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73화
8장 틀을 벗어난 깨달음
상황이 급하다.
나는 얼른 미리아에게 물었다.
“미리아야, 지금 거기 싸우고 있니?”
“응, 그런 것 같아. 나 곧 꿈에서 깨어나야 해.”
이런, 미리아는 우리들이 대화를 할 수 있게 꿈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싸우기 위해 깨어나면 이제는 말을 못 하게 된다.
파싯
정말로 그 말을 끝으로 꿈에 의한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걸까?
최소한 셰이든이 작정하고 배신하려고 음모를 꾸민 이상 우리 쪽 전력에 대한 파악은 끝났을 것이다. 승산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적을 물리친다 해도 나와 이반 경, 그리고 렉스의 육체가 파손된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정말 자칫 잘못하면 난 셰이드가 되어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시선을 빛의 구체로 돌렸다.
이놈이 협조를 해 주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도 같은데, 약 올리듯 바깥쪽 상황만 이야기하고 반응을 안 한다.
의지력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은 상황이라 더 이상 무리를 할 수가 없다.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은 역시 미리아의 집으로 가는 걸까? 영체인 상태로?
그런데 그때, 이반 경이 두 손으로 빛의 구체를 잡고 강력한 의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빛의 구체는 이반 경의 이마 부분에 한 줄기 빛을 쏘았다. 마치 둘 사이에 빛의 선으로 연결이 된 듯하다.
“백마법에 작용하는군요.”
이반 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 맙소사! 미리아의 꿈침투와는 또 다른 영혼과 영혼의 대화법이다.
마치 테타스와 대화를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이반 경은 빛의 구체를 이용해 나에게 말을 건 것이다.
“게이트를 다시 열 수 있나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단지 그러려면 저는 코아트와 계속 접속해 있어야 합니다.”
“코아트가 그 빛의 구체의 이름인가요?”
“그렇습니다. 신의 마지막 자비심이라는 뜻이군요. 코아트에 의해 백마법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성녀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아하, 바로 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자아로군.
내가 이해를 하는 동안 이반 경의 영혼에서 점점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빛의 구체처럼 변했다. 형체를 지닌 빛의 구체랄까?
“게이트를 열겠습니다. 가십시오. 제가 돌아갈 때까지 제 육체를 부탁드립니다.”
파앗, 즈즈즈즈즈즈
두 가닥의 빛줄기가 이반 경의 몸으로부터 쏘아져 나왔다.
하나는 나의 몸에, 그리고 또 하나는 출구 쪽을 향했다.
동시에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파장을 느꼈다. 영혼의 울림이랄까?
이게 뭔지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이반 경의 육체로부터 내 육체로 마력이 전이되고 있었다. 일종의 기적이다.
이반 경이 평생 익힌 모든 마력이 내 몸으로 전해져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인 것처럼 심장에 서클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반 경의 몸속에는 순수한 백마법의 기운만 남았다. 나에게는 백마법 이외의 모든 마력을 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의 힘이다! 마력만 넘겨주는 게 아니라 서클 자체를 내 몸에 옮길 수 있다니. 마나뱅크보다 훨씬 대단한,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몸을 코아트의 힘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던 길이 보입니다. 제가 육체로 돌아갈 때에는 아마 스승님과 비슷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 이반 경이 드디어 9서클의 길을 따라 걷는 건가? 신이 남긴 힘을 몸 안에 받아들여 궁극의 백마법을 깨닫기 시작한 모양이다.
정령이 아닌 순수한 백마법의 힘으로 9서클이 되다니, 이건 나도 모르는 길이다.
스승으로써 이렇게 기쁠 수는 없다.
사실 유일한 대마법사라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정말 내가 아는 것을 같이 이해해주고 서로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대마법사가 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는 렉스와 함께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다시 이반 경을 보고 물었다.
“그 힘 다 흡수하고 길을 여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에게 시간은 무의미 한 것 같습니다.”
“천년쯤 걸릴 수도 있는 거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반 경의 육체는 일단 동결시켜 둘게요. 언제든지 영혼이 돌아오면 깨어날 수 있게 하고요.”
“부탁드립니다.”
역시 9서클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이반 경의 영혼은 앞으로 얼마나 이 안에서 있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빨리 돌아오면 좋을 텐데,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못 만날 수도 있겠다.
