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6화
*
섀도우 플레인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 아니다. 그림자가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사물의 그림자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계처럼 정확한 좌표와 고정된 모습으로 있지는 않다.
그림자가 있으려면 빛이 있어야 하는데, 빛도 없다. 그냥 영혼의 감각적인 느낌으로 숲도 건물도 그림자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섀도우 플레인의 환경에 대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빛은 없는데 그림자만 있는 세계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다. 소리는 파장이고, 파장은 에너지이니 그곳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간 영혼끼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말하자면 영혼의 파장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섀도우 플레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볼 때 영혼은 에너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영혼의 파장은 무엇인가?
의지의 힘, 이것은 에너지가 아닌 더 고차원적인 것이다.
마법의 최종단계는 바로 언령이다. 말을 하는 모든 것이 힘이 되는 단계인데, 고위 마법은 거의 대부분 마법사 본인의 언령이 어느 정도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작 언령은 마법이 아니다. 그것은 힘이지만 단순한 에너지의 작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적, 물질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무엇인가가 바로 언령이다.
나는 언령에 대해 설명을 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근본적인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9서클에 오를 수 있었다.
내가 속한 물질계의 법칙을 초월한 공간생성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해하겠어요?”
나는 이런 설명을 이반 경에게 해 주었다. 미스틱 섀도우의 건설을 위한 마법진을 구축하고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는 이반 경의 도움도 필요하다.
“어렵군요.”
“물질을 소멸시키는 것은 쉬워요. 하지만 영혼을 소멸시키는 법은 아직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9서클의 단계에 들어서면 영혼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됩니다.”
정령을 추방이 아니라 소멸시킬 수 있는 게 바로 9서클의 경지다.
“그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이해되면 제가 9서클이 되는 거겠군요.”
“그런 거지요. 어쨌든 일단 에너지가 없이 영혼만 들어갈 수 있는 아공간의 창조와 관리를 하다보면 뭔가 얻는 게 있기는 있을 거예요. 단, 공간에 대한 깨달음은 제가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이반 경은 꼭 이걸 배울 필요는 없어요. 아시죠?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
“명심하겠습니다.”
물질계의 법칙은 정령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섀도우 플레인에서도 전혀 다른 법칙이 있다. 진리는 환경에 따라 변한다.
이반 경은 내 강의를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려온 미스틱 섀도우의 구축 마법진의 도면을 한장 한장 세심하게 공부했다.
이것은 미리아의 집 지하실에 입체적으로 설치할 마법진이기 때문에 무척 복잡하다. 벽과 천정, 바닥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하실 내부에 특수한 용액을 채워 넣은 후 작은 구형의 금속판에 마법진을 새겨 넣은 것들을 삼십 개 정도 띄운 채로 놔둘 거다.
그러면 지하실 공간 내부에서 구형의 마법진들이 둥둥 뜬 채 서서히 회전을 할 거다.
그러니까 미리아의 지하실공간이 작은 소우주 모형이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복잡한 마법진은 마나뱅크의 구축 마법진 뿐이라고 보면 된다.
마나뱅크의 경우는 구축 마법진 자체를 아공간 속에 만들어 버려서 물질계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세계나 다름없는 공간이라 수정도 할 수 없다.
“지하실로 숲의 힘을 끌어오는 부분은 미리아가 담당할 테니까 이반 경은 내부에 띄울 소마법진 구체들을 제작해 줘요. 전 허상공간과 물질계의 연동에 대한 보강작업을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자, 이것으로 역할 담당은 끝났다.
남은 문제는 그곳에 들어갈 나의 유체이탈 실험이지. 그거야 뭐, 옛날에도 몇 번 해봤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내가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외부에서 이반 경이나 미리아가 바로 알고 강제로 나의 영혼을 물질계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 장치다.
그러니까 수면 아래로 잠수를 하는 사람의 허리에 안전끈을 달아놓는 것과 같은 이친데, 이걸 영혼 수준에서 하려면 장난이 아니다.
이론은 안다. 그러나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대상이 되는 영혼에 어떤 부담이 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영혼이 길게 늘어나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하.”
나는 이반 경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반쯤 진담인 게, 영혼의 형태가 바뀌어 버리면 육체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런데 렌, 미스틱 섀도우에는 렌 혼자만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거야? 다른 존재는 전혀 없고?”
“그걸 위해 만드는 거니까. 섀도우 플레인에는 섀이드들이 있다가 다른 영혼을 공격한다고. 차분하게 적응을 하거나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되니까 일단 안전한 유사공간에서 할 거 다 해보고 다음에 넘어가겠다는 거지.”
“아항, 그런데 정말 외롭겠다.”
“네 생각보다 훨씬 외로울 수 있어.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시간의 흐름도 제대로 못 느끼니까 한번 고독을 느끼면 그게 계속 커지거든.”
