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37화
“제가 이번 일에 대한 권한을 받고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협조한 사람들이 합당한 보수를 받는 것입니다. 즉, 지금 우리 마법사들은 암살자들에게 정식 의뢰를 하는 거지요.”
“정식 의뢰라, 그게 말로 한다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헨델은 회의적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반응에 오히려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나의 제안이 싫지는 않다는 뜻이다.
나는 다시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협조하느라 행적이 드러난 암살조직들이 다시 마법사들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뱀파이어와 그들에게 붙은 암살자들을 제거하면 합당한 대가의 재물을 주는 것이죠.”
“은밀성의 확보와 재물이라, 그래서 우리에게 이쪽에 따로 본거지를 만들게 해주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내어드리는 부분은 체프코트 가문에 따로 보고를 하지 않습니다. 체프코트 가문은 새로 자리 잡은 사람들을 당분간 추적하지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추적당하지 않겠소?”
“추적당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됩니다. 다른 가문의 영역으로 말입니다. 기존의 본거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다른 가문의 영역에서 뱀파이어와 싸우면 이번처럼 새로운 자리와 재물을 드릴 테니 그쪽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암살자들이 이탈하면 아무래도 체프코트 가문 측에는 손해가 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프코트 가문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굳이 그대들을 추적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오! 렌 경은 정말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분이군요.”
헨델은 웃었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암살자들이 마도가문의 영역에 본거지를 가지는 것은 마도가문 측에게도 숨은 전력이 된다. 암살자들 또한 자기 본거지 근처의 마법사들은 거의 절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위협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체프코트 가문이 자기 영역의 암살자들을 추적하고 파악하려 한다면?
이전에는 다른 지역에 본거지가 없기 때문에 행적이 드러난 암살자들은 체프코트 가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 다르다.
행적이 드러난 암살자들은 다른 가문의 영역으로 쉽게 옮길 수 있다.
추적을 하는 가문은 암살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암살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암살자와 마도가문의 공존체제이다.
마도가문이 가진 것은 힘의 우위.
이번에 암살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바로 거주이전의 자유.
그럼으로써 마도가문이 정도를 넘어서는 힘을 행사하면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대응을 하라는 취지다.
물론 암살자들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은 아니다.
난 기본적으로 암살자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들이 적으로 돌아서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방법에서 우리 데빌 베인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하나 있다.
새로운 본거지에 대한 내용을 모두 아는 것은 나뿐이다. 다시 말해서 암살자들의 본거지를 파악, 관리하는 게 바로 우리 데빌 베인이라는 거다.
이것으로 앞으로 암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절대 적대시 하지 않아야 하는 조직은 10대마도가문이 아닌 데빌 베인이 되는 셈이다.
그럼으로써 데빌 베인의 본거지인 미스틱 게이트, 그러니까 지금 나의 영지는 모든 암살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후훗.
이것이야말로 뱀파이어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면서도 나의 영지까지 지키는 일석이조의 대응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습니다. 렌 경께서 합당한 보수와 안전을 약속하셨으니 우리 형제들도 목숨을 걸 가치가 있겠군요. 앞으로 무슨 일이든 지시만 내려 주십시오.”
드디어 헨델이 결단을 내렸다. 암살자들의 임시대표격인 헨델의 말이니 이제 앞으로 당분간 암살자들을 관리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헨델과 악수를 하면서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다시 한 번 말했다. 계약서는 따로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약속임을 나도 알고 헨델도 안다.
“먼저 렌 경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이미 이곳의 암살자들과 연락을 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했으니 경께서는 그들을 만나서 이 새로운 계약에 대한 내용을 직접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헨델이 살짝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역시 이놈들은 뒤로 몰래 살아남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거네.
체프코트 가문의 영역 내에 있는 암살자들도 헨델 측과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어느 쪽에 붙을 건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말이야.
다행히 내가 늦지 않게 이들의 마음에 드는 제안을 해서 저울추가 마도가문쪽으로 기울게 된 거다.
나는 재수가 좋았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헨델의 안내를 받아 덴판 제국 내에서 활동하는 암살자들을 만나러 갔다.
이곳의 암살자들도 뱀파이어에게 잠식당한 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대응하기 위해 하나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뱀파이어들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각 지역의 군소 암살자조직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효과가 발생하는 건데, 이거 잘 하면 대륙전체를 아우르는 암살자 길드가 탄생하겠는걸.
