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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22화 (122/250)

로엔의 마나뱅크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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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롬은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도시 중 하나이고, 아주 옛날에는 해적들의 본거지였다가 인근의 왕국들에 의해 토벌당한 후,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세 왕국들이 모두 할롬의 소유권을 주장해서 결국 해군들의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는데, 엄하게 해적 토벌에는 끼어들지 않았던 슈로슈 왕국이 비축해 두었던 무력선단을 동원하여 사로 싸우느라 약해진 세 왕국을 누르고 할롬을 차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 세 왕국의 연합군에게 결국 슈로슈 왕국은 망했고, 마침내 할롬은 세 왕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무역항구가 되었다.

그 결과 세 왕국은 인근 왕국의 해상 무역에 우위를 점하며 강성해졌고, 서로 싸우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는 일은 안 해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다.

현재 할롬의 실질적인 지배권은 세 왕국 중 하나인 사카진이 쥐고 있다.

사카진의 그로날 백작이 20년째 상회 연합의 수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로날 백작은 능력은 둘째 치고 성품은 결코 좋은 자가 아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바람 속에 섞여 들어오는 냄새가 술과 곰팡이. 그리고 피의 그것이다.

항구에서 소금 냄새나 생선 비린내보다 다른 게 더 진하게 느껴지다니, 도대체 할롬이라는 항구는 어떤 상황일까?

“렌 경, 이상해요.”

마리포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항구를 관리하는 마법사가 한 명도 안 보여요. 아까 배에서 내릴 때에도 마법사의 검사가 없었고요.”

“어! 정말.”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먼저 마법사가 와서 사람과 물품들을 조사한다. 마법을 이용해서 쉽고 빠르게 밀수품이 있나 없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탑의 수입원 중 하나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모든 항구에서 예외 없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탄 배에는 마법사가 검사를 하지 않았다. 난 그때 선실에 있었지만 탐색마법을 사용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렉스는 지금 화물로 된 큰 상자 안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걸 마법으로 처리해서 마법조사에 걸리지 않게 해 놓은 상태이고, 입국 수속이 끝나면 마차와 렉스가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 여행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법사가 없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일이다.

“일단 마법사들이 있나 찾아보자.”

“그게 좋겠어요.”

렉스와 마차를 꺼내면 도시 내에서 움직이는 게 쉽지 않다. 우리는 하루 정도 둘이서 조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파견마법사들은 주로 가장 번화한 곳에 숙소가 배정된다. 나는 도시의 중심지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주변에 수상한 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길을 막았다.

“마법사님, 우리 길드장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시니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시죠.”

건달은 아니다. 선원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눈매가 날카롭고 몸놀림을 보아 상당한 수련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내가 눈치 채기 전에 골목의 앞뒤를 막은 것을 보면 이놈들은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나저나 마법사님이라.

내 의상을 보고 알아차린 거로군. 그리고 지금 이 항구는 마법사가 들어오기만 하면 이런 식으로 납치를 행하는 거고.

“모두 몇 명이지?”

“열여섯 명이예요. 앞에 여섯, 뒤에 여섯, 건물 위쪽에 넷.”

“위쪽까지 막았단 말이지?”

마법사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좁은 골목길의 앞뒤뿐 아니라 상당한 높이의 지붕위에도 사람이 배치되었다. 위에 있는 자들은 석궁과 그물 같은 것을 쓰겠지.

마법사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서 도망가는 것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플라이 마법은 3서클이니, 이놈들은 3서클 마법사까지는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네.

마리포즈에게 정리하라고 하면 1분 거리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나와 마리포즈의 힘을 가늠하지는 못했다. 그냥 배에서 젊은 마법사가 보디가드인 걸로 보이는 기사와 내렸다고 하니 온 거다.

나는 대충 견적을 잡아보고는 태연하게 말을 했다.

“무슨 길드인지 물어도 말을 안 해주겠죠?”

“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갈까? 말까?

“내 기사가 같이 가도 되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길드장님의 방에는 혼자 들어가셔야 할 겁니다.”

일단 데리고 가는 것까지는 신사적으로 하려나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안내하세요.”

“그럼 이쪽으로.”

옆으로 난 길은 할렘가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항구의 지도는 마리포즈에게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숙지한 바 있다. 마리포즈는 숙지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외웠을 테지만.

우리는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다가 허름한 건물 속에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오는 등 복잡한 경로로 길안내를 받았다.

그래도 마리포즈에게는 절대적인 위치감각이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지만 이들은 마리포즈가 인공자아인줄도 모르니 열심히 노력을 한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지요.”

꽤 화려한 건물이다. 주변의 허름한 집들과는 확 다른, 최고 번화가에 있어야 할 만한 수준이다.

