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29화
2장 초승달의 결전
실수다.
날짜 계산으로는 분명히 초승달이 떠야 맞는데, 이건 말이 초승달이지 거의 그믐에 달빛이 살짝 새어나오는 수준이다.
구름까지 상당히 진하게 떠서 하늘에 별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약속된 결전장소로 가는 도중에 만난 뱀파이어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딜 감히 이런 밤에 뱀파이어에게 도전을 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만만한가 보다.
다스 페론이 아니라면 너희들은 다 정리할 수 있거든! 좀 힘들긴 해도 이반 경하고 크리드 경이 있으니 충분히 된다고.
하지만 다스 페론은 다르다. 그동안 레베카로부터 알아낸 정보로는 다스 페론이야말로 노스페라투, 그러니까 진조라고 불리는 진정한 상급 뱀파이어이자 마족의 영역에 들어선 자였다.
또한 다스 페론은 마족과 계약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자신만의 육체를 얻었다. 그리고 그 육체를 페론의 암살자들이 수련하는 방식을 개량해서 더욱 가혹하게 단련했다고 한다.
주어진 힘과 육체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강함을 극대화 한 것이다.
만약 다스 페론이 평범한 인간의 육체였다고 해도 아마 초일류의 암살자에 해당하는 실력을 지녔을 거라고 한다.
그 말을 하는 레베카의 어투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틀림이 없다.
기본 능력도, 기능적인 실력도 다른 뱀파이어들과 수준이 다르다고 할까? 단순히 마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우리는 필승의 각오를 다지며 몇 가지 대응책을 준비했다.
나는 나대로, 크리드 경과 이반 경은 그들대로 싸울 준비를 했고, 서로 논의하며 손발을 맞췄다.
문제는 이런 대응책도 달이 전혀 없는 그믐에는 효과가 확 줄어들 수 있다는 거다.
달은 마력의 원천,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비롯, 생명이 없는 물질까지 영향을 받는다.
특히 저주받은 것들과 마법적인 것들은 더욱 큰 영향을 받는데, 그게 생명체나 마수 중에서도 그런 영향을 받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웨어울프를 비롯한 라이칸스롭들은 보름달이 뜨면 육체능력이 극대화되어 평소의 두 배나 강한 힘을 쓸 수 있지만 반대로 정신이 흥분되어 거의 버서커 상태가 된다.
반대로 음의 에너지를 쓰는 뱀파이어는 보름달에는 조용히 잠을 자면서 쉬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그믐이 되면 마력이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다스 페론은 마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마력을 육체능력으로 돌린 특이종이다. 한 마디로 그믐이 되면 그자의 힘이 두 배로 강해진다는 소리다.
“그래도 일단 초승달이 뜬 건 뜬 거니까, 그믐은 아닐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위로하듯 중얼거리다가 이반 경에게 말했다.
“이반 경, 문 라이트 마법으로 그믐 효과를 지울 수는 없죠?”
“진짜 그믐 당일이라면 안 됩니다만 지금 상황이라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잘 됐네요. 나중에 그거부터 쓰고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달빛을 강화하는 문 라이트라면 나의 불안감을 상당히 줄여줄 수 있으리라.
아아, 7서클이 되었는데 여전히 불안하다니. 왜 이리 세상에는 강한 놈들이 많은 거야?
이것도 다 내가 마족의 후계자와 거래를 한 탓이다. 끊임없이 마족의 후계자를 찾아내게 되는 저주라니. 쩝.
어떻게 보면 좋긴 한데,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겠다. 움직일 때에는 꼭 모두들 데리고 움직여야지. 길에서 마족의 후계자를 만나도 바로 대응할 수 있게 말이야.
“왔는가. 조력자까지 데리고 왔으니 이제 결판을 내야겠군.”
다스 페론은 오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기운은 이미 그의 육체가 완벽하게 재생되었음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다스 페론, 오늘이야말로 너를 소멸시키고 너의 관을 파괴하겠다.”
“크크크, 네놈들에게 대단한 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회복한 이상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넌 암살자다. 그런 네가 우리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부터가 패착이지. 암살자는 본거지를 들킨 시점에서 이미 패배한 거다.”
“......”
아픈 데를 정통으로 찌르니 기분이 나쁜가보군. 살기가 더욱 강해지고 다스 페론의 몸 주변에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흡혈의 안개 같습니다. 크리드 경 조심하십시오.”
이반 경이 바로 경고를 했다. 흡혈 안개 속에서 싸우다보면 모르는 사이에 몸 안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미라처럼 되어 버린다. 알고 보면 안개가 아닌 피를 빨아먹는 미생물인 거다.
“방어는 안 되나요?”
“원래는 되는데, 다스 페론의 주변에 접근하면 다른 마법은 모두 사라져 버리니 방어마법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젠장, 그럼 곤란한데.”
“뿌우야, 네가 크리드 경 주변에 붙어서 흡혈안개를 막아.”
“알았당.”
“오호, 정령은 약화가 안 되니 확실히 괜찮군요.”
이반 경은 지금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역시 아직까지는 정령보다는 마법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강해서 전략과 전술에 융통성이 부족하다.
뿌우가 돌개바람으로 변해 크리드 경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반 경이 문 라이트 마법으로 달빛을 강화하니 렉스가 기분이 좋다는 듯 빛나는 초승달을 보며 크게 한 번 포효했다.
서피는 내 지팡이에 숨어있다.
