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12화
본거지는 본거지다.
드루이드 링을 이루는 바위가 모두 24개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둥으로 삼아 넓적한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얹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돌로 만든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쉽지 않겠군.”
이반 경이 긴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쉽지는 않지. 내가 보기에 숲의 마법의 중추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만약 이곳을 철저히 파괴한다면 숲의 마법 자체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각 기둥마다 녹색의 로브를 입은 섀도우 드루이드들이 딱 붙어서 무언인가 주문을 외우고 있다.
나는 일단 귀를 기울여 저들의 주문을 들어보았다. 복잡한 룬어의 조합과 엘프어, 그리고 드루이드의 전승언어가 섞인 주문이라 보통 마법사라면 바로 옆에서 들어도 절대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나는 대충 이해가 갔다.
“동화? 설마 바위와 동화를 할 생각인가!”
드워프도 아니고 엘프가 무슨 바위와 동화를 한다는 거지?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동화가 성공한다고 해도 나무와 바위는 서로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나무는 살아있고 바위는 죽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목과 동화한 자가 있었지. 스스로 언데드화 한 것처럼 악령의 나무가 되어 죽음을 전제로 우리와 싸웠다. 이들 역시 스스로를 희생시켜 드루이드 링과 일시적인 동화를 할 계획이로군. 그럼으로써 숲의 힘을 일시적이나마 완벽하게 자신들의 의도대로 쓸 계획이야.
나는 섀도우 드루이드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 조금 이상하다.
바위와 동화하려는 자들의 눈동자가 흐릿하다. 거의 흰자만 남은 듯 한 모습이다.
그들은 이성을 상실한 채 주문을 외우고 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드루이드 링 위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엘프를 보았다. 그자는 두 손을 하늘로 뻗어 올린 채 기도하듯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마력의 끈이 느껴진다. 그자로부터 기둥에 붙어있는 엘프들에게 끈이 이어져 있다.
“조종하는 건가? 의지를 왜곡시켜서 명령하는 것을 스스로의 의지라 믿게 하는 거군.”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자가 누군지 알겠다.
와테스, 바로 섀도우 드루이드의 수장이다.
버서커를 만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의 의미하는 버서커는 단순히 광폭화 시키는 게 아니라 감정과 의지를 완벽하게 조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마법이든 능력이든 스스로의 의지로 모두 사용하고, 죽음의 공포도 잊은 채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마법에도 있다. 9서클의 앱솔루트 도미넌트. 절대지배라는 마법이다.
그러나 이걸 여러 명에게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능력이다. 아마 사전에 마법적인 의식을 행해 서로 합의하에 저런 관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와테스라는 칭호의 무게로 볼 때, 급하면 상대의 승낙 없이도 앱솔루트 도미넌트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틀림없다. 절대지배는 한 번 걸리면 끝이다. 1초 전까지 아군이었던 자가 철천지원수처럼 덤벼든다. 기본적인 인성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형제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반 경, 최고 등급의 정신보호 마법이 필요해요. 우리 전원에게 말이에요.”
“정신을 조종할 것 같은가?”
“제 예상이 맞다면 앱솔루트 도미넌트를 쓸 거 같아요.”
“이런, 그렇다면 무조건 정신보호에 만전을 기해야겠군. 하지만 우리 전원의 정신을 보호하라면 나는 다른 마법은 거의 못 쓸 걸세.”
“정령만 저한테 붙여줘요. 이반 경은 방어에 전념해 주시고요.”
“알았네.”
크와와와
섀도우 드루이드 중 몇이 우리를 발견하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야수의 포효소리다. 언어계열이 변해 버렸나보다.
“집단 투명!”
파앗
나는 우리 일행에게 투명 마법을 걸었다. 그래봐야 적들이 대응마법을 쓰면 다시 보이게 될 것이고, 격렬한 움직임이나 전투행위를 하면 저절로 깨어지는 저레벨의 마법이지만 잠시만이라도 적의 이목을 속이고 이동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선수필승!
크리드 경이 맨 처음 앞으로 나아가 드루이드 링의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뿌우야, 크리드 경을 서포트 해!”
“알았당. 맡겨둬랑.”
뿌우가 날아가 크리드 경의 등을 떠밀듯 바람을 불어넣자 그의 몸이 계속 허공을 걷듯이 그대로 와테스의 머리 위까지 날아갔다.
그러나 와테스는 크리드 경을 보고도 별 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오히려 와테스가 앉아 있는 바위가 검게 변하더니 틈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끼덩쿨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뻗어 크리드 경을 공격했다.
“어림없다.”
카카캉
크리드 경은 덩쿨의 송곳을 잘라내려 했지만 놀랍게도 덩쿨줄기는 금속성을 발하며 크리드 경의 검을 튕겨내었다. 저 정도 굵기의 강철봉이라고 해도 잘라냈을 터인데, 역시 드루이드 링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 사이 괴성을 지른 섀도우 드루이드들이 커다란 늑대인간으로 변해 우리에게 달려왔다. 눈이 붉게 변한 것이 이미 투명마법은 감지되는 듯하다.
“흙의 벽!”
불쑥
이반 경의 대지의 정령에게 명령을 내리니 땅에서 흙이 튀어나와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늑대인간들은 그 정도쯤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그대로 몸통박치기를 했다.
퍽, 퍼퍼퍽
역시 흙의 벽으로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돌의 벽!”
불쑥
이번에는 내가 마법으로 만든 돌벽이 세워졌다.
크와아아앙
늑대인간들은 거칠게 울부짖으며 다시 돌벽에 몸통박치기를 했다.
