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63화
팍
다시 삭풍의 창이 도암의 한쪽만 남은 팔을 스쳤다. 제대로 맞았으면 도암은 양팔을 모두 잃는 셈인데, 스친 걸로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도 위협은 되었는지 드디어 도암이 크게 외쳤다.
“끝장을 보자!”
꽈드드등
오오, 또 다른 한 수가 있었군.
같은 걸 반복해서 쓰는 게 아니었다. 도암의 몸으로부터 검은 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번개는 뿌우의 몸을 관통했는데, 뿌우는 꼬챙이에 꽂힌 생선처럼 검은 번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더 이상 도암을 공격하지 못했다.
이반 경은 검은 번개가 결계를 뚫고 들어오자 급히 자세를 낮추며 다시 방어막을 쳤다. 검은 번개는 결계를 뚫을 충분한 힘이 있었지만 그만큼 약화가 되어서인지 이반 경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비껴나갔다.
나는 결계로브의 힘으로 검은 번개가 뚫고 지나간 듯 했지만 그냥 빠져나왔다.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결계로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그그긍, 아프당.”
“헛, 너희들은 어떻게 블랙썬더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지?”
뿌우는 엄살을 떨고 있고, 도암은 나와 이반 경이 자신의 필살기를 피하자 너무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나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뿌우, 소환해제. 뿌우, 소환.”
아무리 움직임을 제어하는 검은 번개라고 해도 정령이 정령계로 돌아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뿌우는 내 옆에 다시 소환되었다.
도암은 마족의 후계자들 중에서도 그다지 강력한 편은 아닌 듯하다. 테타스가 계약을 좀 잘못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나한테 이런 놈을 도와서 세상을 정복하고, 자신을 승자로 만들라고 했다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난다.
“네놈이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쉬지 않고 싸워왔다. 전투의 경험이 다르지.”
나는 차갑게 말하며 손을 들었다 내렸다.
그러자 옆집의 벽이 쾅 하고 부서지며 크리드 경이 튀어나왔다.
“어엇!”
“죽어랏, 괴물.”
크리드 경은 나타나자마자 인정사정없이 도암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팔이 하나만 남은 도암이 크리드 경의 공격을 잘 받아낼 리가 없다.
나는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나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삭풍의 창으로 공격을 하는 게 더 위력적이지만 크리드 경이 근접전에 들어선 순간 내가 끼어들 공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는 보조역이다.
이반 경이 포스 케이지를 펼치면 나는 젤라틴 쉘로 도암의 몸에 끈끈이를 발라 움직임을 둔하게 했다.
파팍
드디어 도암의 남은 팔이 날아갔다. 그리고 곧 이어 도암의 목도 베어졌다. 크리드 경이 없을 때에도 밀리던 도암이었기에 크리드 경이 끼어든 순간 여차할 대응을 할 여유도 없이 당해버린 것이다.
또 다른 필살기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두 번이나 필살기로 쓴 큰 기술이 무용지물로 돌아갔기에 자신을 잃고 망설이게 되는 순간을 우리는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아직 옆집에 있는 미리아에게 외쳤다.
“정화해. 잘못하면 재생할 수 있으니까.”
“알았어. 숲의 정화!”
사사사사삭
옆집으로부터 나무줄기들이 뻗어 나와 도암의 목과 몸통을 감아서 들어올렸다. 나무줄기들이 도암의 몸속에 파고들어 쉬지 않고 내부를 파괴하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다.
이반 경도 역시 백마법의 정화 마법으로 혹시라도 도암의 몸이 재생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막았다.
“역시 싸움은 심리전이야. 아니면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나는 주변에 다른 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어둠의 장막을 치며 중얼거렸다. 아직 도암의 수하들이 꽤 많이 남아있었지만 마리포즈가 착실하게 처리하고 있는 중이니 곧 끝날 것 같았다.
“집 한 채는 날아갔네?”
미리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우리가 싸웠던 집은 첫 번째 충격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을 뿐 아니라 바닥도 크레바스가 생겨 버렸다.
옆집들 역시 거의 파괴가 되었고, 유일하게 미리아와 크리드 경이 숨어 있었던 집만 거의 파손이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역시 이 정도까지 집들이 파괴되면 다 다시 지어야 할 거다.
“길드장한테 우리 신분을 밝히고 변상한다고 해. 그리고 남들 모르게 이번 마족의 후계자가 길드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러면 길드장이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나는 뿌우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정령이 가서 전갈을 하면 안 믿을 수가 없지. 대기의 정령인 뿌우는 내 신분증명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자식 잘 못 두면 부모도 같이 망하는 건데, 비밀로 해 주는 대신 뒤처리라도 시켜야지. 암.
어쨌든 생각보다 도암은 약했다. 마족의 후계자와 싸우면서 이 정도까지 긴장을 안 한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
미리아가 핏빛 사과를 하나 들고 와서 말했다.
