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9화
*
스스스스
공간이 열리며 셰이든이 나타났다. 공허한 느낌의 검은 그림자. 그는 날 보고 손을 가볍게 저었다.
[괜찮나? 적응할 만 해?]
나는 수화로 그렇게 물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셰이든과 수화 연습을 꾸준히 해 왔는데 미리아처럼 특수한 능력이 없으면 이곳에서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수화라도 써야 한다.
그러니까 여긴 그나마 좋은 환경인 거다. 섀도우 플레인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으니 수화도 힘들다.
셰이든은 주변을 돌아보며 평소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어 수화로 답했다.
[대단한 세계다. 이런 아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림자 공간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는데. 허상이 비치는 거 빼고는 말이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궁금하군. 허상이 비치는 것도 에너지 아닌가? 어떻게 이런 공간에 허상이 비칠 수 있지?]
[이론을 설명하자면 길다. 넘어가자.]
셰이든이 내 제자도 아닌데 노하우를 가르쳐 줄 수는 없지.
내가 설명을 거부하자 셰이든은 상당히 기분이 나쁜 듯 했다. 그러더니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대화를 걸었다.
[나와 모의 전투를 하자고 했었지? 일단 한 번 해 보자.]
[성격도 급하군. 알았다. 언제든지 와라.]
[다시 말하는데 난 진짜로 공격할 거다.]
[두 번 말하지 말고 와라.]
스스스스
셰이든이 움직였다. 이곳에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서로간의 공격이라고 할 게 그저 자신의 몸을 내 몸에 겹치게 하는 육탄돌격뿐이다.
나는 일단 피하지 않고 한 손을 뻗어 셰이든의 몸을 막으려 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몸이 미끄러지듯 빗나가서 겹쳐지지 않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섀도우의 능력은 바로 영혼침식.
스슥
‘으으윽!’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이것은 통증이 아니다. 그냥 내 몸이 뼛속까지 다른 색으로 변질되는 듯 한 느낌?
셰이든의 몸이 내 손가락 절반 정도까지 겹쳐졌다. 그리고 셰이든의 몸속으로 들어간 손가락 끝으로부터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전달되어 왔다.
세이든은 두 팔을 휘둘러 나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얼른 손을 빼며 옆으로 피했다.
손가락 끝이 약간 검게 변했다. 그리고 허상이 지워졌는지 사람의 손이 아니라 투명한 유령의 손이 되어 있다.
솨아아아
셰이든이 몸이 길게 늘어나며 커다란 뱀처럼 내 주변을 감았다. 오호, 이런 것도 되는구나.
영혼뿐인 자신의 몸의 외형을 바꿀 수 있다. 섀이드라는 상급 언데드의 특수한 능력 중 하나지만 이 정도로 길게 늘여도 되는 줄은 처음 알았다.
나는 급히 몸을 허공으로 띄워 셰이든의 몸에 감기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는 의식을 집중해서 손가락 끝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다.
다행히 생각대로 손가락에 물든 검은 색은 곧 사라지고 원래대로 되었다. 가벼운 침식은 자체정화 시킬 수 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자, 다음은 침식 자체를 의지로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나는 다시 셰이든에게 접근해서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냥 손만 내민 게 아니라 강렬한 의지를 담아서 밀쳐낸 건데, 과연 이번에는 셰이든의 몸이 살짝 밀려났다.
그러자 셰이든은 깜짝 놀란 듯 몸의 변형을 원래대로 되돌린 후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설마 영혼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가? 마법도 없이?]
질문 한 번에 물음표를 세 개씩이나 쓰지는 말란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설명을 해 주었다.
[말하자면 언령과도 같은 의지의 힘이지. 그러니까 언령의 최상위 단계인 무언언령 말이야.]
언령은 말이 힘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게 최고 수준이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것이 말이 되고 힘이 된다.
그것을 무언언령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번 움직임에 내 의지를 담아 무언언령의 형태로 발산했다.
[으으으, 무언언령이라니. 이제 보니 넌 9서클 대마법사였구나!]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마법을 뺀 이 세계에서는 대충 비슷해.
내가 부인하지 않자 갑자기 셰이든이 나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얘는 또 왜 이러는데?
나는 기가 막혀서 잠시 수화를 멈추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너 같은 제자 둔 적 없고, 셰이드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어. 물질계에 나가서 얼마나 큰 사고를 치려고.]
[마법을 쓰려는 게 아니라 그냥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 어차피 전 이곳에서 안 나갈 생각입니다.]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겠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가르쳐 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배울 수는 있지. 이 공간을 잘 연구해 봐. 기왕이면 확장도 좀 시켜놓고.]
[아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관리하고 정비 하겠습니다.]
말이 쉽지. 한 번 해 봐라. 크크크.
그리고 솔직히 허상공간에서 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셰이든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해도 이곳에 갇혀 있으면 얼마 못 가서 다시 물질계에 들어오기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허상공간은 일종의 감옥이다. 셰이든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잊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곳을 벗어날 연구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이성 자체가 마비되어 그냥 존재만 하는 상태가 될 것이다.
