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34화
위험하다.
이대로 가면 난 적진 한 가운데로 끌려가 로브는 벗겨지고, 몸은 실험대상이 되거나 뱀파이어의 도시락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건 기회다.
다스 페론은 나를 끌어안고 달리는 중이다. 이자와 이렇게 접촉한 상태로 오래 있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의식을 집중시켰다.
비록 대부분의 마법무구들은 기능이 정지되었고,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태지만 나의 감각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히려 다른 마나의 흐름이 모두 사라진 지금에야말로 다스 페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역파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파지직
다스 페론이 스코트 가문의 방어마법진을 빠져나올 때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역파장이 몇 배나 세졌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역파장의 세기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나보다.
어쨌든 다스 페론은 실수했다. 나에게 자신을 조사할 틈을 준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약점을 모두 나에게 드러내는 것과 같다.
조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전신으로 역파장을 느끼고, 다스 페론이 그것을 어떻게 뿜어내는 지까지 알았으니 곧 대응책이 나왔다.
‘흑마법이라면 살짝 변형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견적이 났다. 보통 룬마법이라면 역파장에 의해 중화됨을 피할 수 없지만 같은 흑마법 계열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 같다.
물론 그냥은 아니고 마나의 수식을 역파장의 흐름에 거슬리지 않게 바꿔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법의 근원이치를 깨달은 나에게 있어 그 정도 조작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스 페론의 감각을 피할 수 있는 미묘하면서도 그다지 강하지 않은 흑마법이면 이자의 능력을 당장은 벗어날 수 있다.
그럼 어떤 흑마법을 써야 할까?
그게 좋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다스 페론의 몸을 계속 조사했다.
그의 목 부위로부터 문신이 살짝 보였다. 마법의 문신이다.
‘아하! 이 자가 몸에 마법진을 그렸군.’
일부분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은 굉장히 고위의 마법진이다. 그러니까 9서클 수준의 흑마법진인데, 아무래도 이 마법진으로 역파장을 발산하는 것 같다.
보통 사람은 몸에 마법진을 새길 수 없다. 피가 흐르고, 피부는 변질된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엄밀히 말해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다. 상처를 입거나 머리카락을 잘라도 다시 원래대로 재생되어 버리는, 그야말로 완벽재생 능력을 갖춘 고정된 물질과도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뱀파이어야 말로 골렘보다 훨씬 좋은 움직이는 마법진 설치대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다스 페론은 뱀파이어의 몸과 마나의 흐름을 읽는 감각을 능력으로 얻고, 마법진이 새겨진 육체를 얻은 거다.
분석이 끝나고 나는 다스 페론으로부터 벗어날 때를 기다렸다.
대응책이 나온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적의 본거지 한 가운데로 끌려가는 것은 곤란하지만 본거지 입구까지 안내되는 것은 환영이다.
무엇보다 뿌우가 결계에 갇힌 이상 그 결계 안까지 들어가 주는 게 제일 좋다. 그러면 다시 뿌우를 부를 수 있다.
츠츠츠츠츠
격리된 공간을 넘어 들어가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안쪽 공간이 기묘하게 비틀어져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리고 뿌우와의 연결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다.
생각대로군. 후후훗.
나는 즉시 다스 페론의 몸에 손을 대고 준비했던 변형 흑마법을 시전했다.
“노이즈!”
빠드드드드
“크윽!”
다스 페론은 달리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뒹굴었다.
마나의 흐름을 잡음으로 바꾸어 상대를 공격하는 저주계 흑마법. 원래는 마법사에게 걸어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마나를 모을 때 소음을 일으켜 마법실패를 유도하는 저주다.
별로 강한 마법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다스 페론은 지금 자신이 발하는 역파장의 소리를 듣고 있다.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지만 몸에서 어느 정도 이상은 계속 발산되는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 소리가 자신의 역파장 소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 할 것이다.
이정도 강한 역파장이라면 아마 좁은 공간에서 천둥번개가 연속해서 치는 듯 한 느낌이리라.
나는 그 사이 다스 페론으로부터 빠져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스 페론이 여전히 귀를 감싸 안은 채 괴로워하며 외쳤다.
“그걸 알려면 마법사가 되어야 할 걸.”
나는 빈정대며 다시 마법을 썼다.
“감각전이!”
위이이잉
이것은 청각과 시간, 후각을 모두 뒤엉키게 만드는 저주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코로 생선 썩는 냄새를 맡게 되고, 꽃향기를 맡으면 입에서 침이 감돈다. 음악을 들으면 환상을 볼 수도 있다.
마치 장난 같은 저주지만 이렇게 큰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다스 페론에게는 멋진 효과를 낼 터이다.
“크아아아!”
다스 페론의 눈에서 피가 난다. 뭔지 몰라도 환상으로 못 볼 것을 본 거 같다. 이정도면 사실 상 눈이 먼 것이나 마찬가지다. 뱀파이어에게 블라인드 마법은 통하지 않는데, 흑마법의 변형을 쓰니 이런 효과가 있네.
역파장이 격하게 흔들린다. 아마 다스 페론 나름대로 이 저주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지 발악하면 할수록 고통이 커지는 거야.
