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10화
4장 섀도우 드루이드
우리가 엘프 부족을 떠나니 실롯이라는 엘프가 나타나 미리아를 안내했다. 우리는 미리아와 거의 30미터쯤 뒤떨어져서 따라갔는데, 실롯은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로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다.
“엘프의 규칙이라는 게 참 엄격하군.”
크리드 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말로는 설명을 들었지만 정말로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엘프들은 나무의 줄기와도 같아요. 하나가 영향을 받으면 곧 전체가 흔들리죠.”
“그런가?”
“그래서 엘프들은 문제가 생긴 동료를 추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요. 추방당하는 쪽도 원망을 안 하고요.”
“추방당하면 거의 죽는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더한 사회적 동물이라, 추방을 당하면 정신적 고립감에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육체적, 외면적인 문제보다 그것 때문에 말라버리듯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래요.”
“슬픈 이야기군. 어떤 면에서는 지독하고.”
“그러니 저 실롯이라는 엘프는 지금 상당히 위험한 임무를 맡은 셈이에요. 자칫 우리와 접촉해서 영향을 받았다가는 추방을 당할 수 있어요.”
“그런 거군.”
“그런데 좀 이상한데.”
이반 경이 끼어들었다. 나는 즉시 긴장하며 되물었다. 이반 경은 지금 땅의 정령으로 지표면 아래의 감시를 하고 있다. 나무를 상대로 싸우려면 뿌리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
“뭔가 변화가 있나요?”
“땅속은 여전히 같아. 하지만 주변에 죽은 나무가 조금씩 보이고 있네.”
“정말 이상하군요. 섀도우 드루이드의 영역 근처에서 나무가 죽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요. 죽은 나무를 방치해 둘 리도 없고요.”
내가 소리 내어 의문을 표하자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미리아가 이 말을 듣고 실롯에게 재차 질문했다. 그러자 실롯은 미리아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이에요. 확실히 섀도우 드루이드는 나무를 죽게 놔두지도 않고, 죽은 나무는 결계를 쳐서 모습을 숨겨요. 아무래도 이 앞에 있는 드루이드 링에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서두릅시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니 지금 가야 해요.”
내가 길을 재촉하자 우리는 즉시 이동속도를 두 배로 늘였다.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거의 뛰다시피 서너 시간을 움직이니 상당한 체력이 소모됐지만 마침내 드루이드 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앗! 링이!”
미리아가 놀라서 외쳤다.
열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드루이드 링이 파괴되어 있었다. 바위는 모두 갈라져버렸고, 몇 개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긴장해서 주변을 살폈다. 살아있는 존재는 없었다. 섀도우 드루이드뿐 아니라 작은 생물도 하나 없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모두 죽어 있었는데 그냥 부러지거나 뽑힌 게 아니라 수액이 완전히 말라서 오래된 고목처럼 변했다.
나는 그 중에서 나무와 융합한 엘프의 잔해를 몇 개 찾았다. 그들 역시 완전히 말라붙은 나무와 같이 죽은 상태였는데, 매우 고통스러웠는지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나는 이반 경에게 물었다. 이 말은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안 간다는 소리다.
이반 경은 잠시 나무들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무엇인가가 나무의 수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은 것 같습니다. 섀도우 드루이드들이 이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으니 그들도 당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나와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시체도 없이 아예 사라진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설마 어디론가 끌려간 걸까?
내가 고민하는데 미리아가 와서 말했다.
“저쪽에 그들의 옷이 있어.”
“옷만 있다고?”
“응, 사람은 없어.”
“가 보자.”
과연 공터 한 구석에 나뭇잎으로 된 섀도우 드루이드들의 옷이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발자국은.”
“그게 발자국이야?”
“틀림없어. 이건 콜레스 2세의 발자국이야.”
“내 생각보다 덩치가 큰가보다. 무겁기도 하고.”
“으음, 그리고 보니 발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하네.”
미리아의 말대로다. 자세히 보니 내가 황궁을 탈출할 때보다 적어도 두 배 정도는 더 커진 듯 했다.
