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17화
6장 호수의 거인
실비아 공주는 얼마 전 새롭게 숙소를 옮겼다. 예전보다 훨씬 좋은 저택이고, 영주관과의 거리도 가깝다.
예전 숙소는 그녀의 도시 미화 사업을 위한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실비아 공주는 낮에는 거의 하루 종일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오늘은 내가 간다고 미리 전갈을 보냈기에 조금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와 있었다.
“어서 와요.”
실비아 공주는 직접 현관 앞까지 나와 나를 맞이했다. 연두색의 이브닝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실비아 공주는 나이가 나보다 연상이고 동안도 아니라는 것에 부담을 가졌는지 어느 정도는 어려 보이는 의상을 하려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성숙한 여인의 느낌이 팍 하고 풍겨온다고 할까?
그야말로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음, 그녀 나름대로 내 취향을 분석했나보다. 내가 어린 여자애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이지.
아무튼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실비아 공주에게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칭찬을 해 준 뒤 같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황금빛 샹데리아의 불빛이 거실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촛불과 마법 조명을 같이 사용하여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확실히 왕실쯤 되니까 꾸미려고 마음먹으면 화려의 극치를 보여주는군.
나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고, 실비아 공주는 내 옆에 앉았다.
이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의 거리인 것이다.
하녀가 차를 내오고 나가자, 거실에는 우리 둘 만 남았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얼른 실비아 공주에게 말을 건넸다.
“사업을 잘 되는 중인가요?”
“어차피 이득을 보기 위해 하는 사업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손해도 보지 않고 있어요. 이번에 외곽에 흐르는 연못을 중앙광장 근처까지 끌어오는 일을 했는데, 몰던 경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물을 끌어와 인공 개울을 만드는 거군요. 확실히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겠네요.”
“미리 예정지 주변에 있는 집들을 몇 채 사 놨어요. 그걸로 공사비를 충당했는데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집이 팔리더군요.”
“하하하, 공주님도 이제는 사업가 다 됐네요.”
미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변 집들을 사서 이익을 내다니. 이 여자 돈 버는 감각이 있네.
다행이다. 원래 공주라는 신분은 돈을 펑펑 써대고 벌지는 못할 거 같은 선입관이 있는데 실비아 공주는 예외인 모양이군.
“그런데 수로를 어떤 식으로 끌어다 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체 구조도가 보고 싶네요. 내일 사무실로 갈까요?”
“그거라면 여기에도 있어요. 잠시 만요.”
실비아 공주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한 장의 도시지도를 들고 왔다. 집에까지 이게 있을 정도면 정말 하루 종일 일을 하나보군.
나는 도시지도를 펴고 수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앞으로 작업해야 할 계획도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중앙광장을 한 바퀴 빙 둘러서 수로를 팔 생각인 것 같았다.
지도로만 봐도 이게 완성되면 우리 영지가 아주 우아하고 멋있는 느낌이 팍팍 들 거 같다.
주변은 그리 험하지 않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으로 수로가 들어와서 중앙광장 외곽을 둘러싼 형태다.
수로 주변에 아름다운 2, 3층 저택들이 들어서는데, 이것들 대부분은 1층을 가게로 쓸 수 있는 주상복합 건물이다.
나라고 해도 이 건물들은 산다. 영지의 최고 상업지역인 중앙광장 주변 건물인데다가 하나같이 예뻐서 사람이 알아서 모일 거다.
원래는 실비아 공주를 칭찬하고 아부하기 위해 이걸 보자고 했는데, 진짜 감탄할만한 구석이 있다. 어쩌면 우리 영지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근데 잠시만. 이거 괜찮은데?
지도를 보던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집중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외곽에 엘프의 힘이 깃든 숲이 있고, 그 안쪽에 농지가 있다. 그리고 다시 집들이 있고 수로가 원형으로 만들어진다.
이거 마법진 형태잖아!
삘이 왔다. 도시 사이즈의 마법진, 그것도 사람과 엘프, 그리고 정령의 힘이 모두 들어간 마법진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주, 여기 광장 중앙에 작은 호수를 만들 수 있죠?”
“호수요?”
“땅은 파 줄게요. 사방의 수로에서 지하를 통해 물이 흘러들어오게 만들어서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직선 통로가 아닌 나선형 지하수로를 파라는 거네요.”
“맞아요. 이렇게 만들어줘요.”
“알았어요. 몰던 경과 상의해서 시행할게요.”
“그래요. 그럼 전 잠시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오늘은 일단 갈게요.”
“아, 저기요. 일단 식사라도…….”
“정말 죄송해요. 진짜 급한 일이라서.”
실비아 공주의 서운한 눈빛이 마음에 걸리기는 한데, 지금 떠오른 생각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생각난 김에 설계도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즉시 영주관으로 돌아와 내 방에 있는 연구실로 왔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사방에 방어 결계를 치고 마리포즈와 함께 설계도 작성에 들어갔다.
“대형 골렘을 만들자는 말씀이신 거죠?”
“응, 그걸 호수 속에 넣어두고 마법진을 이용해 평소 마나를 계속 충전하면 유사시에 쓸 수 있을 거야.”
“확실히 이정도 규모의 마법진이면 대형 골렘 하나는 충분히 돌릴 수 있겠네요.”
