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165화 (165/250)

로엔의 마나뱅크 165화

위이이이잉

공간에 거대한 구체가 나타났다. 반투명한 회색의 구체의 표면에는 룬어가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영체를 소환함과 동시에 적절한 육체를 생성하기 위한 것이다.

파직, 파직

뇌전이 흐르며 구체가 점점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반 경에게 그려준 테타스의 본체 모습이다. 일종의 골렘과도 같은 건데, 내부 구동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테타스 본인이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나옵니다. 으윽.”

이반 경은 이를 악 물고 말했다. 테타스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곧 테타스의 모습을 한 형체가 땅에 내려서며 두 눈에서 파란 빛이 나타났다.

“누구인가? 이세계인 이곳에서 나의 모습을 공물로 바치는 자는?”

훗, 생각보다 쉽게 소환된 이유가 자기 모습을 아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군.

아직 테타스는 완전히 소환되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환에 응할지 안 할지 간을 보는 상태라고 할까?

이게 사실은 강제소환진이기는 한데, 원래 강제라는 것은 그만큼 이쪽의 부담도 커지는 부분도 있어서 일단계로 평범한 공물 소환을 한 것이다.

이반 경의 품속에 있는 도암의 생명석을 이용하면 강제소환이 되는데, 그걸 안 쓰고 외형뿐인 골렘만으로도 소환이 진행되는 상황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반 경은 의식을 집중시키고는 테타스에게 말했다.

“나의 스승이 섀도우 플레인에서 테타스를 보았다. 이에 나는 스승을 대신해서 테타스를 소환하게 되었다. 테타스여, 그대는 나의 소환에 응하여 나의 스승과 대화하라.”

절대적인 존재에게 대명사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항상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서 관계의 끈을 명확하게 유지해야 한다. 대명사 잘 못 썼다가 소환대상이 장난을 쳐서 관계가 이상하게 비틀어지면 또 다른 소환자가 튀어나올 수 있는데, 이건 보통 흉폭한 마물 같은 놈이 대부분이다.

“크크크, 그 마법사의 제자인가? 스승과 제자가 모두 훌륭한 마법사로군. 하지만 글쎄, 나를 소환할 자격이 있을까?”

“둔하구나. 테타스. 너의 계약자는 이미 소멸했고 육체도 정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네가 나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넌 이대로 패배자가 되어 너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은 것이다.”

“뭐라고? 크큿.”

테타스 저놈 진짜 웃기네. 계약자가 죽은 게 자동확인이 안 되나보지?

뭔가 똑똑한 듯 한 첫인상이었는데, 도암처럼 좀 허당인 구석이 있었군.

테타스는 곧 이반 경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하군. 그 새 나의 계약자를 찾아내 처치할 수 있다니. 데빌 베인이 그동안 적지 않은 경쟁자들을 처리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실력이 있구나.”

“확인했으면 어서 소환에 응하라. 내 스승이 너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크크크, 좋다. 이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궁금하군. 소환에 응하도록 하지.”

성공이다. 껍데기뿐인 테타스의 외형에서 묘한 생기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테타스의 영혼이 새로운 육체를 받아들여 정착을 하고, 외형의 내부를 자기의 뜻대로 바꾸어 강력한 존재로 물질계에 현신하는 것이다.

소환에 응하는 순간 테타스는 이곳 전체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렌 브로스마이어. 여기 있었군. 네가 나의 계약자를 죽일 줄이야. 하지만 나를 소환한 이상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너의 육체는 파괴되고 영혼은 나에게 흡수당해 영원히 암흑의 공간에 갇히게 될 테니까.”

테타스의 존재감은 정말 강력했다. 이곳은 지하이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바깥쪽에는 온통 먹구름이 끼고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테타스가 약간은 굴욕적인 이반 경의 소환에 응한 이유는 단 하나다. 육체를 얻어 물질계에 현신할 수 있다는 것.

계약자가 소멸한 이상 패배가 거의 확정이 된 상황에서 본신이 직접 힘을 쓸 수 있는 육체를 손에 넣었으니 이것은 반전의 빌미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원래 계약자에게 힘을 빌려주되 본신이 직접 힘을 써서는 안 되는 게 그들간의 규칙이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소환을 당하면 규칙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테타스에게 병을 주고 다시 약까지 준 셈인데,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테타스는 나를 협박해서 새로운 계약을 할 생각인 듯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이반 경을 가리켰다.

“책임은 서로 져야지. 테타스는 소환에 응한 이상 무엇보다 먼저 이반 경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잖아.”