“설마 보물을 먹고 커진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 이정도면 거인의 크기라고 봐야 해.”
“문제는 그게 아니지. 지금 상황을 보면 콜레스 2세가 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저도 동감이에요.”
크리드 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섀도우 드루이드와 콜레스 2세 간에 갈등이 생긴 듯하다.
“콜레스 2세는 섀도우 드루이드를 못 죽이는 거 아니었어? 그들이 저주를 풀면 바로 죽어버린다고 했잖아.”
“섀도우 드루이드들의 주장은 그건데, 콜레스 2세가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가능성이 크겠네. 가령 흑마법으로 또 다른 저주를 걸던지 말이야.”
“그럼 섀도우 드루이드는 배신당한 거네?”
“애초에 마족의 계약자에게 뭘 바라면 안 돼. 어쨌든 서두르자. 콜레스 2세가 이 짓을 했다면 지금 그가 노리는 것은 마지막 드루이드 링일 거야.”
“그럼 어서 쫓아가자.”
“잠시만, 가는 건 가는 건데 여기 정리를 좀 해야 할 거야.”
나는 우선 드루이드 링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 그곳에 고여 있던 마력도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만 한 게 아니라 뿌리 채 뽑아 버렸다고 할까?
거기다가 상당한 마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이것도 콜레스 2세가 빨아먹은 것 같다.
“미리아야. 지금 이 땅 자체가 생기를 잃었어. 죽음의 땅이 된 건데, 숲의 힘으로 정화가 되겠지만 일단 마기가 퍼지는 것을 막자.”
“응. 내가 도울게.”
나는 드루이드 링 주변에 정화의 마법진을 그렸다. 이것으로 숲의 오염을 조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콜레스 2세가 여기 마력을 빨아먹어서 얻는 게 뭘까?”
이반 경이 물었다. 골렘이 된 육체에는 마나가 쌓이지 않는다. 싸우는 상황에서 파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마나를 비롯해 나무의 수액까지 빨아먹는 게 이상한 모양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크로드 경도 궁금한 표정이다.
“제가 본 흑마법서에 보면 피의 갈구라는 저주가 있어요. 아무래도 콜레스 2세가 스스로 그걸 쓴 모양이네요.”
“피의 갈구라, 처음 듣는군.”
“뱀파이어 계열의 강력한 흑마법이에요. 저주를 건 상대에게 거꾸로 저주를 거는 흑마법이죠. 대상의 모든 것을 빨아먹겠다는 맹세를 함으로써 기존의 저주를 벗어나는 거지요.”
“그렇다면 콜레스 2세가 섀도우 드루이드들을 모두 죽인다는 거군.”
“죽이면 죽일수록 콜레스 2세도 강해져요. 카운터 저주는 성공하면 흑마법쪽으로는 엄청난 축복이 되니까요.”
“쩝, 그럼 설마 섀도우 드루이드들을 보호해야 하는 건가?”
“모르죠.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콜레스 2세부터 어떻게 하는 걸로 해요.”
“그게 낫겠군.”
최소한 섀도우 드루이드들이 우리를 공격할 여유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콜레스 2세가 계속해서 강해진다는 게 어려운 점이다.
우리는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틀어졌지만 섀도우 드루이드의 본거지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길을 가다보니 실롯이 미리아를 통해 엘프의 전갈을 알렸다.
“뭐라고? 콜레스 2세가 섀도우 드루이드가 아닌 그냥 드루이드의 링도 파괴했다고?”
“응, 일단 그자가 진행하는 방향은 섀도우 드루이드의 본거지 쪽이 맞긴 하데. 하지만 도중에 있는 드루이드 링을 공격했고, 결과는 전에 본 것과 같아.”
미리아는 분노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하프엘프가 된 후 엘프를 가족으로 생각한다. 엘프 이외에는 미래의 애인인 나와 양부인 이반 경만 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사실 상 인간 중에는 친인이 없는 것과 같다.
“문제가 심각하네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정말 단순히 볼 일이 아니다.
