것을 아는데 습격을 하는 놈들은 아주 지독한 놈들이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멍청이다.
어쨌든 습격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영지의 마법사와 기사들 중 정예라 할 수 있는 카탈라난 부대가 추적을 해서 처리했다. 5천명 전부가 가는 건 아니고,
마법사 3명과 기사 3명, 그리고 병사 100명이 추적대를 편성해서 간 후에 적의 본거지를 찾아내면 카탈라난을 써서 토벌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여기서 카탈라난이 얼마나 무서운 공격진인지 드러났다.
적이 3배 정도 있어도 거의 손실 없이 일방적인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물론 이쪽은 오랫동안 제대로 훈련시킨 정예병이고, 저쪽은 조잡한 병장기를 지닌 도적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수가 세 배면 보통 이쪽 피해도 날만큼 나는 게 정상이다.
내가 카탈라난을 공격보다 방어위주로 구성한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나보다. 공격력은 병사와 기사 개개인의 실력으로 강화하고, 마법으로는 방어력만 극대화 하니 일반 도적들로는 그들에게 상처조차 제대로 입히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물자가 다 모이고, 뒤처리까지 하는데 처음 서신을 보내 지원물자를 요청한 지 3개월이 걸렸다.
“이제 물자가 모였으니 첫 재해 대상자가 나타나야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날 다시 외부인 모르게 여행을 떠났다.
*
“3개월 만인가?”
나는 추수가 끝난 평야를 보며 중얼거렸다. 시기도 딱 좋다.
저번에 왔을 때에는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초겨울이다. 올해 농사는 끝났고, 봄이 될 때까지는 이모작도 없다.
가장 적은 피해로 산이 솟아오른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나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결계해제의 의식을 행할 장소로 갔다. 혹시나 몰라서 투명 마법으로 일행의 모습을 모두 감추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빈 논과 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벌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한 명씩 마주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투명하게 변한 우리를 알아보는 자는 없었고, 우리는 얼마 안 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단 결계를 쳐서 외부에서 우리를 아예 볼 수 없도록 한 후, 천천히 의식을 치룰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윽고 밤이 되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했다.
나는 결계를 풀고 완성되어진 마법진에 들어가 의식을 시작했다.
“태고로부터 신에 의해 감추어진 신성한 산이여. 이제 그대의 오랜 잠을 깨고 다시 대기와 만나 호흡을 할 때다. 나와라. 헬마니움이여!”
마지막에 산의 이름을 정확한 발음으로 부르니 잠시 후 지표면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진동은 점점 심해지고 인근의 집들에서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오려는 모양이다.
나는 얼른 후드를 뒤집어썼고, 마리포즈 역시 전신갑옷의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렉스는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어 가까이 오기 전에는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 사이 진동은 더욱 심해져 이제는 정말 큰 지진처럼 변했다.
꽈뜨드드드드
땅이 갈라진다. 사방에서 놀라서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이건 외곽지역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피해는 없다.
산의 중앙에 위치한 지점은 지금 난리가 날 가능성이 크다.
“역시 미리 대피시키는 게 좋을 뻔 했나?”
문제는 그렇게 하면 내가 한 일이라는 게 드러나 버린다.
어차피 땅이 파묻히는 게 아니라 사방으로 열리듯 벌어지는 중이라 그들이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놀라서 충격이 심하리라.
쿠쿠쿠쿠쿠쿠
드디어 헬마니움 산이 지표면으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산맥이었고,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평야를 양분하는 듯 한 모습이다. 대륙 전체가 둘로 갈라지며 안에서 산맥이 나오는 듯 한 광경이다.
그리고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이 소리와 진동이 딱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