나는 아쉬움을 참으며 미래의 9서클 대마법사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슈욱
내가 눈을 떴을 때, 전신에서 강력한 힘을 느꼈다. 놀랍게도 내 심장은 이미 8서클을 형성한 상태였다. 바로 이반 경의 힘이다.
그 때문인지 영혼이 육체로 돌아왔을 때 생기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8서클이 되면서 육체가 다시 재구성된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옆에서 렉스도 꾸웅 하면서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렌! 깨어났구나.”
미리아가 반가움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떻게 깨어났지? 영혼이 섀도우 플레인에서 나올 수 없었을 텐데.”
셰이든의 경악에 찬 목소리도 들렸다.
이 놈의 자식,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쳐?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완전히 몸을 일으켜 셰이든을 보았다.
셰이든은 서피와 미리아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쪽으로 크리드 경과 마리포즈가 한 사람의 마법사와 대치하고 있었다.
“아론 경?”
“크크크, 렌 경, 깨어났군. 그런데 이반 경은 아직 못 깨어나나? 그가 없으면 나를 막을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저자가 엘프의 숲에서 언제 깨어나서 이쪽으로 온 거지?
나는 시선을 돌려 셰이든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아론 경을 깨웠나?”
“그렇다. 아론 경의 상태를 알게 된 이후 꿈침투 마법으로 그에게 알렸지.”
젠장, 셰이든이 아론 경이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진 것을 어떻게 알았지?
생각해보니 답이 곧 나왔다. 미스틱 섀도우는 미스틱 게이트의 모습을 투영한 환상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곳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면 미스틱 게이트 내에 울리는 소리를 엿들을 수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셰이든에게 그곳의 서브관리자 자격을 준 게 문제를 확대시킨 거다.
셰이든은 아론 경이 잠든 것을 알고 배신을 계획하자마자 꿈침투 마법을 써서 아론 경을 찾아간 거다.
아론 경은 자신이 정상적으로는 깨어나지 않음을 자각하자마자 잠든 채 육체를 조종하여 엘프의 숲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왜 배신을 했지? 내가 그렇게 미웠나?”
“아니, 나는 너를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하고 있지. 넌 신비한 구석이 많은 마법사다. 그 어린 나이에 지식과 깨달음은 7서클인 나를 넘어서 오히려 이반 경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다. 마치 대마법사 로엔의 환생처럼 말이지.”
뜨끔,
저 인간, 아니 셰이드가 예리한 구석이 있네. 나는 살짝 찔리는 느낌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배신을 한 거냐? 이번 일이 끝나면 넌 자유의 몸이 될 터인데.”
“호기심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협조를 하는 것도 10서클 파괴마법을 보고 신의 문이 깨어질 수 있는지 보기 위함이었지. 그리고 이번에 배신을 한 것도 네 육체를 손에 넣어 두뇌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뭐라고!”
“네 기억을 뒤져보면 알게 되겠지. 네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고위 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신력과 지식은 그보다 훨씬 대단할 수 있는지 말이야.”
아 놔, 이놈이 내 두뇌를 뒤지겠다고 이 일을 벌인 거구나.
정확한 판단이다.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수 있지.
단지 그런 식으로 기억을 뽑힌 내 두뇌는 망가질 것이고, 나는 육체를 잃고 셰이드가 될 뿐이지.
“알았다. 배신은 당연한 거였고, 내가 실수한 거라고 인정하지. 그럼 이제 너희들을 처단하겠다.”
“크크크, 렌 경, 그대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놀라운 경지에 도달한 것은 인정하지. 그러나 나 아론 체프코트를 상대로 처단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글쎄요. 그건 이제부터 싸워보면 알겠죠.”
미안한데 나 8서클이야. 7서클이면 몰라도 8서클이면 무조건 아론 경을 이길 자신이 있거든.
하지만 방심을 할 수는 없다. 아론 경은 콜레스 2세가 죽은 이후 뒤를 이어 마족의 후계자가 되었다. 마법 이외에도 강력한 능력을 따로 얻었을 터이니 그게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마리포즈에게 외쳤다.
“마리야, 이반 경의 육체를 가지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 그의 육체가 손상되지 않게 보호해.”
“호오,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니 이반 경은 섀도우 플레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군. 그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렌 경만 탈출시킨 것일까? 감동적인 이야기야.”
소설을 써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지팡이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선수 필승! 상대가 내가 8서클이라는 것을 눈치 채기 전에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여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