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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80화 (180/250)

로엔의 마나뱅크 180화

내가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시켜야 한다.

나는 가장 먼저 이반 경을 떠올렸다. 그가 빛의 구슬을 모두 흡수하여 9서클이 되면 자격이 생긴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유한자로 남을 생각이지만 저의 동료가 지금 그대가 남긴 빛의 구슬로부터 힘을 얻어 수행하고 있는데, 그라면 길을 걸을지도 모릅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거니 말투를 정중하게 고쳤다.

그러자 신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4대 대정령을 모두 만나 인정을 받고, 섀도우 플레인 가장 깊은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슬리퍼를 깨워라.”

슬리퍼? 잠자는 자라는 뜻인가.

“슬리퍼가 깨어나면 섀도우 플레인이 폐쇄되고, 그 안에서 빛의 공간을 만들면 물질계 전체를 굽어볼 수 있게 된다.”

아항, 그러니까 섀도우 플레인은 신의 집무실 비슷한 공간이군.

나는 핑 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미스틱섀도우에서 투영된 공간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으니 물질계 전체의 그림자가 모여 있는 섀도우 플레인이라면 전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그게 바로 신의 영역일 것이다.

4대 대정령을 만나는 게 꽤 힘들겠지만 9서클이 된 이반 경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걸로 용건은 끝난 셈인가?

의외로 신이 순순히 대화를 해주어서 일이 쉽게 끝났다.

그런데 왜 포트라는 신이 침묵할 거라고 했지? 그걸 물어볼까?

아니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건 물어보자.

“헬마니움 산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헬마니움 산, 그리운 장소다. 내가 뜻을 세운 곳이고 슬리퍼와 접촉해서 신이 되는 방법을 배운 장소다. 그림자와 실체가 겹치는 공간. 바로 대륙의 최고 남단에 있는 장소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어느 한 장소가 떠오른다.

이야! 지식과 정보를 머릿속에 직접 넣어줄 수 있는 건가? 역시 신은 신이네.

그곳은 대륙 남쪽에 위치한 평야의 한 지점이다. 산 전체가 지반 속에 파묻혀서 평야가 되었는데, 헬마니움 산 자체는 신의 힘에 의해 지켜져 여전히 땅속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저 힘만 흡수해도 장난 아니겠는데?

왜 포트라가 헬마니움 산에 대해 물어보라 했는지 알겠다. 그놈이 정말 내가 신이 되라고 꼬시고 싶었던 거구나. 저 힘을 이용해 더 높은 단계로 가고, 슬리퍼와 쉽게 접촉을 하라는 뜻일 거다.

동시에 지금 신에게 예전 자신이 신이 될 때의 기억을 되살려 나에게 협조하라고 은유적으로 권한 거다.

“감사합니다. 비록 당신이 물질계를 버렸지만, 더 이상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떠난 신을 원망해서 무엇 하리. 우리는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나저나 이반 경한테 신이 되라고 꼬시면 넘어갈까?

마족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역시 신이 필요하다. 주인이 생기면 무단침입자는 쫓겨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소환을 끝내고 잠시 쉬면서 미리아한테 말했다.

“이반 경한테 신이 되라고 하면 받아들일까?”

“양부가 신이 된다고?”

“가능할 것도 같거든. 물론 본인이 뜻을 세우고 노력해야겠지만 말이야.”

“난 상관없어. 지금 꿈침투 능력으로 가서 물어볼까?”

얘가 갑자기 신이 나서 말하네. 신의 딸이 되고 싶은 거냐?

“꿈침투 능력으로 그쪽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지. 며칠 후에 내가 직접 섀도우 플레인에 들어가 볼게.”

“몸은 이제 괜찮아?”

“응, 거의 회복됐으니 그냥 가서 물어보는 거 정도는 상관없을 거야.”

“알았어. 그럼 준비해 놓을게.”

“렉스도 같이 걸 거야.”

“응.”

이걸로 마침내 해결책이 하나 나온 셈이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이반 경은 나와는 다르게 자유로운 것보다 더 큰 이상을 좇는 사람이니 신이 되라고 하면 기뻐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모든 것을 바쳐 마족과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정말 모든 것을 바쳐 신이 되면 마족과 싸워 이기는 셈이다.

*

3일 후, 나는 렉스와 함께 미리아의 집으로 갔다.

곧 바로 섀도우 플레인에 진입한 나와 렉스는 예전에 갔던 길을 따라 신의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신이 되면 섀도우 플레인에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겠지? 이렇게 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아도 말이야.”

