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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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로 돌아온 나는 뿌우를 불렀다.
“가서 이프리트 보틀 하나만 구해와라.”
“나한테 그런 거 맡긴 적 있냥?”
“포트라한테 말하면 줄 거야.”
“왜 자꾸 나를 험한 장소로 보내려고 하는 거냥.”
“아니면 나를 포트라에게 데려다 주거나.”
“미치겠넹.”
뿌우는 투덜투덜 대면서 정령계로 갔다.
얘가 고생이 심하긴 심하네. 그래도 처음 계약했을 때보다 훨씬 정령력이 강해진 건 확실하지. 대정령과 접촉을 하면 소정령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심부름도 시키고 정령력도 강화시키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는데, 단지 그러는 과정에서 약간의 고통이 생성될 뿐이다.
결국 주기적으로 포트라를 만나야 하는 게 뿌우의 운명인 셈이다.
잠시 후, 뿌우가 평소보다 두 배쯤 부푼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거의 솜사탕 수준이었는데 피부가 퍼렇게 변해 있었다.
“많이 맞았냐?”
“죽을 뻔 했당. 사장님이 여기에 사인하라더랑.”
뿌우가 내민 서류는 보물 포기 각서라는 것으로 내가 전생에 포트라에게 맡겨 놓았던 내 보물들 중 30%를 포트라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왜 이걸 포기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편의를 봐 준 걸 계산한 거란당. 여기 사인하기 전에는 이프리트 보틀을 넘기지 말라고 했당.”
“30%는 너무 심한데, 20%면 사인하지.”
“그럴 거라고 20%짜리 서류도 주셨당. 사인해라.”
“으, 역시 포트라군. 계산 하나는 정확하게 하는구나.”
사실 그동안 포트라 신세를 많이 지긴 졌다. 정령은 절대 자선사업을 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이런 서류가 날아올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사인을 하려니까 좀 슬프긴 하다.
그래도 중요한 것들은 이미 넘겨받았고, 포트라가 맡아가지고 있는 것들은 현실적으로 내가 거의 쓸 일이 없는 이상한 마법무구들이 대부분이다.
포트라는 그것들을 분해해서 마력을 뽑은 다음 새롭게 아공간 주머니를 만들겠지.
“쩝, 내가 빨리 9서클이 되어야 아공간 주머니에 마법진 그려 넣는 일을 할 텐데, 그래야 포트라하고 이익을 나누어 먹지.”
“사장님도 그 이야기 하시더랑. 놀지 말고 죽도록 수련해서 옛날 수준으로 돌아오라공. 그래야 재계약을 할 수 있다공.”
“노는 거 아니거든. 수련한다고 서클이 막 올라가는 단계는 지났다고.”
8서클, 9서클이 장난인줄 아나. 인간이 그거 뚫으려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데 말이야. 쩝.
그래도 엘프의 드루이드 링과 숲의 힘을 이용해 7서클을 뚫었기에 예상보다 몇 년은 빠른 셈이다. 그 정도 힘을 다시 한 번 동원할 수 있다면 8서클도 가능하긴 할 텐데, 이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까?
아니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셰이든 문제부터 처리하자.
나는 뿌우가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하고 이프리트 보틀을 받았다.
이프리트 보틀이란 작은 유리병으로 정령을 가둘 수 있는 아티팩트인데, 여기 갇힌 정령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정령 중에 가장 성질이 급한 이프리트들이 여기 갇히면 거의 미치게 되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해방시키면 고마움의 표시로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미쳐서 해방시킨 자를 공격해 불태워 죽여 버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취급에 주의가 필요하다.
포트라가 준 이프리트 보틀은 정령이 들어있지 않은 빈 병이다.
나는 그것을 들고 마리포즈에게로 갔다.
마리포즈의 몸에는 셰이든이 갇혀 있었는데, 그곳은 일종의 집 같은 느낌으로 상당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프리트 보틀은 다르다.
나는 바로 이프리트 보틀의 입구를 마리포즈의 입속에 넣고 장치를 가동시켰다.
“흡수.”
파싯
검은 빛이 마리포즈의 가슴안쪽 부분으로부터 올라와 입을 통해 이프리트 보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보틀의 뚜껑을 닫았다. 이것으로 셰이든은 이프리트 보틀 안에 갇힌 것이다.
잠시 후, 마리포즈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육체 상태 정상, 셰이든 경의 설득은 실패했어요.”
“그도 고집이 있는데 쉽게 입을 열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조금 달라질걸.”
나는 이프리트 보틀을 살살 흔들며 말했다.
“정령도 힘들어하는 이곳에 인간의 정신력으로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 후훗.”
사람을 이프리트 보틀 속에 넣는 것은 아마 나만 할 수 있는 발상일 것이다.
왜냐고? 난 들어가 봤거든.
8서클 시절, 정령의 고통을 알아야 될 거 같아서 이프리트 보틀을 구해서 직접 유체이탈을 한 후 들어가 봤다. 그리고 난 두 번 다시 이곳에 안 들어가기로 했지.
어쨌든 그 경험 덕분에 난 정령을 역소환 시키는 게 아니라 거의 소멸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마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으니 고통의 대가는 충분히 받은 셈이다.
셰이든은 지금 육체를 버리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었지만 정신력은 여전히 인간의 범주에 있다. 말하자면 유체이탈 한 영혼상태나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자, 그럼 안에 집어넣은 지 5분이 지났으니 슬슬 대화를 해 볼까?
