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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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마법사를 싫어해요. 우리 가족은 모두 마법사들에 의해 죽었으니까요.”
“그럼 레베카 님은 마법사를 원망하지 않나요?”
“저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마법사에게 원한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봐요. 가령 렌 경만 해도 우리 가족을 죽인 자들과는 관련이 없을 테니까요. 원수를 정확하게 지정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마법사 전체를 원망하고 멸살시키려 하는 것은 일종의 미친 짓이죠.”
“뭐라고 해도 다스 페론 경은 그것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레베카 양은 그것을 막지 않았고요.”
내가 왜 이자들이랑 대화를 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를 제압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실제 능력이 아니라 허세였기에, 지금 정말로 싸우면 오히려 우리가 당할 가능성이 높기에 일단 시간을 끄는 중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저쪽도 시간을 끌고 싶을 거다.
암묵적인 상호간의 동의 아래 시작된 대화. 저쪽은 회복의 시간을 벌고, 나는 그 사이 정보를 얻어야 한다.
이미 많은 정보를 얻었다. 말로 얻는 정보가 아니라 지금 레베카가 차고 있는 팔찌로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고, 마리포즈가 직접 지하기지의 내부를 살피며 페론이라는 암살자 집단의 현주소가 담긴 서류들을 챙기고 있다.
그 덕분에 다스 페론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회복을 할 수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다스 페론은 레베카의 몸을 녹여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레베카의 몸은 거의 외형인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서서히 회복을 시키기 위해 관에서 잠을 자다가 다스 페론이 궁지에 몰리자 억지로 다스 페론과 교대한 것이다.
거의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렉스의 등에 태워서 이곳까지 왔다.
이곳은 물에 떠 있는 배 위이고, 사방에 봉인의 결계마법진을 그렸다.
뱀파이어는 물 위를 이동하지 못한다. 얕은 개울조차 건널 수 없다.
이렇게 배에 탈 때에는 힘의 근원이 되는 부정한 흙이 담긴 관 속에서 잠을 자야하는데, 관도 없이 배에 탔으니 능력은 거의 쓰지 못하고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거의 소멸에 가까운 상태가 될 것이다.
레베카는 자신이 포로가 되는 것을 승낙했고, 페론이 회복되어 다시 정식으로 교섭을 할 때까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정도면 그때 내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 한 거다.
솔직히 거의 기적적인 승리다.
다스 페론이 마나파동포의 진실을 알았다면 미치고 팔짝 뛰었을 정도로 이쪽이 유리하게 상황을 진행시켰다.
이제는 많은 정보를 얻고, 이반 경과 크리드 경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게 되었다.
레베카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내가 묻는 대로 대답을 해 주었다.
“우리는 샴 쌍둥이에요. 원래 동생은 내 몸속에 있었고, 나는 그 때문에 항상 몸이 아팠죠. 하지만 동생은 내 눈으로 세상을 봤어요.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생각은 자유로웠나 봐요. 그러다가 우리가 마법사들에게 공격당하고 나는 한 번 죽었어요. 그자들은 걷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동생은 살았고, 분노 속에서 마족과 계약을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서로의 몸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거군요.”
“맞아요. 사실 저도 뱀파이어가 되긴 했지만 동생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어요. 동생의 육체는 마족에게 얻은 것이고, 최강의 육체라 할 수 있어요.”
그 최강의 육체가 지하 기지 어딘가에 있는 관 속에서 서서히 재생하고 있다. 내 예상대로 보름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란다.
지금이라도 지하에 대고 마나파동포를 열 발 정도 쏴 볼까? 그래서 재수 좋게 명중을 하면 사건이 끝나는 거고, 실패해도 지반이 완전히 붕괴되어 땅속에 파묻어 버릴 수가 있으니 그 다음에는 땅에 마법진을 그려서 봉인을 하면 될 거 같단 말이야.
하지만 이 생각은 그만큼 위험성이 있다.
일단 마나파동포를 쏘게 되면 이게 지연성 발사라는 것을 바로 들키게 된다.
설령 다스 페론을 소멸시킬 수 있다 해도 다른 뱀파이어 목격자들이 이 소문을 내게 될 거고, 다음에 만날 마족의 계약자들은 마나파동포의 약점을 알고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
그리고 다스 페론이 완전히 행동불능이라고는 볼 수 없다. 레베카를 인질로 잡았기에 지금의 소강상태가 유지되는 거지. 만약 우리가 공격을 가한다면 그들도 최후의 발악을 할 거다.
젠장, 머리가 복잡해지네. 지금은 마음을 비우고 심문이나 계속하자.
“이미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배를 타고 대륙으로 퍼져 나갔으니,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그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나요?”
“미안해요. 동생은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상황도 제 판단이기 때문에…….”
“다스 페론은 끝까지 싸우려 했나요?”
“관의 힘을 쓰려고 했어요. 그랬으면 아마 렌 경 일행은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같이 죽을 각오를 했다는 거군요.”
이런 불멸자스럽지 않은 놈을 보았나! 같이 죽자고 자폭기를 쓰면 어쩌자는 거야.
진짜 다행이다. 다스 페론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우리는 다 죽고 그놈은 살았겠지.
“좋아요. 그럼 레베카 양의 제안은 뭔가요?”