“이반 경이라, 그대의 제자라고 했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나의 스승과 싸우는 것이다.”

“뭐라고?”

“렌 브로스마이어와 싸워라. 테타스가 렌 브로스마이어를 이기면 소환의 대가는 이루어진다.”

“크크크,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너희들 설마 나와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테타스는 크게 웃었다. 지하실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미리 파 놓은 통로로 뛰어 들었다.

테타스가 이반 경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 직전에 내가 싸울 장소까지 도망을 가는 게 이번 전투의 초반 작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좋아, 테타스는 렌 브로스마이어와 싸우겠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물론 나는 마법까지 써 가며 미친 듯이 달렸다.

“싸우자고 하면서 도망을 가다니. 갈수록 재미있는 놈이로군.”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테타스와 렌이 싸우면 주변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크크크, 틀린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싸움의 장소에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놓았겠군. 좋아. 우선 그곳까지 가기 전에 렌을 잡는 게 좋겠군.”

팟, 쒜에에에엑

등 뒤로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로 보아 테타스가 엄청난 속도로 나를 쫒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테타스의 존재감이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정말 예상보다 빠르다.

“젠장, 포스 월.”

혹시나 해서 터널 중간 중간에 마법 구동진을 설치해 놓았기에 이럴 때 대처할 수 있다.

내가 달리면서 구동어를 외치자 터널에 강력한 역장의 벽이 만들어졌다.

파캉, 파캉, 파캉

세 개의 포스 월이 순식간에 깨어진다. 그러나 포스 월은 애들 장난이 아닌 7서클 마법이기 때문에 테타스도 가속을 잃고 거의 멈췄다.

다시 가속하게 하면 안 된다.

나는 앞으로 몸을 날리며 허공에 뜬 채로 몸을 돌려 테타스를 보았다.

“포스 램”

역장의 공성추가 테타스에게 적중되었다. 그러나 이건 테타스를 밀어가 부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가 튕기기 위함이다.

예상대로 포스 램은 테타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대로 튕겨서 나를 때렸다.

상당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결계로브의 힘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 나는 가속도를 받아서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이동했다.

“포스 램! 포스 램!”

쾅, 쾅

다시 두 번 연속해서 포스 램을 쓰니 이제 곧 터널의 끝 부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나 테타스는 더 이상 포스 램을 튕기지 않고 살짝 몸을 비틀어 흘려내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도 가속도가 약간 늦어졌지만 나도 더 이상 튕겨나지 못하고 그냥 땅에 착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중요하다. 계속 뛸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뛰자.

나는 달렸다. 가속 마법이 걸려 있어 경주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테타스의 가속은 더욱 빨랐다. 그자는 정말 바람처럼 단숨에 내 등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뿌우야, 부탁해.”

“알았당.”

슈욱, 파지지지직

결정적인 순간에 뿌우가 나타나서 나를 날려보냄과 동시에 테타스에게 강력한 뇌전의 기운을 발사했다. 동시에 이반 경 쪽에 미리 소환해 놓은 대지의 정령으로 터널에 굵은 바위벽을 만들었다.

“방해를 하다니!”

테타스는 화를 내면서 주먹으로 바위벽을 부수고 입을 벌려 뇌전을 삼켜 버렸다.

하지만 테타스는 이반 경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반 경은 소환자이기 때문에 테타스가 그를 해할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해하려 한다면 계약이 강제해지 되어 버린다.

테타스가 이반 경을 공격하려면 소환의 대가를 완수한 다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계약 해지가 안 되니까.

물론 이반 경도 테타스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단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바위벽을 소환하는 것은 딱히 테타스를 공격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싸움터에는 내가 이반 경의 주문을 받아서 쓸 수 있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한 번에 두 가지 마법을 쓸 수 있고, 사실 상 이반 경은 나를 통해 테타스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제어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지만 이미 파즈스와 싸울 때 해 본 일이기에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어려워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겨우 예정대로 터널을 빠져나와 싸움터에 자리를 잡고 설 수 있게 되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크리드 경이 민첩하게 터널 출구 옆으로 붙었다. 테타스가 튀어나오는 순간 공격을 가할 계획이다.

그러나 테타스는 더 이상 터널을 따라 이동하지 않았다. 이반 경이 소환한 바위벽을 부수자마자 그대로 땅을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고, 저자가 두더지 같은 능력도 있었네.”

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역시 도암을 통한 능력 예측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긴장을 하며 테타스가 어디서 튀어 나올지 감지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