“그자가 일반 드루이드 링을 공격한 게 문제야? 혹시 다른 드루이드 링도 공격할 거 같아?”
미리아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주의 의식을 진행하는 중에 한눈을 파는 것은 위험해. 내 예상이 맞는다면 콜레스 2세의 의식 속에는 섀도우 드루이드뿐 아니라 일반 드루이드도 포함된 거 같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콜레스 2세가 자신에게 저주를 건 대상을 어떻게 지정했느냐 거든. 엘프 종족 전체라고 지정하면 엘프를 멸종시켜야 해.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저주 완성이 그만큼 힘드니까.”
“그렇다면 드루이드 전체로 지정한 거야?”
“그것도 이상해. 섀도우 드루이드만 처리하면 되는데, 굳이 전체 드루이드를 건드릴 리가 없어. 그 정도 로면 의식의 성과도 별로 커지지 않거든.”
“그렇다면 결론은 뭔데?”
“뭔지는 모르지만 꼭 일반 드루이드를 포함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지.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다거나, 아니면 의식을 성공시켰을 때 성과가 비약적으로 커지던가.”
“인과관계 문제는 아닌 거지?”
“응, 콜레스 2세가 큰 걸 노리고 있어. 그런데 뭐지? 일반 드루이드를 의식에 포함시켜서 노릴 수 있는 큰 성과라는 게?”
이건 내가 알 수 없다. 오직 엘프 만이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리아에게 말을 했지만 사실은 엘프의 장로에게 물은 것이다.
미리아는 곧 실롯에게 가서 나의 말을 전했고, 실롯은 숲의 나무를 이용해 장로와 대화를 나누었다.
실롯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했다. 진짜 문제가 심각한가 보다.
곧 미리아가 달려와 말했다.
“드루이드 링은 기본적으로 숲의 힘을 조율하는 핵이라 할 수 있어. 그 힘을 모두 파괴하고 흡수한다면 숲의 마법이 깨질 수도 있데.”
“아하, 저주를 건 파워가 숲의 힘이니 그걸 적으로 규정한 거구나. 확실히 성공시키면 대단한 성과가 나겠는걸.”
궁극마법진인 숲의 마법을 깬다. 말하자면 그 힘을 통째로 흡수하는 것과 같다.
아마 이게 성공하면 콜레스 2세는 정말로 불사지체가 될 지도 모른다.
반면 숲의 마법이 파괴되면 엘프는 거의 멸종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실롯의 안색이 사색이 되는 이유를 알겠다.
“탐욕의 제왕다운 배포군. 대륙 최강국을 만든 황제다워.”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콜레스 2세가 워낙 구두쇠처럼 굴어서 좀 얕봤는데 이자가 그릇이 크긴 크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이반 경이 물었다. 상황을 모두 알았으니 이제는 확실하게 이쪽의 행동계획을 세울 수 있다.
“우리 움직임은 같아요. 섀도우 드루이드의 본거지로 갑니다. 어차피 결판은 거기서 내야 되요.”
“하긴, 거기서 기다리는 게 확실하겠군.”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곳에 도착하면 섀도우 드루이드와 싸워야 하지 않을까?”
“크리드 경의 말씀도 맞아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오히려 제가 드루이드 링을 흩어놓을 거예요. 콜레스 2세가 힘을 흡수하지 못하게요.”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의도한 건 아니지만 처음 섀도우 드루이드 링의 바위들을 흩어놓은 게 신의 한수였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그것들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봉인 비슷한 수법을 쓴 것은 나중에 엘프 장로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였는데, 콜레스 2세는 그 바위 하나하나를 모두 찾아야 할 거다.
숲을 미친 듯이 뒤져야 할 테지.
이것만으로 콜레스 2세에게는 한방 제대로 먹인 셈이다.
“그럼 어서 가지.”
“이번에야 말로 콜레스 2세든 섀도우 드루이드든 만나서 싸울 수 있겠군. 그동안 너무 헤매기만 했어.”
“안 싸우는 게 오히려 좋은 거일 수도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슬슬 결판을 내고 싶었다. 우리는 이번에야 말로 적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