나는 테이블 위에 봉인의 마법진을 그리고 그 위에 이프리트 보틀을 올려놓았다.
뽕
뚜껑을 따니 검은 그림자가 쑤욱 하고 튀어나왔다.
“크윽, 콜록콜록, 이런 지독한!”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프리트 보틀 안과 같겠지. 동의하지 않나요?”
“으으, 네놈을 저주하겠다.”
“이런 저주 흡수기를 저번에 뽀개 먹어서 그대의 저주를 빨아들일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그것도 가장 강렬한 힘 중 하나라 쓸 데가 많은데.”
“크으으, 내가 어쩌다가 항복을 해서.”
“항복 아니면 소멸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요. 지금 와서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하지 말라고. 그럼 좀 쉬었으니 다시 들어가시죠. 한 달 뒤에 봅시다.”
“잠깐! 말하겠다.”
“오호, 상황판단이 빠르네요.”
역시 이프리트 보틀이 좋긴 좋구나. 5분을 못 버티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신과 접촉할 방법이 있다고 했죠? 그걸 어디서 알아낸 거죠?”
“난 레베카와 다스 페론이 마족과 계약을 하게 도왔고, 그 대가로 육체를 섀이드로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영원히 다스 페론을 돕기로 맹약을 맺기도 했지.”
“그래서요?”
“섀이드가 되니 물질계의 굴레를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더군. 그림자의 세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는 들어갔다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림자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아하, 공허의 공간에 들어갔군요.”
“공허의 공간을 어떻게 알지?”
“질문하지 마세요. 그냥 알아요.”
9서클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든. 물질계에 접촉한 세계는 둘이 있다. 아마 그것은 다른 모든 이계에도 같은 구조일 것인데, 하나는 정령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자들의 세계인 공허의 공간이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곳. 질량이 없고 소리도 없는 공허와 침묵의 세계가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나는 거길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셰이든의 말처럼 그곳은 그림자가 되지 않으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영혼이나 정령도 못 가는 곳이고,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춰있어서 잠깐 들어갔다 나왔는데 몇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내 육체는 썩어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호기심에 괜히 들어가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높다고 할까? 그리고 들어가서 얻는 것도 없다.
반대로 정령계는 모험을 할 만 한 게 직접 들어가서 정령의 시험을 버티고 나의 자아를 확립하면 대정령과 접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포트라를 만났고, 결국 물질계에 포트라를 소환해서 계약을 하는데 성공했다.
“흐음, 그럼 공허의 공간에 신이 존재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지. 하지만 다른 곳과 연결된 통로이기도 하다.”
“이계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요?”
“그렇다. 하지만 통로는 모두 막혀있어서 그림자는 절대 통로를 뚫을 수 없지. 단지 몇몇 통로는 그 너머를 볼 수는 있다.”
“그곳에서 신을 봤나요?”
“신은 못 보았지만 신의 발자국은 봤다.”
신의 발자국이라, 그건 뭘까? 상상도 안 간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요.”
“설명을 할 수 있는 성질이 못 된다. 그냥 보는 순간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오히려 말이 되네. 신이 무슨 전설 속에 나오는 타이탄도 아니고, 발자국이 있을 리가 없다. 이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뜻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접촉을 하려고 했죠?”
“그건 아직 모르겠다. 그곳에서는 마법도 쓰지 못한다. 막혀있는 통로를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만약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신과 접촉을 할 수 있다. 이건 내가 확실하게 느꼈다.”
당연히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지. 그걸 뚫을 수 있다면 이계진입이 가능하다는 얘긴데, 무슨 고위마족도 아니고 7서클 마법사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난 가능할까?
9서클 시절이었다면?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림자의 세계에 대한 연구는 확실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공간 마법에 대해서는 초월자적 지식을 가진 나라고 해도 그림자들을 다루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연구해보죠. 셰이든 경은 당분간 그렇게 계세요.”
“뭐라고? 날 이 병에서 꺼내라. 말을 해 주지 않았느냐.”
“뚜껑을 열어놓으면 괜찮잖아요.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으니 그렇게 있다가 내가 그림자 세계에 대해 연구하는 걸 좀 도와요.”
절대 풀어줄 수는 없다. 이자는 모든 마법사를 죽이기로 맹세한 자니까.
그런데 항복을 하고 정보까지 제공한 이상 또 소멸시킬 수도 없다.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다른 방법을 간구해야지.
나는 일단 셰이든 경을 그대로 놔두고 마리포즈와 함께 작업실로 왔다.
“공허의 공간이라, 결국 내가 거길 가야 하나?”
“위험하지 않을까요?”
“시간의 흐름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 같아. 사실 환경은 마나뱅크속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거든.”
“그래도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섣불리 확신하면 안 돼요.”
“그래, 충분히 사전 실험을 해 보아야겠지. 우선 내가 그림자가 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겠고.”
섀이드가 된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섀이드 상태에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게 조금 애매하다.
육체야 썩지 않도록 보관을 하면 되는데, 영혼이 섀이드 상태가 된 상태에서 과연 다시 정화시켰을 때 돌아올지 아니면 소멸될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런 부분을 잘 아는 것은 역시 포트란데 말이야. 어쩔 수 없군. 뿌우야.”
“왜 또 나냥!”
“미안, 하루에 두 번 보내는 건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데 말이야. 상황이 그렇게 됐다.”
“아 놩, 알겠당. 가서 물어보고 온당. 뿌잉.”
뿌우는 울면서 정령계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