그리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대륙 암살자 길드의 수장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흐흐흐.
난 순간적으로 내가 마족의 후계자가 된 기분이 되었다.
대륙의 모든 암살자들을 하나로 묶어 통괄하는 길드라니.
세상의 어떤 권력기관도 이들의 위협 아래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될 것이다.
다스 페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른 자들이 이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철저한 방비를 해야겠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얼마 후, 나는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20대 초중반의 여성, 암살자들의 대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아하면서도 순박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눈동자가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는데 묘하게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저는 케이니라고 해요. 렌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케이니 양이시군요. 저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이 급하니 본론만 얘기하도록 하죠. 현재 뱀파이어에게 굴복한 것으로 확인된 조직은 모두 네 곳이에요. 우리는 여섯이고 원래 그들보다 훨씬 큰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지금 공격을 당해 상당한 피해가 나고 있고요.”
“이쪽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상황이군요.”
“그래요. 저희를 지원해 주실 수 있나요?”
“뱀파이어와 연관된 조직을 토벌해 드리죠. 하지만 그들의 영역은 우리 데빌 베인에서 관리하게 될 겁니다.”
“오시는 동안 이미 대략적인 내용은 들었어요. 앞으로 다른 가문의 영역에서의 싸움에 우리들도 넣어주신다면 제안에 따르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빠르게 움직이죠.”
시간이 많지 않다. 조직들을 정비하다보면 관을 숨긴 뱀파이어들의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 가능하면 이번 그믐 전까지 모든 조직들을 손보기로 했다.
나는 즉시 케이니 양과 헤어져 체프코트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우리를 지원하는 마법사와 기사들을 소집해 출동을 시켰다.
“철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결계가 있을지 모르니 모든 영역을 진실의 시야로 탐색하여 주시고요.”
6서클 마도사가 마음먹고 결계를 탐색하면 거의 찾아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결계를 친 사람이 나같이 9서클에 결계 전문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7서클 마도사의 결계 정도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네 군데의 적 본거지를 동시에 공격했다. 사실 본거지가 밝혀진 이상 덴판 제국의 지원을 받는 체프코트 가문의 전력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편성한 토벌대는 철저하게 모든 것을 부수었다. 튀어나오는 암살자들 중에는 뱀파이어가 섞여 있었는데. 대낮에 기습 공격을 한 셈이라 이쪽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군다나 다른 조직들이 토벌 영역의 외곽지역세 잠복해 있다가 몸을 빼는 잔당들의 뒤처리를 해 주니 그야말로 섬멸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뱀파이어들의 관을 숨긴 곳은 찾아내지 못했다. 암살자조직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있는 몇몇 뱀파이어들의 관만 찾아내 파괴했을 뿐, 상위 뱀파이어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그믐이 되기 전에 암살자들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고, 앞으로도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케이니 양은 덴판 제국에서도 가장 화려한 살롱을 경영하는 숨은 오너였는데, 그녀의 이름인 케이니는 가장 큰 암살자 조직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조직의 이름을 걸고 사는 여자인 셈이다.
이번 사태로 케이니 조직은 다른 조직 다섯 개를 사실 상 흡수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덴판 제국의 암살 사건은 대부분 케이니가 연루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저는 어차피 때가 되면 지는 꽃일 뿐이에요. 수면위로 드러난 연꽃이고, 뿌리들을 보호하는 역할이지요.”
케이니 양은 태연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조직의 거래창구로써 교육받아온 그녀였기에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잡아가서 머릿속을 다 뒤져도 케이니 조직에 대한 것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케이니 양의 말은 그들을 대표하고 있다.
실제 두목이 누군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알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으니 일단은 넘어가자.
“그믐 날 뱀파이어들이 움직이면 본거지를 알 수 있게 감시망을 확보해 주세요.”
나는 케이니 양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체프코트 가문으로 돌아가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 사이 이곳의 암살자들은 수도 곳곳을 감시하며 뱀파이어들의 행적을 찾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저들의 공격을 막아낸 후, 안개로 변한 뱀파이어들을 쫓는 역할을 그들이 맡았다.
이것으로 우리는 겨우 때를 맞추어 그믐날 전에 싸울 준비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