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23화
8장 피의 속성
“으윽!”
여자 광대의 움직임은 속도로만 보면 크리드 경보다도 빨랐고, 나는 반응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내 뒤로 돌아와 머리와 팔을 꺾은 여자광대는 그대로 내 목을 물었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결계로브는 뱀파이어는커녕 뱀파이어 할아버지가 와도 흠집을 낼 수 없다.
“아니, 뭐 이리 질겨?”
사실은 질긴 게 아니라 이빨이 아공간으로 들어가 버린 거지만 그렇게 느낄 뿐이다. 결계로브의 방어력이 무한인 이유는 모든 공격을 아공간 속으로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에잇!”
나는 힘을 주어 여자 광대의 팔을 풀고 오히려 여자 광대의 목을 졸랐다. 상대가 빠르니 붙잡고 승부를 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여자 광대의 힘도 나와 거의 비슷해서 우리는 서로 목을 조르며 드잡이 질을 하는 상태가 되었다.
“놔랏!”
퍽퍽
여자 광대가 발로 나를 찼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힘을 주어 목조르기에 집중했다.
“너와 나의 차이는 바로 이거야. 넌 아무리 내 목을 조르고 물어뜯고, 발로 차도 난 괜찮거든. 하지만 넌 목이 조이면 괴롭잖아?”
“이 괴물 같은 놈!”
거 참, 괴물한테 괴물이라고 들으니 기분이 더럽네.
말이 필요 없다. 나는 계속해서 힘을 주었고, 어느 순간 여자 광대의 목이 부드득 하고 뒤로 꺾이며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훗, 뱀파이어 중에 목이 졸려서 죽은 경우는 아마 네가 처음일 거다.”
나는 여자 광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까 그들이 들어왔던 벽 쪽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벽을 부쉈다.
붉은 벽돌로 된 통로의 구석구석에는 해골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강한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사의 해골이다. 저주로 인해 죽은 다음에도 마력이 유지되고 있는 모양인데, 나도 쉽게 알 수 없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진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기가 느껴진다.
“쯥, 마족의 계약자가 있는 건가?”
여기서 더 들어가면 죽는 경우가 있다. 마족의 계약자가 있다면 나 혼자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콜레스 2세도 그렇고, 난 왜 이리 마족의 계약자와 잘 만나는 거지?”
내가 푸념을 하자, 갑자가 통로 반대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건 그대가 마족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네.”
“누구시죠?”
나는 긴장을 하며 물었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나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의식을 집중하여 사방을 살피는 중이기 때문에 암살자라 해도 나의 감각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딱 보기에도 보통 인간이 아닌 것은 알겠다. 얼굴에는 하얀 가면을 썼는데, 이마에 난 두 개의 뿔은 장식이 아니라 진짜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족의 계약자. 이름은 다스 페론이라고 하지.”
“다스 페론은 이름이 아니라 페론의 수장을 부르는 명칭이죠. 이곳은 페론의 본거지인가 보군요.”
“우리를 아는군. 꽤 흥미로운데? 단순히 여행하는 마법사가 아니라 우리를 조사하러 온 건가?”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족의 저주를 받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저주라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또는 축복이라도 다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축복을 빙자한 저주도 있는 법이라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하는 것이다.
다스 페론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계약이지. 자네가 마족의 계약자에게 무엇인가를 받았고, 그걸로 어떤 능력을 얻었다면 그자와 계약을 한 게 되는 거지.”
무엇을 받았고, 능력을 얻었다니? 내가 언제? 마족의 계약자 따위와 타협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다. 있다.
생각해보니 웨어울프킹 샤날 백작은 나에게 자신의 심장보석을 건네주었고, 그 결과 나는 마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나한테 말하기를 자신이 실패했으니 다른 자들도 모두 처치해서 실패하게 만들라고 했지.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원래 모두 처치하려 했으니까 별 생각 없이 받은 건데 그게 계약이었군. 젠장. 그땐 너무 어렸어. 주의심이 부족했지.
고의는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계약을 했으니 능력에 상반되는 무엇인가 안 좋은 것도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인과율이 비틀린 건가? 내가 마족의 후계자와 만나기 쉽게 말이지.
“실수하긴 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네.”
나는 스스로 납득하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내가 마족의 후계자와 만나기 쉬운 운명이 되었음을 깨달았으니 조금 더 조심하면 된다.
일단 이 위기만 넘기면 말이지.
“그런데 왜 저한테 그걸 가르쳐 주죠? 다스 페론께서는 저의 피를 원하는 게 아닌가요?”
“원하네. 나 역시 계약을 한 뒤로 마법사의 피가 유일한 식량이 되었거든.”
“마법사와 깊은 원한이 있었나보군요.”
“우리 페론은 30년 전에 이미 한번 망했지. 마법사들에 의해 말이야. 모두 죽었고 나만 살았어.”
“저런.”
“이제는 마법사들이 모두 죽을 차례가 아닌가 싶네. 마나뱅크가 사라진 것부터가 마법사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게 아니겠는가?”
뭔가 시인틱한 느낌으로 말하네. 목소리도 맑으면서도 촤악 깔리고 말이야.
그런데 이자가 수장이라면 아까 여자광대보다 빠르겠지? 몸을 뺄 수 있을까?
이건 콜레스 2세 때보다 더 문제가 심각하다.
이자는 암살자,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나의 피다.
콜레스 2세는 나를 세뇌시키려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대화가 끝나면 바로 싸움이다.
