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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21화 (121/250)

로엔의 마나뱅크 121화

*

혼약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다.

사실 혼약식을 주최한 곳은 내가 아니라 실비아 공주측이었는데, 아도리아 왕국에서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자국의 건재함을 알리고 싶었는지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더군다나 우리 영지 자체도 아름답게 정비가 되었기에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제국의 황성에 비교해도 될 만큼 번화한 모습을 보였다.

각 왕국의 사신들이 축하를 하기 위해 모인 점은 거의 왕실의 혼사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 하겠다.

아직 혼약식에 불과한데 이 정도라면 대체 결혼식은 어느 정도의 규모로 벌여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혼약식을 실비아 공주 측에서 주최했으니 결혼식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설마 결혼식 한번 하다가 영지 재정이 거덜 나는 건 아니겠지?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예식에 집중하자.

몰던은 내 부친 자격으로 참가를 했다. 하지만 그는 고위 귀족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기에 부친 석에는 앉지 않고 대신 파우스 스승님이 내 후견인이 되어 사람들을 상대했다.

10대 가문에서도 모두 선물을 들고 와서 축하를 해 주었고, 나는 미리 준비한 마법진과 정령 이론서를 답례품으로 주었다.

내 계획은 마법의 수준을 마나뱅크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이기에 슬슬 사람들에게 정령에 대한 정보를 풀어야 한다.

-지식을 원하는 자에게는 합당한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

마탑의 기본 이념은 마도가문이라는 장벽 안에 갇혀 서서히 잊혀졌지만, 이제는 다시 순수하게 마도를 탐구하는 자들이 나와야 한다.

7서클로 머물지 않고 정령과의 교류를 통해 더 위로 갈 수 있는 희망을 주면 고위마법사들이 쓸데없이 정치에 목을 매달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정치 따위를 하다가는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없다.

최고의 마법사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상황은 이제는 벌어지기 힘들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예외고.

혼약식도 약식 결혼식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맹세의 의식을 하고, 축하 연회도 3일에 걸쳐 이루어지게 된다.

혼약자인 실비아 공주는 3일간의 연회를 모두 참석해야 했는데, 원래 기사였던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그 가혹한 일정을 태연하게 소화해 냈다. 대단한 체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연회가 끝난 후에는 실비아 공주도 긴장도 풀어지고 체력도 한계에 달했는지 살짝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얼른 그걸 눈치 채고는 작은 목소리로 실비아 공주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빠져나가도 될 거 같은데, 잠시 안에서 쉴까요?”

“그래야겠어요.”

실비아 공주는 살짝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연회장을 몰래 빠져나와 휴계실로 들어갔고, 마리포즈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고생했어요. 공주.”

“렌 경이야말로 피곤하지 않아요? 3일간 거의 잠도 못 주무신 거 같은데요.”

“전 정령과 계약해서 쉽게 지치지 않아요.”

“정령과 계약하면 그런 효과도 있나요?”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어요. 반대로 자칫 잘못하면 몸 안의 엘레멘탈 밸런스의 균형을 잃을 수도 있기에 관리를 잘 해줄 필요는 있고요.”

“그렇군요.”

실비아 공주는 부럽다는 듯 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법사인 내가 어째서 지치지 않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저는 정령과 계약하기 힘들겠죠? 마법사도 아니고.”

말을 돌려서 묻지만 크리드 경이 정령과 계약한 것을 알기에 혹시나 하는 심정이 있군.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정령은 마법사 중 극히 일부, 그리고 크리드 경처럼 검을 수련해서 몸 안의 마나를 외부로 발현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기사만이 계약할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공주는 계약할 수 없어요.”

“알아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대신 공주는 민민포즈와 연결이 되었으니 검을 수련할 때 민민포즈로부터 마나를 주입받도록 해요. 그러면 아마 마나 발현의 시기가 조금은 앞당겨 질 거예요.”

“엣! 설마 그런 게 가능한가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공주에게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럼 다시 검 수련을 해봐야겠네요.”

“크리드 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고급 검형을 배워요. 현존하는 유일한 고급 검형을 그분이 익히고 있으니.”

“알았어요. 한 번 해 볼게요.”

실비아 공주는 나름 굳게 결심을 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래 실비아 공주는 나와 혼약 이야기가 나온 이후 기사 수련을 중지했다. 세상 남자들 중 칼질 잘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고, 몸에 근육이 너무 많아도 몸매가 안 살기 때문에 요 몇 년간 근육을 빼는 작업을 해 왔다.

그야말로 남자에게 맞추는 아름다운 공주로써의 역할과 외모를 가꾸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사업도 도시미화 사업같이 나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남들에게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근래야 내가 실비아 공주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그녀는 기사로써 수련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 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비가 공주가 전신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여기사가 되지는 않을 것 같고, 몸매 관리도 알아서 하겠지.

