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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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착했을 무렵,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거의 난리가 난 상태였다.
뱀파이어들이 관을 숨겨 놓은 장소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낮에 그곳을 습격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찾아내지 못하면 밤에 뱀파이어 암살자들을 맞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덴판 제국 병사들의 힘을 빌려서 사방 백 킬로미터 정도의 범위를 샅샅이 뒤지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은 아예 불을 질러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범위 안에는 덴판 제국의 수도인 잉카티움이 들어가 있고, 수도까지 불태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수색 작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적들은 잉카티움 내에 있을 것이오. 하지만 저 복잡하고 큰 도시를 모두 뒤질 수는 없으니 본거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구려.”
마이어 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형인 아론 경이 사라진 후 정식으로 가주의 자리에 올랐고, 아론 경의 현재 상태를 아는 몇 안 되는 비밀의 공유자다.
아론 체프코트 경은 지금 마족의 후계자가 된 상태이고, 엘프의 숲에서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 채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체프코트 가문을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뱀파이어 문제가 터졌고, 체프코트 가문이 표적이 된 것이다.
내외우환
정말로 이곳 체프코트 가문도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마족의 계약자와 얽히는 운명인가 보다.
“그나마 적어도 적이 잉카티움쪽으로부터 올 거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고, 칼론 2세 페하의 은총으로 기사 100명을 지원받았으니 충분히 뱀파이어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마이어 경은 이반 경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준비는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페론의 암살자들이 뱀파이어가 되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졌다고 하지만, 제국의 정예인 기사 100명과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방어하는 데 쳐들어 올 수는 없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마이어 경의 말에 쉽게 동의를 할 수 없었다.
수만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왕을 암살할 수 있는 게 암살자다.
적은 정면에서 오지 않는다.
스코트 가문에서 정면 공격을 가한 것은 미끼일 가능성이 크다.
암살자가 왔음을 깨닫는 순간은 심장에 검이 관통당하는 고통과 함께 온다. 그런 만큼 이번 공격은 은밀하고 치명적일 게 뻔하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예고된 암살이오. 기사를 배치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적들이 예상한 범위 안의 일일 터이니 방심하기는 이릅니다.”
이반 경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마이어 경을 비롯한 체프코트 가문의 장로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역시 그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구나. 적들이 정면에서 안 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반 경의 말씀대로라면 결국 우리가 저들의 농간에 넘어가기 전에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게 좋겠구려.”
“그렇게만 된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만 본거지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요.”
“그렇다면 당장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반 경.”
장로 중 하나가 살짝 끼어들었다. 이반 경이 뭔가 하려는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삼십대 중반의 마도사였는데, 나 정도는 아니지만 근래에 가장 천재적인 마법사로 소문이 난 파비로 경이다.
이반 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사태의 해결책은 암살자에 있다고 우리 데빌 베인에서는 생각하고 있소. 대륙의 암살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협조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당장 우리가 데려온 암살자들이 경계만 잘 해준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지만, 문제는 그들은 지금 마법사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오.”
“흥, 비천한 것들이 우리를 경계한단 말입니까?”
또 다른 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웃길 것이다. 솔직히 마법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암살자 조직을 찾아내서 토벌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살짝 눈을 감아주고 필요할 때 이용해주는 정도라는 게 암살자들에 대한 마법사들의 인식이다.
이반 경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암살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소. 뱀파이어들에게 붙어 힘을 얻은 후 눈에 보이는 마법사와 세상의 박해로부터 해방될 것인지, 아니면 마법사 편을 들어 미지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것인지. 그런데 내가 암살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뱀파이어라는 미지의 공포보다는 눈에 보이는 마법사들의 박해를 먼저 어떻게 하는 게 더 절실할 것 같더군요.”
“그들이 우리를 배신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애초에 배신은 없소. 경은 암살자들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
“다른 조직들이 뱀파이어의 편에 들면 그들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뱀파이어에 가담한 자들이 꽤 될 것이고, 그로인해 페론의 암살자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활동했던 영역 밖에서도 관을 숨길 수 있는 본거지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덴판의 암살자들도 그들에게 협조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파비로 경이 한 마디로 정리를 했다.
눈치 빠르네.
