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7화
*
집 안의 구조는 현실과 똑같다. 그러나 벽에 손을 넣으면 그대로 통과한다. 그냥 시각적인 환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외벽 쪽으로 나가면 반대편외벽으로 들어온다. 집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 아공간이다.
그래도 이곳은 실제 섀도우 플레인과는 다르게 거리감각도 살아있고, 공간감각이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그래봤자 실제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혼이 느끼는 거지만. 그걸 재현할 수 있는 것은 나 같은 9서클 마법사뿐이다.
나 스스로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땅을 걷는 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일 뿐, 실제로는 거의 떠 있는 느낌이다.
스스스스
걷는데 발자국 소리가 안 난다. 역시 난 떠서 이동하는 거다. 땅속으로 들어가면 천정으로 나오겠지?
영혼의 상태는 흥미롭다. 이 흥미로운 감정이 사라지면 지독한 고독감이 몰려오겠지만 그건 경험한 바 있으니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일단 물질계와의 통신상태부터 확인하자.
“뿌우야, 들리니?”
“들린당. 통신상태 양호하당.”
이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소리도 아니다. 의식의 연결로 인한 정령과의 교신이다.
그런데 이거 어째 물질계보다 훨씬 선명하게 들리는데?
“뿌우야, 네 목소리가 평소보다 잘 들리는데 혹시 크게 말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 없당. 나는 비슷하게 들리니까 너만 잘 들리는 거겠징.”
“그렇다면 이런 환경이 의식의 연결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네.”
“그런가 보당.”
좋은 걸 알았다. 허상의 공간이 물질계보다 정령과의 소통을 하는데 더 유리하구나.
소통이 더 잘된다면 더욱 강력한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정령과의 관계는 의지력의 문제가 크게 작용하니 다시 말하면 내 정령력이 이곳에서는 훨씬 강화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발생되지 않으니 그걸 감안해야 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천천히 연구 좀 해 보고 지금은 이곳의 상태점검에 집중하자.
복도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땅을 걷고 싶다는 고정관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의 기본 세팅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내가 날고자하면 못 날것도 없다.
휘익
의식을 집중하여 위로 향하게 하니 정말로 몸이 떴다. 그리고 그대로 천정을 뚫고 나가 바닥으로 다시 튀어나왔다.
착
바닥에 다시 착지를 했다. 자유롭게 해방시켰던 공간감각을 다시 물질계의 고정관념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걸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가 고위마법사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빠르게 변환이 되어야 한다. 섀이드와 싸움이 일어나면 이런 움직임이 중요하다. 영혼이 섀이드에게 붙잡히면 침식을 당해 감염되어 버리니까 말이야.
나는 한참동안 이동연습을 했다. 허공에 떠서 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방향전환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정령계에 갈 때에 연습한 바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해보니까 감회가 새롭다고 할까?
“뿌우야, 내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니?”
“아닝, 네가 움직이는지 춤을 추는지 전혀 모르겠당.”
“내 몸상태는?”
“네 육체는 지금 동결되어 있당.”
아참, 얘가 상태를 느끼는 건 내 육체지. 난 지금 영혼상태고.
“지금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 1분 지난 거 맞지?”
“맞당.”
시간의 흐름에 이상은 없군. 일단 1분이 지났으니 나가자.
슉
내가 이곳을 벗어나려 생각하자마자 이미 내 영혼은 물질계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전신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깨어났다.
“으으으, 유체이탈 후에 제일 싫은 게 바로 이거야.”
영혼이 육체로 돌아오면서 육체의 감각이 극대화된다. 그것은 곧 고통이고 신경을 따라 강렬한 뇌전이 흐르는 듯 한 느낌이다.
“괜찮아?”
미리아가 걱정스러운 듯 한 표정으로 물었다.
“꿈속에 들어가는 거랑은 또 달라. 유체이탈은 웬만하면 안 하는 게 좋긴 해.”
나는 유체이탈 메뉴얼대로 복귀 후 상태점검을 하나하나 해서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리포즈 역시 내 등에 손을 대고 육체의 회복과 상태관리를 도왔다.
“괜찮다면 저도 한 번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이반 경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허상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갔나보다.
“이반 경도 정령과 교신을 할 수 있으니 한번 들어가 보세요. 단, 메뉴얼대로 1분 이상은 넘기지 말고, 영혼이탈 직후와 육체복귀 후에 꼭 상태점검을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쉬시는 동안 제가 들어가 보죠.”
“이반 경은 아직 유체이탈 해본 적이 없죠?”
“예.”
“그럼 더욱 조심해야겠네요. 알았어요. 제가 봐 줄 테니 지금 해요.”
첫 경험이 중요하다. 8서클 마도사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냥 물질계에서 유체이탈을 하는 게 아니라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는 허상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니 안심할 수는 없다.
나는 이반 경이 유체이탈을 위한 침대 속에 눕자 뚜껑을 닫고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정확하게 1분을 기다렸다.