“크으으으.”
드디어 다스 페론이 무릎을 꿇고 땅에 쓰러졌다. 청각과 시간이 모두 데미지를 입었으니 몸의 균형감각이 망가졌다고 봐야 한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다시 기회를 얻을까?
나는 얼른 지팡이로부터 미스릴 우산을 펴고 마나파동포의 발사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스 페론은 내가 미스릴 우산을 펴자마자 움찔 하더니 바로 박쥐 떼로 변신을 했다.
파드드드득
“어라, 눈치 챘냐?”
암살자의 훈련을 받은 자답게 이 상황에서도 위기를 느끼고 반응한 모양이다. 시각, 청각이 아닌 미지의 감각이 작용한 것 같다.
“크으으으으, 두고 보자.”
허공중에 초음파가 섞인 다스 페론의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냥 가면 섭섭하지. 이거나 먹어라. 체인 썬더!”
꽈드드드등
박쥐 수십 마리가 뇌전의 체인에 얽혀 새까맣게 타버렸다. 나는 박쥐가 완전히 나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연속해서 마법을 썼다. 한 마리라도 더 죽여서 다스 페론의 몸에 구멍을 늘려 주어야 그만큼 회복을 늦출 수 있다.
“뿌우야, 어서 와서 너도 때려!”
“앙, 언제 거기까지 와 있었냥.”
뿌우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냥 허공을 빙빙 돌고 있었는데, 아마 본인은 일직선으로 날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뿌우는 내가 말을 걸자 그때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박쥐들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적어도 박쥐의 절반은 죽인 것 같다. 다스 페론의 몸을 반 토막 낸 셈이다.
나는 일단 결계를 벗어나 경계선에 마법표식을 남기고는 뿌우에게 말했다.
“어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와. 날이 밝으면 결계 안을 탐색해서 관을 찾아야 하니까.”
“알았당.”
하늘을 보니 이미 동쪽 방향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나 긴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온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리니 이반 경을 비롯해 우리 일행들과 델모트 백작이 직접 인솔하는 스코트 가문의 마법사들 십여 명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렌 경,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었네.”
델모트 백작은 나를 보자마자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일부러 납치된 것입니다. 덕분에 다스 페론의 몸을 세밀하게 조사할 수 있었지요. 이쪽에 결계가 있는데, 그 안이 그들의 본거지인 것 같으니 밤이 되기 전에 처리를 하죠.”
“물론이지. 내 뱀파이어들의 관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네.”
첫 기습 이후 매일 밤 공격만 당하다가 드디어 반격의 실마리를 찾으니 흥분이 되나보다. 델모트 백작은 가장 앞장서서 결계를 파괴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안쪽 계곡에는 절벽이 있고, 절벽마다 구멍을 파서 관을 놔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있는 관은 수십 개에 불과했고, 상당수의 구멍은 비어 있었다.
계곡 아래쪽 길을 따라 마차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는데, 아마도 급하게 관을 실고 떠난 듯 했다.
남은 관은 대부분 하급의 뱀파이어들 것이니 저들의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큰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당분간 스코트 가문이 공격당할 일은 없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네요. 이걸로 확실해 졌어요. 뱀파이어들은 관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으니 10대마도가문 근처에는 이처럼 관들을 보관할 장소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뱀파이어의 약점이로군요. 알겠습니다. 각 가문에 연락해서 찾아보라고 하죠.”
관을 숨겨놓을 장소를 없앤다면 대규모 공격을 당할 염려는 없다. 예방 차원의 대응책이 하나 생긴 셈이다.
스코트 가문 사람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관을 파괴하는 작업을 했다.
그 사이 이반 경은 나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스 페론의 몸을 조사했다고 하셨는데, 뭔가 알아낸 겁니까?”
궁금했나보네. 하긴, 나라도 궁금했겠지.
나는 내가 조사한 것을 이반 경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움직이는 마법진.
흑마법을 변형하면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것으로 보아 역파장이 모든 마나의 흐름을 제어할 수는 없다는 것.
“하지만 이번에 당했으니 다음번에는 흑마법도 어떻게 해서 올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내가 미스릴 우산을 펴자마자 바로 박쥐 떼로 변신을 하더라고요.”
“마나파동포를 경계하는 거군요.”
“예, 이건 거꾸로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문제는 다스 페론이 이제 어디로 갔는가 하는 거겠군요.”
“예, 더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그자를 찾아야 해요, 하지만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다스 페론을 돕는 마법사가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7서클 정도는 되어 보이니 그 부분의 대응책을 생각해야겠어요.”
“이번 적은 쉽지 않군요. 실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지금까지가 너무 쉬웠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당분간 스코트 가문은 무사할 테니 준비가 되는 대로 우리는 떠나야겠어요.”
“알겠습니다.”
이반 경은 관 파괴 작업이 대충 끝나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가서 델모트 백작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델모트 백작은 우리가 떠난다고 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뱀파이어의 습격은 없을 거라고 다시 말을 하니 한숨을 내쉬며 고맙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믐날이 지날 때까지는 스코트 가문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의 전투는 끝나고 짧은 휴식시간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