“그럼 역시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되는 거네.”
“응, 미리아 너는 아직 안 돼. 이반 경은 가끔 들어와도 되는데, 자동 타이머를 달고 와야 해. 시간이 되면 무조건 물질계로 돌아갈 수 있게 말이야.”
“그런데 혼자면 전투 훈련은 못 하겠네? 실제 그림자 차원에서는 섀이드들이 공격을 한다면서.”
“전투훈련도 할 거야. 우리에게는 섀이드가 하나 있잖아.”
“엣, 그 섀이드 마법사를 미스틱 섀도우에 넣을 거야?”
“응, 내가 완전히 그쪽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자와 안에서 전투훈련을 하려고. 일 대 일이라면 안 질 자신이 있으니까.”
마법을 안 쓰는 영혼끼리의 싸움에 적응하는 데에는 셰이든의 도움이 필요하다. 결국 미스틱 섀도우는 셰이든을 가두는 감옥이 될 것이고, 셰이든은 반 강제적으로 미스틱 섀도우의 관리인으로 취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셰이든도 이 부분에 대해 동의를 했다. 그자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데, 바로 마법적 탐구심이 무척 왕성하다는 것이다.
유사 새도우 플레인에 대한 설명을 하니까 금새 눈을 빛내며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래도 다스 폐론이 소멸한 뒤, 마족의 영향에서 조금 벗어난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지독하게 마법사를 증오하고 모두 죽이기로 맹세한 것도 마족의 영향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소리고, 지금은 맹세의 의지도 많이 흐려진 상태다.
그 상황에서 아공간의 관리인이 되라고 제안하니 나름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미스틱 섀도우 내에는 마법사가 없다. 그러니까 세계에 존재하는 마법사를 모두 죽이겠다는 맹세를 지키게 되는 셈이다. 약간은 억지지만 마법이 원래 좀 억지를 부려서 진실을 왜곡하는 학문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프리트 보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모든 계획을 세운 나는 착실하게 마법진을 구축해 나갔다.
표면적으로는 미스틱 게이트의 발전에 따른 추가 도시 개발 계획의 설립을 위해 바쁘다고는 했지만 그건 케이니 양과 실비아 공주에게 일임했다.
참, 그리고 실비아 공주와의 결혼식 일정도 잡았다.
애초의 계획보다 훨씬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 같은 느낌인데, 준비하는 것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나보다 오히려 파우스 스승님과 가문의 집사가 착착 진행을 해 주니 나는 의상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 이외에는 거의 할게 없었다.
오히려 실비아 공주가 도시 개발 계획을 짜고 실행하면서 신부가 될 준비를 하느라 일분일초를 아끼는 생활을 했다.
드디어 내가 결혼을 하는구나. 조금 더 청춘을 즐기고 싶었지만 일단 결혼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전생에는 150년 동안 솔로였다고.
*
계획은 착착 진행이 되었다. 그 사이 약간 수정된 부분은 뿌우가 나와 정령의 계약을 이용해 통신을 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뿌우는 정령이라 미스틱 섀도우에는 아예 들어오지를 못한다. 정령이 유체이탈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차원이 달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바로 정령인지라 이 부분을 활용하기로 했다.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지하실의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입구를 봉인했다.
마법진의 존재 자체도 비밀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지하부터 모든 방위에 마법진을 지키는 방어결계를 쳤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마법진을 활성화 시키니 콘트롤 수정구에 내 집의 형상이 나타났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노이즈가 좀 있네. 과부하가 걸리나?”
“아직 초기라 그래. 잠시 기다리면 완전히 활성화 될 거야.”
나는 불안해하는 미리아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미리아는 혹시 잘못 되서 마법진이 폭발할까봐 걱정하는 듯 했다. 마법진이 폭발하면 자신의 집도 날아가 버리는 셈이니 걱정이 안 될 수는 없겠지.
잠시 후, 내 말대로 소리가 멈추고 수정구에 비친 내 집의 형상도 더 뚜렷해졌다.
“그럼 이제 난 유체이탈을 해서 미스틱 섀도우 안으로 들어가 볼 테니, 그 사이 내 육체를 잘 보관해 줘.”
“보관이고 뭐고 1분만 들어갈 거 아냐?”
“그 1분이 위험하잖아. 하하하하.”
유체이탈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진짜 미리아 쯤 되니까 내 육체를 맡기는 거다. 물론 마리포즈도 내 옆에 있겠지만 이곳은 미리아의 집이니 그녀를 믿고 맡기는 게 옳다.
“그럼 시작한다.”
나는 2층에 있는 침대로 가서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누웠다. 침대라기보다는 관처럼 뚜껑까지 있는 형태였는데, 유체이탈과 육체보존을 위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마법진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리포즈다.
“그럼, 잠시 후에 봐.”
내가 작별 인사를 하니 마리포즈가 침대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곧 나는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