“안 오네.”
역시 이 인간이 처음이라 흥분해서 시간관리를 못 하네. 나는 마법진을 조종해서 이반 경을 물질계로 강제소환시켰다.
“으으윽.”
아프겠지.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강제소환당하면 고통도 몇 배니까.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이반 경을 보며 혀를 쯔쯔 하고 찼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해요. 앞으로 한 달간은 들어가지 마세요.”
“그렇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반 경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며 나에게 사과를 했다. 만약 내가 강제로 꺼내지 않았다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수백 년간 그 안에 머물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데 그러면 영혼이 변질될까? 섀도우 플레인에서는 섀이드가 되는데, 허상공간인 미스틱 섀도우에서 영혼이 변질되면 어떻게 되지?
나는 이상한 쪽으로 내 호기심이 옮겨가려는 것을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며 얼른 털어버렸다.
금단의 연구로 들어갈 수 있는 호기심은 가지지 않는 게 좋다.
내가 정말 호기심을 못 참고 멀쩡한 인간의 영혼 하나를 미스틱 섀도우에 쳐 넣어놓고 관찰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난 매드 매이지가 되는 거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실험을 해보고 싶기는 하다. 젠장, 이러니 고위 마도사가 미치면 답도 없다는 말을 듣는 거지.
나는 화제를 돌려서 이반 경에게 물었다.
“이동연습은 해 봤어요?”
“그게, 쉽지 않더군요. 마법으로 새로 변해서 나는 것과는 다르네요.”
“당연히 다르죠. 움직임이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그것에 전념하세요. 공간감각자체가 입체적으로 바뀌어야 하니까요.”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 게 자신의 감각이 입체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평면적인 시각제한에 얽매여 있다.
마찬가지로 땅을 걷는 데 익숙하면 평면위에서의 움직임에 몸이 적응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 벗어나는 게 정말로 쉽지 않은 것이다.
“공간이 얽혀있는 경우에는 입체적인 감각이 필요해요. 안 그러면 극심한 길치가 될 수밖에 없으니 물질계를 벗어날 생각은 버려야 해요.”
“노력하겠습니다.”
“좋아요.”
“렌, 혹시 나도 들어갈 수 있어?”
미리아가 끼어들었다. 구경하고 있자니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가보다.
“들어갈 수는 있는데, 넌 안 돼.”
“왜?”
“네가 들어가면 숲의 힘에 대한 조율은 누가 하는데?”
“아차, 그렇구나. 헤헤헤.”
사실 이반 경보다 미리아가 유체이탈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꿈 침입을 할 수 있고 그건 사실 상 유체이탈이나 다름없는 상태니까.
“그럼 나중에 나 대신 숲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 해 볼게.”
“누구 부르려고?”
“정기적으로 엘프가 한 명 올 거야. 숲의 힘을 쓰는 걸 허가받을 때 정기점검하겠다고 했거든.”
“그거 장로가 이 실험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네.”
“아마 그렇겠지?”
“쩝,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사실 장로는 내가 드루이드 링을 조작했을 때부터 나한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질투의 감정은 없는 듯 했지만 인간에게 엘프의 지식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한 일이 있으니 뭐라고 하지는 못했고, 대신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지식을 훔쳐 배우려는 느낌이다.
알아서 하라지. 배울 수 있으면 가르쳐 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내가 그림자 차원에 들어가려는 이유만 비밀로 하면 된다.
“그럼 미리아 너는 지금부터 이반 경에게 유체이탈 상태에 대한 것들을 배워. 실전 들어가기 전에 이론을 완전히 숙지해야 하는 거 알지?”
“응. 다 암기할게.”
하긴 미리아는 내가 옛날에 마법을 가르칠 때부터 성실한 학생이었지. 그때는 집에 갇혀 살 때라 숙제 내주면 할 게 그것밖에 없긴 했지만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그럼 이제 내가 다시 들어가 볼 테니까 상태를 봐줘. 당분간은 하루 1분씩 다섯 번 들어갈 테니까.”
나는 마리포즈에게 말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며칠 동안은 이렇게 적응훈련을 하고, 완전히 익숙해지면 진입시간도 늘이면서 셰이든도 같이 들어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지금 셰이든과 같이 들어갔다가 그놈이 배신을 하면 싸워서 이기리란 보장이 없으니 훈련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제는 숙련화 과정만 남았다.
그리고 남은 문제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대신 무엇으로 나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섀도우 플레인 안에 있는 다른 세계로의 관문을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다.
그건 일단 가 봐서 연구를 해야 하니 아직은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갈 길이 멀구나.
인간이 신을 한 번 만나려면 이렇게 어려운 건가.
하긴 신이 찾아와주지 않으면 어려운 게 당연하지. 그나마 이런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마족의 후계자와 계속 연관되는 저주를 받아서 이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하면서 시간을 내 편으로 삼으면 언젠가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거다. 그렇게 믿어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