그곳은 고급 살롱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면 넓은 복도에 붉은 융단이 깔려있고, 맞은 편 쪽에는 젊고 예쁜 아가씨 몇 명이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이 아닌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같은 느낌의 방이었는데, 몇몇 남자가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붙었다.

이자들 역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이건 뭐, 찾아보기도 전에 저쪽에서 마중 나온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전개가 빨라서 좋네. 훗.

“기사분은 여기서 대기하시고, 마법사님은 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럼, 마리야. 다녀올게.”

이건 옛날에 혼약 문제로 영지를 가출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난 들어가면 죽든 잡히든 할 것이고, 마리도 기습을 당하게 될 거다.

마음대로 하라지.

일단 아직까지는 저쪽이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중이니 상황을 살펴보자.

내가 최종적으로 들어간 곳은 아무것도 없이 사방이 하얀 칠을 한 빈 공간같은 방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뒤쪽에서 저절로 문이 닫혔고, 방 전체가 그그긍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듯하다. 방을 통째로 움직이다니, 그것도 마법이 아니라 기계적인 작동방식인 것 같다.

철컹

드디어 방이 움직임을 멈추자 맞은편 벽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몸에 딱 붙는 물방울무늬의 옷에 나비 가면을 쓰고,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광대차림의 남자였는데, 양손에는 긴 송곳을 들고 있었다.

“할롬에 어서 오십시오. 마법사님.”

“제 이름은 레빙입니다. 그런데 저를 무슨 이유로 데려온 것이죠? 마법사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 항구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의 허락은 받았나요?”

“죄송하지만, 쯔쯔, 이미 할롬에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지금 제 눈앞에 서 계신 레빙 경이 유일한 마법사라 할 수 있지요.”

“마법사들이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알고 보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우리 길드의 멤버들은 피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거든요. 쯔쯔, 몸 안에 피가 아니라 남의 피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 높으신 분들 몇은 마법사님들의 피가 필요하죠. 마법사님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느끼니까요.”

“뭣! 그럼 나를 여기 데려온 이유가.”

“예. 피를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드리려는 겁니다.”

광대가 웃는다. 그리고 그 광대의 입속에 있는 어금니가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심한데? 나는 급히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며 지팡이로 몸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뱀파이어는 힘과 속도가 인간의 서너 배에 달한다. 이게 말이 서너 배지 실제 싸워보면 이쪽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틈도 없이 죽는 수가 있다.

쉬익

역시 웃자마자 바로 달려드는군. 그것도 직선 돌진이 아니라 벽을 박차며 단숨에 허공을 날아 내 뒤쪽으로 접근한다.

“합!”

내가 몸을 비틀며 지팡이로 상대를 때리자 광대는 손으로 지팡이를 막았다. 마법사가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냐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난 거인의 힘을 지녔고, 힘만이라면 뱀파이어 광대보다 위다.

뿌득

“크악!”

광대는 팔뼈가 부러지자 비명을 지르며 다시 벽을 차며 허공을 날아 이동했고, 나는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대고 주문을 시전했다.

“라이트닝 필드!”

바지지지지직

방안이 뇌전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나는 뿌우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지만 광대는 다르다. 그는 순식간에 전신이 그을리고 옷이 불에 탔다.

그리고 이 마법은 순간 공격마법이 아닌 지속형 범위마법이기 때문에 뱀파이어의 재생력도 소용이 없다.

광대는 몸이 타는 것과 재생하는 것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곧 갑자기 라이트닝 필드가 사라지며 벽이 열렸다.

“생각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로군요. 얼마나 맛있는 피를 지녔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여자 광대다. 이 방은 광대가 컨셉인가?

겨우 고통에서 벗어난 남자 광대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면목없습니다.”

“쓸모없는 것. 꺼져라.”

남자 광대는 얼른 열린 벽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원래는 저놈이 당신을 잡아오면 천천히 맛을 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바로 식사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언제부터 이 항구가 뱀파이어의 소굴이 되었지?”

“오래 되었답니다. 단지 지금까지는 들키지 않게 마법사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마나뱅크가 사라진 지금, 우리가 마법사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미소 좀 짓지 마라. 어금니가 보기 흉하잖아.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꽤 괜찮은 얼굴인데 말이야.

“마법사의 피를 마신다라. 뱀파이어가 순결한 처녀보다 마법사의 피를 선호하게 되었는지는 미처 몰랐군.”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마나가 깃든 피가 이렇게 몸에 좋은 줄은 저번 달에 처음 알았거든요. 이제는 보통 피는 마실 마음도 안 들 정도로 말이에요.”

여자 광대는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말을 하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 남자 광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고, 나도 미처 반응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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