“동생을 설득해서 모든 마법사에 대한 복수의 맹세는 거두도록 할게요. 아마 10대 마도가문만 멸망시키면 될 거예요. 그 뒤에는 우리 뱀파이어가 세상의 표면에 나갈 일은 없어요. 암살자 길드인 페론을 유지하며 어둠속에서 살아갈 뿐이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법사에 대한 복수의 맹세가 바로 마족과의 계약내용이라면 무조건 지켜야 해요. 그리고 마족의 계약자들은 무조건 세상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지 않나요?”
“동생의 계약 내용은 우리 가문을 멸절시킨 마법사들을 저주하고 복수하겠다 였어요. 해석에 따라 모든 마법사가 아닌 페론 가문을 공격한 마법사들만 죽여도 되는 거지요.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부분은 정확하게 말하면 이래요.”
레베카는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들은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암중으로 뿌리를 내리고 활약을 한다. 하지만 만약 다른 마족의 지배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다스 페론은 그자를 암살하고 대신 세상을 지배할 거다.
즉, 다른 마족의 지배자가 세상을 손에 넣기 전에는 다스 페론이 표면에 나설 일은 없다.
“말이 되긴 되는군요. 어차피 그렇게 되면 누가 세상을 지배하든 상관이 없는 상황일 테니.”
“그렇죠? 아마 그때는 렌 경이 우리와 손을 잡고 같이 싸우게 될 지도요.”
레베카는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지 상큼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제안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 답변을 드리죠.”
“승낙 안 하실 건가요?”
환혼의 기운이 담긴 눈빛이다. 역시 뱀파이어는 뱀파이어군. 평범한 수준은 아니고 보통 사람은 저항도 못 하고 바로 이성을 상실할 정도의 힘이 담겨 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마족의 계약자들과의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스 페론 경과 레베카 양과는 결판을 내야겠군요.”
“역시 그런가요?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해 졌네요.”
“뭐가요?”
“렌 경은 지금 당장 제 동생과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토록 결심이 굳은 분이 지금 상황을 허락했다는 것은 시간을 끌고 싶다는 거고, 그것은 아마 동료들이 지원을 올 시간을 벌고 싶은 거겠죠?”
“하하하, 정확하게 아시는군요.”
머리 좋은 여자다.
다스 페론은 힘이고, 레베카가 지혜인 셈인가? 이 조직은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좋아요. 서로 간에 이해가 일치한 셈이니, 동료들을 부르세요. 그 사이 제 동생은 원래의 육체를 재생시킬 테니까 그때 결판을 내죠.”
레베카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제 삼자가 나는 구경이나 하겠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럼 그때 레베카 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는 동생의 정신적 지배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있어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다르죠. 약속드릴게요. 그대들이 동생을 소멸시켜도 저는 간섭하지 않겠어요.”
“다스 페론 경의 소멸을 그냥 지켜보겠다고요?”
“저는 이미 한 번 죽었어요. 뱀파이어로 다시 살아났지만 생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동생의 의지로 복수를 하게 되었지만 그게 기쁘지도 않고요. 할 때까지 해 보고, 안 되면 마는 거죠.”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이시군요. 아무튼 알았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레베카 양은 이 배안에 계십시오.”
“그렇게 할 게요.”
레베카는 정말 순순히 이쪽의 제안을 따랐다. 다스 페론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아니, 그가 회복되어 싸운 뒤에 져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으니 어떻게 보면 완벽하게 방관자가 된 셈이다.
나는 혹시라도 레베카가 다스 페론의 소멸 이후 뒤를 이어 계약자가 되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레베카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뱀파이어가 됐으니 그렇게 살 뿐, 모든 운명은 흐르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속에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구도자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집념과 욕망이 없으면 마족과의 계약은 불가능하다. 동생의 죽음이나 원한, 복수까지 포기했기 때문에 레베카의 정신상태는 마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나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놔두자. 지금 그녀를 어떻게 했다가는 다스 페론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까.
*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항구에 이반 경과 크리드 경이 탄 배가 정박을 했고, 그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가 타고 있는 배로 옮겨 타서 레베카를 보았다.
크리드 경은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난 후 나에게 물었다.
“다스 페론이 그렇게 빠른가?”
“제 수준으로는 반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으음, 그럼 나보다 두 배 이상 빠르다는 거군. 움직임을 느끼고 대응하면 늦겠는걸.”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측을 하는 거지. 상대의 호흡, 공기의 흐름. 땅의 울림 등등으로 앞으로 일어날 상대의 동작을 미리 예견하고 한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네.”
“그런 게 가능합니까?”
“수련하다보면 가능해지기는 하는데, 이건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고, 그것도 깨닫는다고 완벽하게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네.”
“그렇군요. 어쨌든 다스 페론 경과의 싸움은 일단 크리드 경께 맡기겠습니다.”
“알았네. 마법을 약화시키는 능력이라니. 내가 할 수밖에 없겠군.”
작전을 대충 세운 후,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싸움의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삼일 후, 초승달이 뜬 날의 자정이다.
그믐이 있기 2일 전인데, 상대는 그믐에 싸우자고 했지만 그건 뱀파이어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이라 조율을 한 결과가 초승달의 밤인 거다.
반달이 더 좋고, 보름달이면 렉스의 힘이 강해지니 이쪽이 유리할 건데, 시간적으로 맞지 않았다.
초승달만 해도 양호하니 3일 후에 결판을 내야지.
일행을 쉬게 한 후, 나는 마리포즈와 함께 또 다른 몰래 준비한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바로 상대의 기감을 흐트러뜨리게 하는 방법이다. 마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다스 페론의 기감능력만 봉쇄하면 마법의 약화는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싸움의 핵심이다. 이게 되면 이기는 거고, 안 되면 힘든 싸움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