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57화
3장 마수 렉스
렉스는 마수다.
이전에만 해도 조금 이상하긴 해도 ‘개’라고 분석 결과가 나왔는데, 이제는 ‘마수’라고 나온다. 한 마디로 기존에 물질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체라는 소리다.
웨어울프의 병원균이 렉스의 몸에서 계속 퍼지고, 거기에 마기까지 흡수를 하다 보니 정말로 본질 자체가 변해서 새로운 종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농담처럼 렉스가 마수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정말 종 자체가 바뀌어 버리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렉스가 불쌍하기도 했다.
“렉스야, 미안. 네 몸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걸 미처 몰랐네.”
나는 렉스에게 사과했다.
렉스가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한지 자각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인간에서 다른 어떤 종으로 변해도 별로 기분이 안 좋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 전에 렉스의 몸을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았던 것이 미안했다.
이미 변했기 때문에 예전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돌아간다고 해도 이미 개의 평균수명을 훨씬 넘겨서 살아온 렉스이기에 치료하는 순간 늙어서 죽는 수가 있다.
컹, 컹
렉스는 괜찮다는 듯 두어 번 짖고는 혀로 내 머리를 핥았다.
뭐,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으려나? 일단 강해지고 수명이 늘어나기도 했고.
그러도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느낌이 남아있다.
“그건 그렇고, 영혼 상태에서 셰이드를 먹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은 도대체 뭐지?”
이건 분석이 안 된다. 그냥 이미 소화되어 렉스의 영혼에 흡수되었다고만 나오는 것이다.
어쨌든 난 삭풍의 창 이상으로 섀도우 플레인에서 나를 지켜줄 동료를 얻은 셈이다.
“옛날에 내가 처음 모험을 떠날 때에는 너랑 나 둘뿐이었는데, 이제 또 다시 둘이서 섀도우 플레인을 돌아다니게 생겼구나. 하하하.”
처음 영지를 떠나 내 비밀연구실을 찾아갈 때에는 이반 경도 미리아도 없었다. 이제는 내 영지도 생기고 동료들도 늘어났지만 나의 첫 친구이자 동료는 역시 렉스라 할 수 있다.
나는 손을 들어서 렉스의 목털을 쓰다듬었다. 목걸이의 강력한 파워 때문인지 렉스의 목털은 다른 곳에 비해 빠르게 자라 지금은 거의 사자갈기처럼 풍성해 진 상태다.
“좋아, 그럼 다시 한 번 들어가 보자고.”
새로운 동료를 얻었으니 심기일전해서 나아가는 보기로 했다.
나는 즉시 렉스와 함께 섀도우 플레인에 진입했다.
“렉스야, 나를 태울 수 있니?”
영혼이 영혼을 등에 태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영혼끼리는 서로 닿을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의 실험결과다. 서로 닿는 순간 침식이 일어나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렉스의 등에는 올라탈 수 있었다.
영혼이 닿아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관념적으로 올라탔다는 기분이 들 뿐, 실제로는 렉스의 등 위에 조금 떠 있는 것과 같다.
“흠, 생전의 습관 때문인가? 이게 되는군.”
렉스는 나를 태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나 역시 렉스의 등에 타는 법을 안다. 그게 영혼끼리 서로 어느 정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움직이려 하지 않아도 렉스가 앞으로 걸어가니 저절로 같이 움직인다. 물질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 섀도우 플레인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한 일이다.
나는 신기해 하면서도 렉스의 목을 툭툭 두드려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렉스는 덩치도 커서 이동속도도 빨랐다. 곧 첫 번째 구덩이를 지날 수 있었고, 5분이 채 안되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크르르르
갑자기 렉스가 한쪽 공간을 향해 경계의 울음소리를 냈다.
셰이드다. 모두 여섯 마리.
크왕
“헐, 렉스 네가 짱 먹어라.”
나는 렉스가 셰이드를 하나하나 삼키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보이게 섀도우 플레인의 최강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렉스다. 어떻게 셰이드를 통째로 삼켜서 소화시킬 수가 있냔 말이야.
이렇게 되니 나는 굳이 의지력을 소모해가며 셰이드를 상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공간의 침식을 막을 정도로만 최소한의 의지력을 쓰며 버티면 되니 섀도우 플레인의 탐색이 몇 배나 쉬워진 셈이다.
“계속 가자고. 오늘은 한계까지 가 보는 거야.”
나는 약간 흥분상태가 되어 말했다. 예정보다 계획이 6개월은 빨라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곳은 섀도우 플레인,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고 셰이드보다 더 한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다.
삭풍의 창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렉스가 처리 못하는 무엇인가가 나오면 믿을 것은 삭풍의 창뿐이다.
영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창.
유사시에는 이걸로 어떻게든 될 거다.
사실 마법을 못 쓰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나는 마법사인데, 이곳에서는 의지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초월자가 아니라는 것을 냉정하게 느끼게 해 주는 공간인 거지.”
나는 스스로 겸허해지기로 했다.
나는 신이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아간 인간일 뿐이다.
마나뱅크라는 희대의 아티팩트 공간을 만들어내고, 또 미스틱 섀도우라는 특이 공간까지 창조했지만, 그 정도로 초월자로 자부할 수는 없다.
그저 초월자의 영역에 한 발을 디디고 안을 살짝 엿보는 정도?
아직도 칼을 맞으면 죽고, 독을 먹어도 죽는다.