“그렇지? 거의 내 연구실 수준의 마나를 꾸준히 생성할 수 있을 거야. 그것도 마법진 안, 그러니까 도시 내부에서만 움직일 수 있게 해 놓으면 마나소모도 많이 절약될 거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크기의 골렘을 제작하실 건데요?”
“대략 콜레스 2세 정도 크기?”
“힘하고 내구도도 그 정도로 보시는 거예요?”
“그래, 어때? 만들면 제대로 기동할 거 같아?”
“잠시 만요. 계산 해 볼게요.”
마리포즈는 눈을 감고 연산능력을 최대한 올려서 내가 구상한 대형골렘의 작동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 눈을 뜨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잘 될 거 같아요. 자아만 적당하면 적어도 영지 내에서는 상당한 힘을 발휘하겠네요. 그런데 지금 렌 경은 제대로 된 자아를 못 만들지 않아요?”
“응, 8서클이면 몰라도 7서클이면 아직 힘들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민민포즈가 있잖아.”
“옛? 민민을 대형 골렘의 자아로 만든다고요?”
“솔직히 불안했거든, 너와 민민이 같은 몸을 쓴 다는 것을 말이야. 그거 서로 영향을 계속 받게 되면 좋은 것보다 나쁜 게 많다고.”
“그래도…….”
“지금 민민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은 거의 가르쳤지?”
“네.”
“그럼 민민에게도 독립된 육체를 만들어 주는 게 좋아. 괜히 마나뱅크의 서브자아 노릇만 시키면 감정이 거의 사라질 테니까 말이야.”
“알았어요. 렌 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민민도 기뻐할 거예요.”
당연히 기뻐하지. 모든 자아는 자신의 육체를 원하게 되어 있다고. 육체 없이 자아만 있는 게 얼마나 공허한 건데.
“어쨌든 그러면 민민의 이미지에 어울리게 여성 형 골렘으로 만들고, 활동 영역을 이 도시 안으로만 한정하자고. 말하자면 도시의 수호신이 되는 거지.”
“좋네요. 렌 경이 설계도를 만들면 바로 작업에 착수할게요.”
“그래. 그럼 난 재료를 모아야겠군.”
재료를 어디서 모으냐고? 당연히 덴판 제국으로부터 공수 받는 거지. 이번에 제법 큰일을 처리했으니 보수는 받아야 하잖아.
그날 부터 나는 3일 동안 밤을 새서 설계도를 그렸다. 오랜만에 그려보는 제대로 된 골렘 설계도라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한 번 삘을 받은 이상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가 불타는 나에게 있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4일째 해가 뜰 무렵, 나는 설계도를 완성하고 크게 웃었다.
“이거야. 수호골렘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육체는 나오기 어려울걸.”
드루이드 링의 거석들이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라면 하늘도 날아다닌다. 골렘이 걷고 뛰는 것은 오히려 쉽다고 할 수 있다.
마리포즈도 설계도를 검토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민도 기뻐하네요. 어서 만들어 달래요.”
역시 민민은 자기 육체를 가지고 싶었던 거지. 언니 앞에서야 평생 같이 살자고 말을 하지만 자아 마음이 그게 아니거든.
이번 골렘의 이름은 민민브이다. 내가 만든 골렘 중 가장 큰 대형골렘이고, 도시 전체를 마법진화 시켜서 마나를 공급하고 활동영역을 제공함으로써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민민포즈는 민민브이의 자아인데 평소에는 마리포즈의 육체 속에서 마나뱅크의 서브자아 노릇을 하다가 도시가 침공당하면 민민브이로 옮겨가서 그것을 움직이게 하기로 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민민이 마나뱅크의 서브자아이기 때문이다. 마나뱅크를 이용하면 대륙의 어느 곳이라도 바로 연결을 할 수가 있으니 나의 게이트 중 하나를 민민브이에 연결해 놓으면 된다.
“이야, 마나뱅크의 효능이 또 하나 늘었네. 자아의 이동이 자유롭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기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게 그렇게 좋은 거예요?”
“나중에 여유가 되면 민민브이의 서브바디를 몇 개 더 만들어서 요충지에 설치하는 거야. 그러면 민민이 필요할 때 필요한 바디로 들어가서 조종을 할 수 있잖아.”
“아! 자아 하나로 몇 개의 육체를 움직일 수 있겠군요.”
“응,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힘들지만 대형골렘을 필요할 때 바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지역은 거의 난공불락의 성이 되는 셈이니까 말이야.”
“대형골렘을 양산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적어도 일일이 자아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자금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한 일이야. 아무튼 이번이 첫 제조니까 최대한 좋은 대형골렘을 만들어보자고.”
“예, 내일부터 바로 작업 들어갈게요.”
역시 마리포즈는 좋은 비서이자 내 대리 제작자다. 대충 설계도를 그리고 명령을 내리면 알아서 완성단계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민민의 독립된 육체이자 우리 영지의 수호신이 될 대형골렘의 제작에 들어갔고, 실비아 공주는 내가 갑자기 가버린 후 영주관에 틀어박혀서 며칠간 나오지도 않은 것을 꽤 섭섭해 하면서도 성실하게 도시 전체의 수로 공사를 진행해 나갔다.
겉으로는 미관 사업이지만 사실은 대규모 마법진을 구축하는 수로와 인공호수 공사는 영지내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착착 진행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