퍼퍽, 쿠쿠쿵
으와! 역시 애들이 힘이 좋네. 돌벽마저 깨다니. 그러나 돌벽은 흙벽처럼 허무하게 깨지지는 않았다. 몸으로 몇 번을 부딪쳐야 겨우 깨지는 수준이다.
그 바람에 늑대인간의 돌진이 멈춰졌다. 그리고 우리 쪽에는 늑대인간의 천적이 있다.
“가랏, 렉스!”
크오오오오
렉스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늑대라면 자다가도 이를 갈며 일어나는 게 렉스다. 특히 늑대인간, 그러니까 웨어울프는 그야말로 렉스의 원수라 할 수 있다.
내가 허락하자 렉스는 그대로 뛰어올라 아직 깨어지지 않은 돌의 벽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늑대인간 중 한 마리를 머리부터 상반신까지 그대로 깨물어 부숴버렸다.
꾸웅, 크오오오
마기로 변한 늑대인간이 아니라 맛이 없다는 듯 몇 번 씹고 툭 뱉어버리고는 다시 다른 놈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다른 늑대인간들도 흥분하여 일제히 렉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이빨로는 렉스의 털과 가죽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마리포즈가 대검을 휘둘러 쓰러진 늑대인간들의 숨을 끊었다. 렉스에게 선공을 맡기고 마무리를 마리포즈가 하는 식이다.
나의 시선은 여전히 크리드 경에게 향해 있다.
현시점에서 우리 측 최고의 공격수는 크리드 경이다. 그가 와테스와 결판을 내지 못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
문제는 와테스가 드루이드링의 중심에 앉아 있다는 거다. 그는 링의 힘을 조종하고 있을 터이니 원래는 크리드 경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와테스가 드루이드 링의 힘을 이용해 의식을 행하고 있기에 오히려 공격할 타이밍이기도 하다.
“크리드 경! 계속 밀어붙여요. 그자가 의식을 멈추고 경과의 싸움에 집중하게 만들어야 해요.”
“이자가 나한테 집중하면 그만큼 무서워지겠군. 하압!”
콰콰쾅
우와, 검으로 휘두르는 데 왜 폭발음이 들리는 거지? 저 양반이 검 한 자루로 마법을 쓰네.
내 전생에도 저런 강자가 몇 명 있었다. 그러나 지난 백 년 동안 마법사들에 의해 고급 검술이 사라지고 유능한 인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 제거당해서 검의 힘이 확연히 줄어든 지금 오직 크리드 경만이 시공의 격차를 줄이고 예전의 최강수준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어쨌든 크리드 경이 잘 싸워주니 이제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되겠다.
“서피! 드루이드링 하부에 있는 자들을 하나씩 빼내와.”
샤아아아아
서피가 내 명을 받고 허공을 날아갔다. 그리고는 바위와 융합하려는 자들 중 하나를 강제로 뽑아서 내 쪽으로 끌고 왔다.
몸 절반이 뜯겨나간 섀도우 드루이드는 이미 몸이 굳어서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멍한 눈으로 아직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자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그들이 외우는 주문과 몸 안의 마나를 조사했다.
드루이드의 마법은 신비하기 짝이 없다. 기존의 룬 마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다.
그것은 백마법이나 흑마법보다 더 이질적이라 마법사가 아무리 연구해도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9서클이 되어 마법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룬마법이든 흑백마법이든 드루이드 마법이든 결국 그게 그거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드루이드 마법도 분석이 가능해졌다.
“흐음, 과연, 독한 방법을 쓰려 했군.”
와테스가 지금 수하들을 희생시켜 벌이고 있는 의식의 정체를 알았다. 숲의 마법을 일시적이나마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속셈이다. 일단 의식이 완성되면 와테스야말로 불사지체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숲 안에서는 무적의 존재가 되어 콜레스 2세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었겠지.
“나쁘지 않은데?”
역시 조사와 분석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이반 경에게 말했다.
“이반 경, 힘들겠지만 저 위쪽으로 아이스스톰 한방만 날려줘요.”
“드루이드링 위쪽으로 말입니까? 크리드 경도 말려들 겁니다.”
“뿌우가 알아서 막아줄 거예요. 중요한 것은 와테스의 시선을 막아야 해요.”
“알겠습니다.”
이미 정신방어마법을 우리 전원에게 써서 마나의 여유가 없는 이반 경이지만 여기서 한방 날리지 못할 사람은 아니다.
이반 경은 코에서 한줄기 코피를 흘리며 주문을 시전 했다. 무리하긴 무리하나보다. 하하하.
“아이스스톰!”
휘리리리링 쏴아아아아
눈보라의 돌개바람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대지를 덮었다. 진눈깨비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살아있는 것들은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와테스는 물론이고 다른 섀도우 드루이드들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들은 엘프이기에 온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섀도우 드루이드들 자체가 마법방어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의 의도대로 시야를 가리는 역할은 충분하다.
“카모플라주!”
은신마법의 효과는 이렇게 시야가 제한될 때 최고의 효율을 발휘한다. 투명마법은 감지가 되지만 은신마법은 주의해서 보기 전에는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주변 환경과 동화된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앞에는 서피가 길을 뚫었기에 더더욱 나아가기 쉬웠다.
사실 이런 대형 마법의식을 준비하는 자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기습을 당하면 평소 힘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들의 의식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
따지고 보면 나를 숲에서 헤매게 만든 놈들이 바로 섀도우 드루이드들이다. 이제 그 빚을 갚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