“도암의 육체는 다 정화해서 분해했어. 그런데 이건 도암의 심장부근에 있는 보석인데, 마기가 지독해서 잘 정화가 안 되네. 일단 사과로 봉인해 놨는데 렌 너한테 줄게.”
“사과 안에 도암의 심장보석이 있다고?”
“응, 그리고 이번에 느낀 건데 마족의 계약자는 몸 전체가 마기에 오염되어 있어서 철저하게 정화하지 않으면 땅에 부패를 일으킬 것 같아. 우리가 전에 죽인 자들도 마찬가지였을걸?”
“돌아가서 한 번 조사해 보자. 으그, 역시 마족의 계약자들은 죽어서도 민폐인 거군.”
나는 사과를 받아 챙기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사람들이 서서히 몰려들어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리는데 괜히 얼굴 팔려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테타스를 소환해서 처리하는 것뿐이군요.”
“그것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중요한 일이죠.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겁니다.”
나는 이반 경과 크리드 경에게 테타스의 생김새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했다. 도암이 싸우는 모습과 능력을 보고, 다시 테타스의 외형을 되새겨보니 그자의 싸움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거대한 덩치에 팔이 네 개면 무투가로써 굉장한 파괴력을 낼 수 있겠군요.”
“주먹에 방어막을 치고, 그게 다른 방어막을 깰 수 있으니 이쪽에서 아무리 방어막을 치고 대비를 해도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피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피하기도 쉽지 않은 게 도암이 두 번째 쓴 기술은 상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어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뿌우 같은 정령조차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도암이 그 정도면 테타스는 더 하겠죠? 이반 경의 결계도 깨어졌으니 이번에는 정말 이반 경도 걸려들 가능성이 높아요.”
“크리드 경은 검은 번개를 피할 수 있을까요?”
“확률은 반반 정도겠지. 번개면 보고 피할 수는 없고, 예측과 감으로 미리 피해야 하는데,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라.”
“어쩌면 제 로브도 뚫릴 수 있어요. 상대는 고위마족이니 공간 결계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잘 못 걸리면 한 번에 전멸인가요.”
“첫 번째 쓴 충격파 같은 힘도 대단했습니다. 그것도 만약 더 강하게 쓰거나 연속으로 쓰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더군요.”
“쩝, 쉬운 건 없네요. 그래도 일단 소환 시기와 장소를 우리가 정할 수 있으니 확실하게 준비를 하고 소환하면 어떻게든 될 거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대충 어떻게든 되는 수준으로는 싸울 수 없는 상대다. 철저하게 분석을 해서 드러난 부분을 모두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혹시 우리가 모르는 능력이 튀어나오면 임기응변으로 대처를 할 여유가 생긴다.
우리가 그룹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채 길을 걸으며 토론을 하는데, 갑자기 크리드 경이 한쪽을 보며 말했다.
“누구지? 왜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오지?”
투명 마법인 우리를 쫓아올 수 있다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소리다.
내 감각에는 안 걸리고 크리드 경의 감각에만 걸린 것도 대단하다.
암살자인가?
나는 살짝 긴장을 하며 그쪽을 보았다.
그러자 골목길 안쪽으로부터 키가 작은 약간 어린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미행하다 남한테 들킨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파암 이라고 해요. 도암 형의 동생이에요.”
“새로운 후계자인가?”
크리드 경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반 경은 파암에게서 어떠한 마기도 느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우리를 쫓아온 거지?”
“먼저 도암 형을 처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릴게요. 길드원들이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거든요. 아버지도 그렇고요.”
“그런가?”
“그리고 도암 형이 죽으면서 자동적으로 저한테 형의 사업체가 모두 넘어올 것 같아요. 몇 가지 일이 있지만 잘 처리할 자신이 있고요.”
이것 봐라? 겨우 소년티를 벗어난 나이인데 어둠의 조직을 통째로 꿀꺽하겠다고?
나는 묘한 눈으로 파암이라는 소년을 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것이 나름 긴장을 하고 있다. 우리를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데빌 헌터 일행이시죠? 도암 형이 죽을 때 생각났어요.”
“그걸 보고 있었구나.”
“예, 저는 감시역이거든요. 그런데 말이에요. 도암 형이 은거지에 이상한 것들 몇 가지를 숨겨 놓았거든요. 그것도 좀 처리해 주실래요?”
“이상한 것들이라면 구체적으로 뭐지?”
“살아 움직이는 동상이라던가, 뼈만 남은 개, 껍데기만 남은 거대한 곤충 같은 거요. 도암 형이 죽어서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라도 그것들이 난동을 부리면 감당이 안 되거든요.”
“그래? 알았어. 그것까지 처리해 주지.”
이게 웬 횡재냐. 지금 파암이 말한 것들은 대부분 마법으로 만든 골렘류인데, 이거 꽤 만들기도 힘들고 재료도 무척 비싸다. 그것들을 다 합치면 우리 민민브이 제작비 정도는 될 걸?
도암이 이곳에서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자신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강력한 골렘류들을 제작하고 있었구나.
나는 일행과 함께 파암의 안내를 받으며 서둘러 도암의 본거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