셰이든을 용서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항복을 했기 때문에 소멸을 시킬 수는 없지만 물질계의 모든 마법사들을 죽이겠다는 존재를 그냥 놔둘 수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갇힌 줄도 모르고 그냥 연구만 하다가 시간의 흐름을 잊는 자. 그게 셰이든의 미래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처지의 마법사가 또 한 명 있군. 이반 체프코트 경. 아직도 자고 있겠지? 숲의 힘으로 발동시킨 잠의 저주는 아주 무섭다.
적어도 천년은 자야 깨어날 것이고, 그때에는 이미 마족과의 계약기간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이반 경은 영혼을 마족에게 빼앗겨 물질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그쪽에서 공격을 해 봐. 피하지 않고 아까의 힘으로 막아낼 테니.]
[알았습니다.]
스스스스
다시 셰이든의 몸이 길게 들어나며 나를 사방에서 조여 왔다. 이거 못 막으면 정말 둘둘 감긴 채 전신이 침식되어 버린다.
나는 강렬한 의지를 토대로 내 영혼에 그 무엇도 간섭하지 못한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말 셰이든의 몸은 나와 겹쳐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이거라면 섀도우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의지가 얼마나 지속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한계가 오자 순간적으로 더욱 강한 힘을 발산해서 셰이든의 몸을 밀쳐내고 그대로 위로 날아올랐다.
[1분 32초, 이게 한계인가.]
무언언령의 유지시간은 1분 30초 정도인 셈이다.
[대단하군요. 제가 언령을 쓰면 1초나 2초 정도면 끝인데.]
[그건 마법으로 언령을 흉내 내는 거고, 진짜 언령은 몇 배나 더 힘든 거야.]
나는 감히 비교할 생각도 말라고 딱 잘라서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이 공간에 얼마든지 머물러도 크게 괴롭지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외로움과 적막함을 느끼는 감정의 제어가 강해진 것인데, 이정도면 섀도우 플레인에서 한참 돌아다녀도 최소한 정신이 붕괴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도중에 섀이드들을 만나도 1분이 넘는 시간동안 나를 방어할 수 있으니 충분히 원래 진입한 곳으로 돌아올 여유는 있는 셈이다.
이제 마지막 문제는 섀도우 플레인의 지리다. 사실 그곳은 공간이 얽혀서 계속 움직이는 곳이라 고정된 지리가 아예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들어간 곳과 내가 가려는 곳 정도는 항상 좌표를 감지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섀도우 플레인에서 특정 좌표를 인식하고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뭐, 그건 방법이 있지. 내가 좌표를 언령으로 기억하면 되니까.
그러면 중간 경로를 몰라도 가다보면 결국 기억한 장소까지 가게 된다. 지금이 내 정신력이라면 다섯 장소 정도는 위치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 이제는 섀도우 플레인에 들어가서 탐색을 통해 신이 지나간 통로를 찾아내면 된다.
[수고했어. 난 이제 나갈 테니. 연구 잘 해라. 설계도면은 지하실에 있으니 허상의 확장이 가능해지면 계속 작업하고.]
[알겠습니다.]
셰이든은 그렇게 자신의 집이자 감옥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고, 나는 내가 태어난 물질계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싸울 만 해?”
아, 귀가 울린다. 고막이 흔들리는 감각이 이렇게 강렬한 것이었구나. 영혼이 육체로 돌아온 직후에는 정말로 모든 감각이 이렇게 예민해진다. 어쩌면 케이니 양의 청각과 후각이 항상 이런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통증으로까지 느껴지는 미리아의 목소리에 묘한 감동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섀이드 대책은 어느 정도 섰어. 단순하지만 그만큼 확실해.”
“다행이다. 침식도 회복 되는 거지?”
“응, 심하면 모르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후유증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괜찮다. 손가락이 저리거나 하지도 않고, 마법적으로 체크를 해 봐도 원래의 내 손가락 그대로다.
하지만 이게 손가락 끝이 아닐 팔 전체가 되거나 두 다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섣불리 실험을 하다가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된다던가 하면 그냥 반신불수가 되는 거다.
“일단 혹시 모르니 서너 번 정도 더 셰이든하고 싸워보고, 그 다음에 섀도우 플레인에 가야지.”
“응, 나도 함께 가고 싶긴 한데…….”
“넌 오면 안 돼. 섀도우 플레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반 경도 안 돼.”
“그렇구나.”
미리아는 이반 경도 안 된다는 말에 미련을 버렸는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참, 양아버지가 백마법을 이용한 정신보호를 육체에 걸면 영혼에도 영향이 미치는 지 실험해 보고 싶다고 했어.”
“그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쩌니저쩌니 해도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받으니까. 이반 경이 돌아오면 그것도 실험해 보자.”
실험, 실험. 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는 데에만 해도 주의할 게 겁나게 많은데, 영혼만 갈 수 있는 섀도우 플레인에서 탐색작업을 하겠다는 우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봐야 한다.
만약 정신보호가 영혼에 영향을 미치면 섀도우 플레인에 조금 더 오래 있어도 될 것이다.
나는 한참동안 미리아와 미스틱 섀도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영주관으로 돌아왔다.
섀도우 플레인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능한 한 현실의 일은 모두 정리하기로 결심했기에 오늘도 케이니 양을 불러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