“그럴 거다. 신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

섀도우 플레인에 와서 좋은 점 하나는 렉스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거다. 렉스를 데리고 온 이유는 이동이 빨라서긴 하지만, 렉스도 거절하지 않는 이유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곳이군.”

어떻게 이 공간에서 빛을 느끼게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앞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신의 문은 이미 다시 닫혀 있었다. 이반 경이 수련을 방해받기 싫어서 일부러 닫은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문 앞에 도착하자 스르륵하고 결계가 사라졌다.

렉스는 문 앞에 남았다. 얘도 마수의 일종이라 안까지 들어오기는 부담이 되나보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빛의 구체가 있는 곳까지 갔다.

이반 경은 빛의 구체와 겹쳐져 있었다. 빛의 구체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조금씩 이반 경의 몸속에 스며들어가는 듯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이반 경은 살짝 눈을 뜨고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스승님.”

“수련은 잘 되어가?”

“저는 그냥 받아들일 뿐입니다. 서두르지 않으니 잘 되고 못 되고도 없습니다.”

“그렇지. 그 수준이 되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지.”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거군. 하하하. 아무래도 이반 경은 이 수련이 마음에 드나보다. 평생 꿈꾸던 경지를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는 것이 지고의 행복일지도 모르지.

“신을 소환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물질계를 마족으로부터 지키려면 새로운 신이 필요할 것 같아.”

“설마 제가 신이 되라는 말씀이신가요? 스승님이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영원히 유한자로 남을 거야.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한 번 환생을 했어. 유한자지만 환생을 이용해서 거의 영원히 살 수 있거든.”

“환생이라면, 설마 스승님께서는 전생에 9서클이셨던 겁니까?”

“그래, 내가 바로 로엔의 환생체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9서클이 되면 그런 것도 가능했군요.”

“어쨌든 난 신이 될 생각이 없어. 난 자유로움을 원해. 규칙에 얽매여 영원히 물질계를 관리하고 싶지는 않아.”

“이해합니다. 누구나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반 경은 어떻게 할 거야? 난 가능하면 이반 경이 신이 되는 게 좋을 거 같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이쯤 되면 승낙한 거나 다름없지?

“그런데 아직 그거 흡수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예측이 안 돼? 이반 경이 9서클이 되고, 그 다음에 4대 대정령을 모두 만나고, 마지막으로 섀도우 플레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리퍼를 깨우라고 했는데, 그거 다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잠시만 기다리시죠. 제가 한 번 디바인 오러클의 파워를 써 보겠습니다.”

“헛, 그건 궁극마법이잖아. 이미 9서클의 경계선에 도달한 건가?”

“아닙니다. 아직 멀었죠. 하지만 빛의 구체에 담겨 있는 기적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맞다. 그거 기적도 쓰지.”

이반 경은 이미 빛의 구체에 대한 완벽한 제어가 가능해진 모양이다.

부럽다. 기적을 쓸 수 있다니.

9서클이 되어도 기적은 쉽게 쓰지 못한다.

그나저나 내 침묵하는 모자는 언제 또 말을 할까? 이놈이 기적을 쓸 수 있는 아티팩트인데, 딱 한 번 쓴 게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엿 먹이려 한 거였다는 거지.

쩝, 언젠가는 써 주겠지. 그래도 나를 주인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니.

나는 이반 경이 디바인 오러클을 쓰는 것을 기다렸다.

성녀인 미리아가 가끔 약하게 발동하는 예지의 힘을 확실하게 발동시키는 게 디바인 오러클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기적인 기적. 그러나 이걸 잘 못 쓰면 확정된 미래를 위해 현재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촤아아아아

빛의 구체가 커졌다. 그리고 사방으로 강력한 빛을 내뿜다가 곧 사그라졌다.

엄청난 힘이다. 영체로 궁극마법의 시전 되는 상황을 느끼니 정말 피부로 와 닫는 느낌이다.

“나왔습니다.”

“얼마나 걸려?”

무엇보다 결론이 나왔다면 이반 경이 신이 된다는 소리다. 하하하.

“이백 년 후에 제가 신이 될 거라는군요.”

“이런 젠장!”

이백 년은 또 뭐냐.

그러니까 이반 경이 빛의 구체에 담긴 힘을 다 흡수해서 9서클이 되고, 그 후 신이 되기 위한 퀘스트를 다 수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0년이라는 거다.

그럼 그 사이 물질계는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마족들의 유희장소가 되어 난리가 나도 수십 번은 날 것이다.

무슨 수가 없을까?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뾰족한 해결책도 생각이 안 난다.

“설마 내가 200년간 마족퇴치를 계속해야 하는 건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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