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3화
“백야!”
촤아아아아
지하실 안이 엄청나게 환해졌다. 공간에 빛이 넘쳐나서 눈을 뜨기도 힘든 정도다.
그리고 놀랍게도 빛이 물리력을 행사하는 듯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게 되었다. 마치 끈끈이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데에도 사력을 다해야 했다.
인간인 나도 그런데 섀이드는 어떨까?
섀이드 마법사인 셰이든은 전신이 불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이것이야말로 실시간 화형식이라고 할까? 비명은 지르는데 몸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이반 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마법만 해도 셰이든을 소멸시킬 수 있을 만 했지만 상대가 단순한 새이드가 아니라 7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감안해서인지 빨리 끝을 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비브라토 네트.”
우우우웅
소리의 그물이 셰이든을 덥었다. 음파의 집중형 공격마법은 정말 드문데, 그만큼 효과가 탁월하고 방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다른 소리를 모두 지워버리기 때문에 비브라토 네트에 걸린 상대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
셰이든의 비명소리 역시 소리의 울림 속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선수를 쳐서 두 가지 지속형 마법을 걸자 이반 경은 일단 손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셰이든이 어떤 발악을 하면 그에 맞춰서 대응을 하려는 것이다.
셰이든은 다스 페론이 소멸되자 놀라서 그만큼 대응이 늦었다. 그 바람에 이반 경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었고, 자신보다 높은 서클의 마도사였기에 반격을 시도하지도 못했다.
이걸로 끝인가?
셰이든의 모습이 점점 흐려져 간다. 소멸되어가는 현상이다.
지금은 몸의 마력을 집중시켜 어떻게든 그림자인 자신의 몸체를 유지하려 하고 있지만 길지는 못할 것이다.
이반 경이 마지막으로 나한테 물었다.
“소멸시킬까요? 아니면 잡아서 정보를 캐낼까요.”
“소멸시키죠. 저자는 위험해요. 괜히 정보 때문에 놔두었다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마나파동포를 제대로 봐 버렸기 때문에 분석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주문도 없이 시동어로 지팡이 끝에서 절대적인 파괴력의 힘이 튀어나가는 게 어떤 이유인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이반 경이야 내가 9서클 대마법사라 생각하고 있고, 내 제자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셰이든이 만약 도망이라도 치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질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끝을 내겠습니다.”
이반 경은 바로 분쇄 주문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거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소멸하는 거지.
그런데 그때 셰이든이 다급한 표정을 말을 했다.
“잠깐, 나에게는 마족에 대한 정보가 있다.”
“우리도 있어요. 넌 그냥 소멸하세요.”
“마족이 어째서 물질계에 자꾸 접촉하는지에 대해서 아는가?”
“알아요. 그러니 그냥 소멸하세요.”
“물질계는 지금 신이 없다. 주인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지.”
“이반 경, 주문 멈추지 말고 그냥 날려버려요.”
“하지만 뭔가 말하는 도중에 소멸시키는 것도 좀 그래서 말입니다.”
“저자는 하루 종일이라도 떠들 수 있어요. 그거 언제 다 듣겠어요.”
“알겠습니다.”
“잠깐! 난 신에게 접촉할 방법도 안다.”
“이반 경, 잠깐만요.”
셰이든이 한 말은 흘려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에게 접촉을 하는 방법이라니. 나도 모르는 방법을 어떻게 셰이든이 알까?
셰이든은 계속해서 말했다.
“신이 없으면 마족은 계속해서 물질계에 간섭을 할 것이다. 내가 마법사를 모두 죽이려 하면 마법사 중에서 마족과 계약하는 자가 나올 수도 있지. 난 그래서 마족이 더 이상 물질계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오호, 의도는 달라도 그쪽 목표는 우리와 같네요. 셰이든 경.”
역시 마법사는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바로 끝장을 봐야 하는데, 대화를 하다보면 꼭 못 죽이는 이유가 생긴단 말이야.
“그럼 우리 천천히 대화를 해 보도록 하죠.”
“그걸 말하면 나를 놔 줄 건가? 마도에 걸고 약속한다면 말하겠다.”
“미쳤다고 그런 약속을 할까요? 그냥 알아서 알아낼게요.”
“크크크, 난 섀이드다. 내 두뇌를 검색하려 해도 소용이 없지.”
“그런 것까지 걱정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훗.”
넌 말을 잘못한 거야. 그냥 소멸하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게 해 주지.
나는 일단 셰이든의 주변에 결계마법진을 그려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셰이든은 그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항복을 한 상황이니 가두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마법진이 완성된 이후에는 이반 경이 백야와 비브라토 네트를 풀었다. 겨우 고통에서 벗어난 셰이든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 어차피 난 다스 페론이 소멸했으니 너희들에게 큰 위해는 가할 수 없으니 빨리 타협을 하자.”
“미안, 큰 위해가 될 거 같아서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나는 깔끔하게 셰이든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리포즈에게 말했다.
“마리야.”
“예.”
“당분간만 저자를 네 몸속에 봉인하자. 돌아가면 바로 옮겨줄게.”
“그렇게 하세요.”
실체가 없는 그림자는 말하자면 정령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어둠의 정령이라고 할까?
