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138화 (138/250)

로엔의 마나뱅크 138화

5장 암흑의 주민

달이 없는 밤.

이날은 마법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기다.

마나가 고요하게 가라앉아서 마법을 시전해도 실패하는 확률이 생긴다. 어려운 마법일수록 실패 확률이 커지고 효과도 약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풀문에는 대기의 마나가 묘하게 끓어올라서 중요한 마법실험이나 마법진 구축의 완성식은 대부분 풀문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마법사는 그믐에 대해 마나가 잠자는 날이라는 표현을 쓰고 거의 하루 종일 방안에서 자거나 책을 읽는다. 아니면 마나수련을 뺀 순수한 명상을 하거나.

렉스 또한 그믐이 되자 축 늘어져서 코만 안 골았지 거의 졸고 있었다.

이거 정말 오늘 싸워도 되는 걸까?

뱀파이어들은 그믐에 3배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우리 측은 거의 전력이 절반으로 감소된 느낌이다.

솔직히 뱀파이어들이 안 왔으면 좋겠다. 그냥 이쪽을 포기하고 다른 데로 이동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싸울 준비 다 해놓고 웬 딴소리냐고?

나도 마법사거든. 기운이 없어.

대마법사 시절에도 그믐날에는 쉬었다고. 물론 그때는 마음만 먹으면 그믐이고 뭐고 쓰고 싶은 마법 다 쓸 수 있었지만 말이야.

올까? 안 올까?

전투가 약속된 상황은 아니다. 정면에서 오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도 온다면 오늘밖에 없다.

체프코트 가문이 만만한 곳도 아니고, 이 일대에 설치된 마법방어진만 해도 평소에는 뚫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위력이 있기 때문에 그믐 날 이외에는 견적이 안 나온다.

다스 페론도 만만한 자가 아니고, 뒤에서 서포트를 하는 미지의 마법사 또한 잔머리에 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언제 오는지는 정해진 셈이니 어떻게 오는지만 파악하고 대응하면 된다.

“옵니다!”

파수를 보는 원견의 마법사가 외쳤다.

과연 어둠속으로부터 붉은 눈을 한 뱀파이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외로 정공법이군요.”

이반 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드 경은 뒤쪽을 맡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정면에는 이반 경과 나, 마리포즈, 렉스, 서피가 있다. 물론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사들도 있고.

그리고 두꺼운 로브를 입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지만 케이니 양도 와서 같이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다른 암살자들은 거의 오지 않았는데 굳이 케이니 양만 온 이유는 그녀의 귀가 무척 민감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케이니 양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바닥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는 청력의 소유자였다.

나는 그걸 알고 케이니 양에게 따로 협조를 구한 후 그녀에게 정신 보호 마법과 청력 강화 마법을 걸었다.

이것으로 케이니 양은 초음파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심지어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분석을 할 수도 있다.

원견의 마법사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이해, 분석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면 케이니 양은 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에 대한 전문가인 셈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케이니 양에게 물었다.

“정면 말고 다른 곳에서는 들리는 소리가 없나요?”

“하늘이요. 박쥐들이 날아와요.”

아하, 얘들이 양동작전을 쓰는군.

뱀파이어들 중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자들은 박쥐 변신이 가능하다. 그걸 이용해 정면에서 바람을 잡고 위쪽에서 공격을 가할 생각인 듯 했다.

역시 시야는 정면만 볼 수 있지만 청각은 사방을 다 감지할 수 있어서 좋다.

“뿌우야, 박쥐들이 완전히 탑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바람의 장벽을 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체프코트 가문의 몫이다. 단지 우리는 그들의 퇴로를 끊는 역할이다.

그래도 빠져나간 자들의 추적은 암살자들이 담당한다.

셋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충실하게 이행하면 어떤 상황이 와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스톰 배리어 가동!”

파사사사사사사, 카카카카카캉

“어스 바인드 가동!”

“홀리 워터 분사!”

역시 체프코트 가문. 뱀파이어들이 접근해 오자 전투 매뉴얼에 따라 마법진을 하나씩 가동시키는데 그 위력이 무시무시하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마법진 역시 반응을 시작하니 뱀파이어들은 가까이 오기도 전에 대부분 재가 되어 사라졌다.

“흥, 저 정도 전력으로 우리 체프코트 가문을 넘보려 하다니.”

마이어 경이 코웃음을 쳤다.

“마이어 경, 진짜는 박쥐로 변해 공중으로 온답니다.”

“오, 그럼 저것들은 미끼였다는 소리군. 알았네.”

마이어 경은 즉시 원견의 마법사에게 하늘을 경계하라고 명했다. 과연 수천마리의 박쥐 떼들이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을 새까맣게 덥고 있는 게 발견되었다.

“파이어볼을 쏴랏!”

상대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박쥐다. 마이어 경이 크게 외치자 대기하고 있던 중저 서클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파이어볼을 허공에 대고 쐈다.