마리포즈는 내 뒤에서 다른 뱀파이어의 기습에 대비했다.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암살자라 나뿐만 아니라 이반 경과 크리드 경이 당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없다.
“정령강화.”
크리드 경이 물의 정령을 이용해 자신의 육체를 강화했다. 그러자 뿌우가 더욱 신이 나서 바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여친이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인가 보다.
“시작하지.”
다스 페론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돌격을 명했다.
슈슈슈슉
역시 이놈들은 빠르다. 독이 묻은 단검을 던지고 같이 달려드는데 단검과 뱀파이어가 거의 같이 온다.
나는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주문을 시전 했다.
“어스 바운드!”
쩌쩍
지표면 전체가 접착제처럼 변했다. 내 주변으로 수십 미터가 파리 끈끈이처럼 변한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땅을 한 번은 디뎌야 한다. 뱀파이어들은 갑자기 발이 붙어버리자 자신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리고는 전신이 땅에 붙어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이반 경이 이때다 하는 목소리로 주문을 시전했다.
“어스 스피어!”
퍼퍼퍼퍼퍽
땅으로부터 날카로운 바위창이 수백 개나 튀어나와 쓰러진 뱀파이어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쉽게 죽는 놈들이 아니니 비명만 지르고 여전히 움직이려 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땅이 아닌 동료를 밟고 이동하라.”
다스 페론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 뒤로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은 이미 쓰러진 자들의 몸을 밟으며 이동했다.
“블레이드 배리어!”
촤촤촤촤촤촹
이반 경과 내 몸 주변으로 수백 개의 칼날이 생겨나 우리를 중심으로 맹렬하게 회전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여길 통과하려면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안전은 어느 정도 확보된 셈. 누군가 뚫고 들어와도 마리포즈가 상대할 거다.
하지만 렉스는 블레이드 배리어의 범위로부터 벗어나 있다.
“크리드 경 가세요. 렉스, 너도 가!”
“차앗!”
“크왕!”
드디어 메인이벤트다. 크리드 경과 렉스가 다스 페론에게 돌진하자 상대도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스 페론을 이쪽으로 접근시키지 말아요. 우선은 떨거지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니 막는 데 주력해 줘요.”
“주문이 많군. 저런 놈을 상대로 싸우려 하는 나에게.”
크리드 경은 살짝 불만을 표하면서도 내 요청에 따라 정확하게 다스 페론의 이동경로를 가로막아 주었다.
그리고는 검을 빠르지 않게 천천히 휘둘렀는데, 이게 이상하게 빠른 것보다 더 다스 페론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자신의 빠름을 제어할 수 있나?”
크리드 경은 태연하고 검을 휘두르면서도 말을 했다. 마치 실전 상황이 아니라 동료와 수련을 하는 듯 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저 말의 무서움을 안다. 상대의 마음에 걸릴만한 말을 함으로써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정신이 조금만 분산되어도 크리드 경은 바로 파악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다.
특히 다스 페론은 스승 없이 스스로 수련을 한 자라 강해도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닐 거라고 크리드 경이 예측한 바 있다.
그런 자는 마음 한 구석에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에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봐라, 다스 페론의 움직임이 신중해졌다. 크리드 경의 말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일견 빈틈이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위협성도 같이 떨어진다.
크리드 경은 여유 있게 다스 페론을 상대했다.
반면에 렉스는 이번에야 말로 꼭 깨물어서 씹어 버리겠다는 듯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강과 유의 조합, 한쪽은 버서커처럼 공격을 가하고, 다른 한쪽은 부드럽게 막으니 다스 페론은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조금씩 밀렸다.
본인은 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방향이 점점 틀어져 애초의 목적인 우리 쪽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셈이다.
우향우로 돌진이라고 하는 거지. 후후.
우리는 그 사이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열심히 처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보름 전 배를 타고 대륙 각지로 흩어졌기에 이곳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수가 많지 않고, 또 그다지 강한 자도 없었다.
하긴, 다스 페론만 있으면 마도 가문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인데 다른 전력을 또 남길 리가 없지.
어느 정도 뱀파이어가 정리된 후, 나는 이반 경에게 말했다.
“공격마법을 준비하세요. 중화할게요.”
“제일 강한 걸 쓰겠습니다.”
이반 경은 처음부터 승부를 보겠다는 듯 신중한 손짓으로 수식을 그리며 마나를 집중시켰다.
배니시먼트, 손짓만 봐도 저게 뭔지 알겠다.
8서클 백마법 중 최고의 파괴력을 지닌 대 언데드용 공격마법이다.
“마리야, 이리 와.”
“옛.”
나는 마리포즈의 등에 손을 대고 마리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조절했다.
우리가 그동안 연구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마리의 마나를 조절해서 또 다른 역파장 마나를 흘린다는 거다.
그러면 다스 페론은 마리의 역파장부터 제거하려 할 것이고, 그때 순간적으로 마나의 증폭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마법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강화시키는 셈인데, 다스 페론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될 거다.
성공확률은 마리포즈식 계산으로 67%, 충분히 높다.
“그럼 들어갑니다. 마리야. 가랏!”
“옛.”
파앗
드디어 마리포즈가 뛰어들었다. 몸 안에는 일시적으로 주변 마법을 약화시키는 역파장의 기운을 가득 담은 상태다.
자, 다스 페론, 마리포즈의 역파장을 약화시켜라. 그러면 이반 경이 상으로 배니시먼트를 선물해 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