그런 존재는 마리포즈의 육체 속에 가두어 버릴 수 있다. 단지 그럴 경우 마리포즈가 육체를 제어할 수 없고 마치 감옥의 간수장처럼 셰이든을 감시하여 나가지 못하게 지켜야 한다.
마리포즈는 곧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육체의 제어를 그만두고 두뇌부분만 지키는 형태가 되었다.
나는 그런 마리포즈의 외부갑옷을 벗기고 몸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봉인의 마법진이다. 이거라면 뿌우도 갇힌다. 자신의 의지로는 못 나가는 것이다.
곧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정령을 작은 물체에 가두는 마법진은 굉장히 고위의 마법진이기 때문에 이반 경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셰이드 경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한 절반쯤을 알아 봤을까? 난 일부러 그들이 알아보기 쉽게 마법진을 그렸다. 중요한 부분만 살짝 꼬아서 헷갈리게 했을 뿐이다.
“다 됐네. 셰이든 경. 잠시 이 안에서 쉬세요. 나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드릴 테니.”
“나를 가두어도 소용없다.”
“말이 많네요.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할게요.”
파지지지직
셰이든 경 주변의 마법진과 마리포즈의 몸에 그려진 마법진이 연동되니 스파크가 일어나며 셰이든 경이 마리포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단한 기술이군요. 이런 봉인식은 처음 봤습니다.”
“고위 마족을 소환할 때 쓰는 결계의 응용이에요. 고위 마족은 거의 대부분 영혼상태로 소환되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이 정도는 필요해요.”
“고위 마족도 소환하실 수 있으십니까?”
“있기야 있죠. 근데 그것도 요즘은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워낙 마족들이 쉽게 계약을 해 주니까요.”
원래는 철저한 준비를 해서 소환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계약은커녕 그 자리에서 죽거나 영혼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요즘은 고위마족들이 이곳 물질계에서 게임을 하느라 쉽게 쉽게 계약을 해주니 이런 고급 마법진이 없어도 의지만 있으면 계약이 되는 게 문제다.
세이든의 말대로 이대로는 끝이 없다. 일단 앞으로는 다른 마족이 계약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최우선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신이라는 존재와 접촉해서 왜 이곳 물질계를 버렸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돌아가요. 이제 다스 페론과 뱀파이어의 사건은 끝난 셈이니 10대 마도가문에 정식으로 보고를 하도록 하죠.”
남은 뱀파이어들은 암살자들이 추적을 했을 테니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면 된다. 어차피 다스 페론이 소멸한 이상 그들에게 더 이상 대륙 전체를 흔들 힘은 없다.
우리는 마리포즈의 육체를 렉스에 실고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스 페론을 소멸시켰다는 것을 보고하고 어둠의 주민들이 더 이상 십대 마도가문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이어 경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를 환대했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축복하는 대사를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는 체프코트 가문의 귀빈들이 머무는 숙소를 통째로 얻어서 쓰게 되었는데, 체프코트 가문에서 상당히 후한 보수를 내 놓았기에 그것을 암살자들에게 분배해야 했다.
나는 재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암살자이 보는 눈앞에서 모두 그들에게 주었다. 따로 고용했던 하급마법사들이 올린 전공기록을 분석하여 제대로 싸운 자들에게는 모두 만족할만한 보수를 주었다. 그리고 싸우다가 희생된 자들에게는 약속보다 세배나 많은 수당을 지급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나중에 또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암살자들 중 한명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인간들이! 난 암살자 안 쓴다고.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해 주려다가 그냥 참고 말했다.
“아직 뱀파이어들의 잔당이 많이 남아 있으니 계속 추적과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발견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바로 연락을 주세요. 가까운 10대 가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헤헤헤.”
이자도 영업을 뛰는 얼굴마담이로군. 난 고개를 돌려 케이니 양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케이니 양은 우리 영지에 오고 싶다고 했지요?”
“예, 렌 경께서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는 그곳에서 살고 싶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뱀파이어를 발견한 자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일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단, 우리 영지 내에 다른 암살자는 들어오면 안 됩니다.”
“렌 경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감히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거예요.”
“좋아요. 그럼 집을 한 채 마련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왜 케이니 양이 우리 영지에서 산다고 하는 걸까?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들었다. 내 호흡이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그게 뭔 소리인지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10대 마도가문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스코트 가문은 힘의 태반을 잃어서 더 이상 10대 마도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후 우리가 한참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마이어 경이 이반 경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 다른 마도가문들과 상의를 한 결과, 데빌 헌터가 새로운 10대 마도가문에 들어오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반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데빌 헌터는 가문이 아닙니다만, 그냥 마족의 계약자들과 싸우려는 자들의 모임이지요.”
“그건 압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영지도 있고 콘돌스핀 마탑도 데빌 베인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습니까?”
“으음, 그럼 일단 영지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결정이 나시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정 뭐 하시면 스코트 가문이 통째로 데빌 베인에 가입을 하겠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것도 상의해 보지요.”
나쁘지 않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얼른 영지로 돌아가서 셰이든으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게 먼저다.
한 가지씩 해 나가자.
10대 마도가문으로 올라가는 것은 한 번 말이 나왔으니 언제든지 추진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며 영지를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