사실 고급 검형을 수련하다보면 몸의 마나를 잘 조율하게 되면서 오히려 몸매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다.

내 전생에서 만난 유명한 여기사 몇 명은 확실히 그랬다.

마침 크리드 경도 영지에 머물러야 하니 차분히 가르침을 받게끔 하자. 그래야 실비아 공주도 나 없을 때 심심하지 않지.

나는 실비아 공주에게 고급 검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그녀의 의욕을 더욱 끌어올렸다. 비록 대화내용은 검법에 대한 조금 딱딱하고 살벌하기까지 한 이야기였지만 둘이서 피로를 풀어주는 허브티를 마시며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제 연회를 마무리 하러 나가죠.”

“예, 렌 경.”

이제는 예전처럼 차가운 기색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귀여운 표정의 실비아 공주에게 나는 가볍게 키스를 해 주고 손을 잡은 채 휴계실을 나섰다.

*

혼약식이 끝나면 바로 결혼식의 준비에 들어간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거기다가 예정대로 우리 영지는 정식으로 국경무역도시의 허가를 받고 도시의 이름도 정해졌다.

미스틱 게이트

이것이 우리 도시의 새로운 이름이다. 곧 영지전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주는 미스틱 엑스이지만, 나 렌이 정식으로 영지 대리인이자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더불어 아도리아로부터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볼스테어측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은 상태이지만 백작인 미스틱 엑스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사실 상 백작의 작위가 보장된 셈이다.

무역도시의 사업은 파우스 자작가에서 관리해 주기로 했다.

사실 파우스 자작가의 후계자도 나이기 때문에 그곳의 집사와 가문 직속의 상인들은 모두 나를 소주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내가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고, 또 이번에 정식으로 국경무역도시의 관리를 맡게 된 것에 크게 기뻐했다. 파우스 상단이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상단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당연하지. 왕국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아니 제일가는 상단이 되어야 내 체면이 사는 거다.

나는 그들이 보내온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승인해 주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는데, 당분간은 이들에게 맡겨도 될 것 같다. 나중에 포트라하고 다시 손을 잡게 되면 포트라에게 사업 계획을 짜라고 해야지.

인간보다 더 사업계획을 잘 짜고 철저하게 영업을 하는 포트라는 정말 훌륭한 대정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비아 공주는 일단 도시 미관 사업에서 손을 떼고, 크리드 경에게 검법을 사사 받기 시작했다. 대신 몰던이 모든 사업을 이어받아서 일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몰던도 용병처럼 가죽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고 정장을 하고 다니는 데 익숙해져서 누가 보면 귀족 출신의 사업가라고 봐줄만 했다.

“아들이 출세했으니 아버지인 나도 신분을 맞춰야지. 네 체면을 구기면 안 되지 않겠니. 하하하하.”

몰던은 나를 위해 점잖게 행동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귀족부인 중 한명과 몰래 연애중이다. 불륜은 아니고 미망인인데, 온순한 성격에 어린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 삼십대 중반의 여인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나한테 새엄마가 생길 지도 모르겠다. 동생들하고 말이지.

나쁘지 않다. 이게 내가 바라던 행복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마족의 후계자 문제가 아직까지 남아있지만, 우리 영지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불안에서 멀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쨌든 복잡했던 혼약식 이후의 일처리를 서둘러 끝내고, 나는 계획대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사람들에게는 미스틱 엑스의 지시에 의해 혼자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설명했을 뿐, 어떤 일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암살자 길드를 털러 간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여행과 다름없는 일이라고만 말했다.

“그럼 출발을 하자.”

“예, 렌 경.”

마리포즈는 렉스의 목띠를 조작하여 투명마법을 가동시켰다. 서피는 내가 탄 마차 아래에 따로 이중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마법진을 설치해서 서피가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마차가 서피의 임시 집이고, 서피는 마차의 수호수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은 현혹마법으로 렉스와 서피의 기운을 느껴도 공포에 빠지지 않게 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마리포즈가 이두 마차를 몰아서 길을 가는 것으로만 보인다.

우리는 관도를 따라서 계속 이동하여 볼스테어의 국경을 벗어난 후 다시 항구로 향했다. 역시 장거리 이동에는 배를 이용하는 게 정석이다.

목표는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무역도시 할롬, 내가 아는 한 페론의 암살자들은 그곳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어쩌면 페론의 암살자 길드는 대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암살자 조직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들이 아직도 할롬에 본거지를 가지고 있을까?

본거지는 몰라도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겠다.

할롬 정도 되는 도시에 암살자 길드가 없을 리가 없으니 거길 털어보면 답이 나오겠지.

나는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서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할롬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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