그러니까 영혼이 육체에 매여 있는 유한자에 불과하다.
나는 렉스의 걸음에 몸을 맡기는 동안 계속해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앞쪽에 환한 느낌이 나며 무엇인가 경건한 기분이 되었다.
“아! 저것인가!”
정말 느낌만으로도 할 수 있다. 저곳에는 신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백마법하고는 또 다른, 그야말로 순수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놀랍게도 신성력은 섀도우 플레인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빛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환하게 느껴지고, 힘은 전해지지 않아도 느낌은 전해진다.
크르르르르
렉스가 괴로운 듯이 자세를 낮추며 신음성을 낸다. 얘가 마수가 되더니 신성력에 안 좋은 영향을 받나보다.
“렉스야, 넌 여기서 기다려. 나 혼자 가 볼게.”
끄응, 끙
렉스는 얼른 나를 내려놓고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나는 일단 위치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신성력이 느껴지는 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공간이 뚫려있고 결계로 입구가 막혀 있는 것은 다른 구멍과 비슷하다. 그러나 뚫려있는 구멍의 안쪽이 보인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쪽 공간이 고정되어 있어서 사물의 위치가 특정된다고 할까?
바닥이 있고, 흔적도 있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부터 나온 신성력이 결계 너머 섀도우 플레인 안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게 신의 힘이구나.
나는 절실하게 느꼈다. 발자국 하나에도 10서클 마법의 힘이 느껴진다고 할까? 나는 경건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서에서 본 고대의 사제들이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했다.
결계로 막힌 구멍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이것은 유한자가 초월자에 대해 행하는 경의의 표시이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결계의 막을 만지려 했다. 역시 만져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 나쁜 느낌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듯 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반 경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면 장난 아니겠네. 어쩌면 여기 죽치고 살면서 신성력과 백마법의 차이에 대해 연구를 할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백마법과 신성력에 통달한 셰이드가 탄생하는 게 아닐까?
나는 쓸 데 없는 상상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렉스가 한쪽 공간을 향해 크게 짖기 시작했다. 영혼의 울림이 거세게 느껴진다.
컹, 컹, 컹, 컹
저 울음소리가 바로 렉스가 과거 개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묘하게 짖는 소리는 옛날 늙은 양치기 개일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소리가 열 배쯤 커졌을 뿐이다.
“뭐지? 렉스야. 일단 짖는 거 멈춰 봐.”
나는 의식을 집중해서 렉스쪽을 살펴보았지만 아직 별 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몸이 움찔거릴 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셰이드와는 또 다른 섀도우 플레인의 괴물인 듯 했다.
사람보다 다섯 배 정도 큰 몸집, 거인처럼 생겼는데 팔이 여섯 개나 달렸다. 그리고 여섯 개의 손은 모두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무기에서 삭풍의 창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순한 형태로써의 무기가 아니라 정말로 이곳에서 힘이 발휘되는 신급 무기임에 틀림없다.
“쿠쿠쿠, 주인이 돌아왔나 보러 왔다가 다른 자를 발견하게 되다니. 놀랍군.”
“그대는 누구죠?”
“테타스, 너는 누구냐?”
상대가 내 질문에 답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순간 강력한 강제력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렌 브로스마이어, 그대는 이세계의 불멸자인가요?”
젠장, 이것도 혹시 저주 때문인 건가. 하필이면 섀도우 플레인에서 고위마족을 만나다니. 고위마족은 이 안에서도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모든 마법이 봉인당한 상태고 영혼뿐이라 결계의 로브와 같은 방호구도 없다.
이곳에서 저자와 싸우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이다.
그러나 테타스는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감정이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보니 저자는 말을 한다. 이 공간에서!
아무래도 법칙을 무시하거나 내 영혼의 감각을 현혹시키는 수단이 있는 것 같다.
“정말 놀랍군. 설마 유한자였다니! 고위 마수와 영혼으로 제작된 무구까지 지닌 채 말이야.”
크르르르
렉스는 테타스가 자신을 바라보자 자세를 낮추고 다시 낮게 울음소리를 냈다.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 하지만 싸울 의지는 있는 듯 언제라도 뛰어올라 테타스의 목을 물어뜯을 기세다.
“재미있군. 이 마수는 다른 차원의 생물이 아니구나. 이 세계에서 태어난 자연마수야. 가진 힘을 모두 제약 없이 쓸 수 있다니, 정말 부러울 정도로 강하구나.”
테타스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렉스를 보며 연신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렌 브로스마이어라는 이름은 들은 바가 있다. 나의 계약자가 말하길 너는 모든 계약자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더군.”“틀리지 않군요. 나는 물질계의 주민으로써 당신들이 이곳을 유희의 공간으로 사용하게 허용할 수 없습니다.”
“대단해. 그런 의지를 가진 자가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신이 버린 세계에서 말이지.”
신이 버린 세계라. 참 씁쓸한 말이다.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신을 만나야 알 수 있는 것이고, 나는 꼭 저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신을 만나볼 거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저 고위마족 테타스에 집중하자. 여기서 삐끗 잘못했다가는 영혼이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다.
“저와 싸울 건가요?”
“아니, 나는 싸우지 않는다. 내가 직접 싸우면 규칙에 어긋나지. 넌 내 계약자가 처리할 거다. 하지만 쉽지는 않겠군. 마수와 영혼무구까지 지닌 자라면 거의 초월자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지.”
칭찬해줘도 별로 기쁘지 않거든.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테타스와 대화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