이게 바로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아무리 페론의 암살자들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활동한 영역은 대륙 전체가 아니다. 하지만 페론의 암살자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10대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건 반대로 이야기하면 10대 가문이 있는 지역의 암살자 조직은 이미 페론의 손에 넘어가서 그들에게 본거지를 제공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다.
페론의 암살자들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우선 덴판의 암살자들을 파악하고 그들이 뱀파이어와 연관이 되어 있는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아직 넘어가지 않은 조직들을 회유해서 관리하는 것.
넘어간 자들에게는 넘어간 이유가 있듯, 넘어가지 않고 버틴 자들에게는 그럴 능력이나 이유가 있을 터이니 그 부분을 알아내야 한다.
이반 경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걸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상황이 급하니 말을 돌리지 않겠소.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사들은 암살자들에 대해 좋은 인연보다 악연이 더 많을 가능성이 크고, 또 그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정중하기 어려우니 암살자들을 만나고 회유하는 것은 여기 렌 경에게 일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렌 경이 그들과 타협한 부분에 대해서는 가문의 명예를 걸고 뒷말 없이 모두 지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타협에 대한 모든 권리를 데빌 베인에 넘겨라.
이반 경은 체프코트 가문에게 정식으로 요구를 했다. 암살자들에게 재물을 주던지, 아니면 죄를 면하게 해 주던지 무슨 협정을 맺어도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마이어 경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이반 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도 지금 상황이 급하기 때문에 암살자들을 포섭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그걸 우리 데빌 베인에서 해준다고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무슨 협정을 맺던지’ 라는 덕목이다. 나중에 딴 말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반 경은 즉시 방금 내용을 문서화 하고 기사단의 단장을 불러 공증까지 세웠다.
이것으로 우리 데빌 베인은 암살자들과의 협정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을 수 있었다.
그믐이 시작되기까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이니 지체하지 않고 체프코트 가문이 기존에 거래를 했던 조직들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먼저 우리가 데려왔던 암살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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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무슨 협조를 더 하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암살자들의 대표격인 헨델이 나에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쉽게 속마음을 읽히지 않는 타입의 남자지만 그나마 나에게 큰 적의와 경계심은 품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뱀파이어들이 공격해 왔을 때 나와 크리드 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며 싸워준 것이 약간은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
“덴판에 있는 조직들을 검토하고 정비할 생각입니다. 헨델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아무래도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뱀파이어들을 찾아내기 위해 온 것이니 다른 조직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뒷세계의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지금 덴판의 암살자 조직 중 적어도 몇 개는 뱀파이어들에게 넘어간 상태일 터이고, 남은 조직들도 알게 모르게 하나씩 넘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조직들은 정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정리를 하기는커녕 차라리 자신들도 뱀파이어쪽에 붙을까 고민하고 있겠지.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암살자들을 쓰다가 그들이 중간에 배신을 하면 일이 커진다.
마법으로 정신을 제압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못 된다. 현혹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깨어지는 것과 다름없고, 무엇보다 뱀파이어들이 그 현혹마법의 대가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현혹마법을 걸고, 우리가 깨면 좋다. 하지만 그 반대면 암살자들은 마법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시 뱀파이어의 편이 될 것이다.
세상에 누가 마법으로 자신의 정신과 감정이 제어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나는 다시 말했다.
“헨델 님, 이건 새로운 제안이고 거절하셔도 상관없으니 일단 들으십시오. 지금 뱀파이어들은 10대 가문 주변의 조직들에 마수를 뻗힌 상태이고 우리 마법사들은 그들을 찾아내서 정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정리된 조직의 영역은 비어있게 되는데, 우리는 그 영역을 헨델 님처럼 협조를 해준 조직에게 넘길 생각입니다.”
“영역을 우리에게 넘긴다고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 덴판 제국이라면 조직을 확장시키기에 나쁘지 않은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둠속에 사는 자들은 근거지가 많을수록 생존확률이 올라가고 한 군데에서 문제가 생겨도 최악의 사태에 빠지지는 않을 테니 나쁜 제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렌 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역시 영역을 나누어 주겠다고 제안하니 사람이 적극적으로 변하는군. 사실 이들 입장에서는 10대 가문이 있는 곳곳에 분가를 시켜주겠다면 무조건 목숨 걸고 뛰어들 수밖에 없다. 뿌리는 나뉘면 나뉠수록 생존력이 강해지는 법이니까.
나는 헨델에게 나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