도망갈 수 있을까?
아니지. 그냥 도망가면 안 된다.
지금 다스 페론을 놓치면 어디서 어떻게 찾을 지도 알 수 없다. 상대는 암살자이고 숨을 곳은 얼마든지 있을 터. 반대로 저쪽은 우리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
심볼 마크!
심볼 마크를 찍어야 한다. 그것은 6레벨 마법인데 대상에게 찍으면 위치탐색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인증마법이다.
그걸 한 번 찍으면 절대로 숨을 수 없다. 적어도 반년간은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걸 찍게 상대가 가만히 있느냐 하는 거다.
저놈이 심볼 마크 마법을 모른다면 조금 가능성이 있겠지만, 마법사에게 원한을 느낀 자니 마법에 대한 연구도 했겠지?
나는 속으로 궁리를 하면서 일단 지팡이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창날을 꺼내고 싶은데, 지팡이 창은 렌이 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기에 다스 페론도 나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같은 이유로 뿌우도 못 부른다.
그나저나 마리포즈는 어떻게 됐을까?
“제 동료는 무사한가요?”
“무사하네. 정확하게 말하면 탈출을 했지.”
탈출이라. 마리포즈가 나를 놔두고 혼자 도망갈 리가 없고. 아항!
뱀파이어를 보고 항구로 돌아갔구나. 항구에 있는 렉스를 데리러 간 거야.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 끌어보자. 렉스만 오면 어떻게든 도망은 갈 수 있으니까.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려요.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농담이군.”
휙
진짜 눈에도 안 보이게 빠르다.
내 팔과 머리는 또 다시 잡혀서 꺾였다. 목을 물어뜯기 좋은 고정자세인 것 같다.
콱
나는 목을 물렸다. 동시에 나는 상대의 팔을 뿌리치며 아까처럼 같이 마주보며 목을 졸랐다. 한 번 경험해보니 타이밍을 잡기가 더 쉬운 것 같다.
거인의 힘과 결계로브가 지금 내가 믿는 부분인데, 이게 이번에는 쉽지가 않다.
“크윽!”
“호, 입고 있는 로브의 힘이 대단하군. 아공간 결계를 두른 셈인가?”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어떻게 제 목에 압력이 전해질까요?”
“내가 마족과 계약해서 얻은 힘은 두 가지이지. 어떤 마법이나 마법적인 무구도 분석할 수 있는 지식, 그리고 모든 마법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특히 모든 마법을 무효화 시키는 건.”
“전부는 무리지만 대부분은 가능해졌지. 정확하게 말하면 무효화라기보다는 약화 시키는 거고.”
자신의 능력을 자신 있게 말하다니. 이건 상대가 인식하면 더욱 효능이 올라가는 능력인가보군. 실제로 내 목에 느껴지는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또한 지금 깨달은 건데, 내 자이언트 벨트의 힘이 거의 작동을 안 한다. 무효화 된 모양이다.
어디보자. 상황이 급하면 급할수록 냉정해야지.
나는 차분하게 내가 지니고 있는 물건들 중 아직 기능하는 것들을 체크했다.
결계의 로브는 영향은 받아도 충분히 버티고 있다. 하긴, 궁극마법으로 만들어진 무구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지팡이는? 절반 정도 기능이 사라졌지만 뿌우의 힘으로 완전히 무효화 되지는 않았군.
그 외에 침묵하는 모자는 어차피 기능하나마나 한 거고. 이놈이 언제 다시 입을 열려나.
그 외에는 품속에 있는 발더스 스팅이 괜찮을 거다.
진짜로 거의 모든 아이템의 기능이 사라졌다. 이러면 내가 이자를 상대하기 힘든데 말이야.
“나야말로 이상하군. 네 힘으로 무효화 시키지 못할 수준의 로브라니? 넌 도대체 누구지?”
“대답을 들으려면 목 좀 놓고 말하죠.”
“아니, 그냥 죽인 후에 피를 다 빤 후 생각하지. 지금 며칠이나 굶어서 배가 너무 고프거든.”
입맛 다시지 말란 말이다. 이 괴물아.
나는 이를 악 물고 지팡이에서 창날을 꺼내며 있는 힘껏 다스 페론의 아랫배를 찔렀다.
팍, 바지지지직
“크읏, 대단하군. 뇌전이 흐르는 창이라니?”
깊숙하게 박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스 페론에게 타격을 주는 데는 성공했다. 나는 그 틈에 얼른 몸을 빼내어 통로의 구석 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러면 뒤를 잡힐 일은 없고, 앞에는 지팡이창으로 방어를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자.
“뇌전이 흐르는 지팡이 창이라, 내 힘으로도 무효화가 안 되는. 그렇군. 자네가 바로 렌 경이로군. 하하하.”
“그래요. 제가 렌입니다. 당신들을 모두 처치하겠다고 맹세한 몸이지요.”
“맞아. 맞아. 자네라면 마족의 계약자들의 저주를 받을 만 해. 어째서 데빌베인에게 몇 명이나 되는 경쟁자들이 그렇게 쉽게 발견되고 제거됐는지 이제 이해하겠군. 자네라는 운명적인 계약자 탐색인이 있었기 때문이야.”
“저도 지금 이해했어요. 어쨌든 또 한 명을 찾아냈으니까요.”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다스 페론의 기세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손 떨고 있나? 손은 떨지 말자. 제발.
다행히도 나의 9서클 대마법사의 정신력은 육체를 훌륭히 제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