퍼퍼퍼퍼퍼펑

“불꽃놀이 같군요.”

이반 경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워메이지 출신답게 집단으로 범위 공격마법이 사용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피해는 충분히 입히겠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을 거예요. 뱀파이어들이 어디로 모이는지 빨리 확인했으면 좋겠군요.”

결국 적을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안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본체로 돌아왔을 때 손을 쓰는 게 제일 확실하다.

내가 박쥐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중얼거리자 케이니 양이 말했다.

“가장 위쪽에 거대한 박쥐가 있어요. 거기서 강렬한 초음파가 발산되는데, 동쪽으로 가라고 지시하는 것 같아요.”

“거대한 박쥐라고? 설마 다스 페론이 박쥐로 변해 직접 지휘를 하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단순한 박쥐가 아니라 사람의 형태가 느껴져요. 마족 같은 느낌?”

“역시 그렇군. 다스 페론, 이번에는 하늘로 왔군.”

동쪽이라, 확실히 지금 포진에서는 동쪽이 제일 약하다. 저 박쥐떼들의 본체인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동쪽을 공격하면 쉽게 대응을 못할 가능성이 크지.

나는 서둘러 동쪽으로 향하려다 퍼뜩 드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케이니 양, 그 거대한 박쥐 역시 동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나요?”

“아니요. 지시만 그렇게 내리고 본인은 허공에 머물러 있어요.”

그렇다면 다스 페론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움직이면 안 된다. 우리가 움직이면 하늘에서 저놈이 그걸 보고 대응할 것이니 먼저 이동을 하게 해야 한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마이어 경에게 탑의 동쪽이 집중 공격을 당할 거라는 것을 알려야 할까?

만약 알린다면 다스 페론은 우리가 박쥐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음파를 듣고 분석하는 케이니 양의 존재까지 알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그냥 놔두었다가는 동쪽을 지키는 자들의 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서피에게 말했다.

“서피야, 스텔스 모드로 탑의 동쪽으로 가라. 뱀파이어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30분간만 전력으로 싸우도록 해. 크기 봉인을 풀어 줄 테니 말이야.”

샤아아아

서피는 내 명령이 기쁜 듯 몸을 한 바퀴 비틀며 허공에서 원을 그렸다. 원래 서피는 힘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내 명령에 의해 크기를 일정수준 이상으로 키우지 않았었다.

하지만 처음 소환되었을 때에 서피는 길이가 거의 30미터나 되는 대형괴수였고, 그런 서피가 지금의 작은 뱀같은 크기에 만족할리가 없다.

“마리야, 렉스의 목띠로부터 서피한테 최대한 마나를 주입시켜. 적어도 10미터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뱀파이어들을 통째로 잡아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즈즈즈즈즈즈

마리포즈가 서피에게 마나를 주입하자 서피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며 커졌다. 힘과 크기가 동시에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라 30분 정도면 원래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아직 서피 자체의 마나는 거대한 몸을 유지할 만큼 많지 않은 것이다.

“이제 가라.”

샤사사사사

완전히 투명해진 서피는 풀 가르는 소리를 내며 땅에 붙어서 기어갔다. 역시 노련한 마수답게 거대해진 몸으로 괜히 하늘을 날아서 마나의 파동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땅을 기는 것이다.

“마리야, 전투가 시작되면 서피가 적들을 막는 사이 너와 렉스가 뛰어 가라. 그러면 딱 타이밍이 맞을 거야.”

“그렇게 할게요.”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을 보내고, 보낼 수 있는 전력은 대기를 시켰다.

이제 나는 다시 다스 페론의 움직임에 전 신경을 집중시켰다. 기감을 확장하니 나도 다스 페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감지한 적이니 쉽게 내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조용히 눈은 감고 명상에 잠긴 채 계속 집중했다.

그런데 케이니 양은 그런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놀라운 호흡소리네요.”

아, 사람이 집중하는데 말시키지 말라고요.

나는 속으로 투덜댔지만 살짝 눈을 뜨고 케이니 양에게 반문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 그러니까 이반 경과 마이어 경을 포함해서 렌 경의 호흡소리가 가장 아름다워요. 어쩌면 제 평생 들어온 사람의 호흡소리 중 가장 아름다운 것 같네요.”

“아름답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요?”

“안정되어 있다고 할까? 정확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저만이 느끼는 거예요.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듣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호흡이네요.”

“그런가요.”

별 거 아니잖아. 마음대로 듣고 황홀해 하라지. 나는 다시 집중을 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런데 케이니 양은 나를 가만 놔두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뱀파이어들과의 전투가 끝나면, 제가 렌 경의 영지로 가도 될까요?”

으,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짜증이 나려는 것을 참으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케이니 양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소린지 정말 이해를 못 하겠다. 나중에 전투가 끝나면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나는 우선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잠시 후, 드디어 다스 페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는 곳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었고, 동시에 동쪽에서는 본체로 변한 뱀파이어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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