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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06화 (106/250)

로엔의 마나뱅크 106화

콰콰콰쾅

겉보기는 바위 여덟 개에 불과하지만 이건 진짜 전략 요새 수준이다. 돌마다 각각 룬어가 새겨져 있는데 모두 다른 효과의 마법진이다.

땅의 정령이 바위의 힘에 밀려 이반 경 뒤쪽까지 튕겼다. 드루이드 링의 땅에 대한 제어력이 정령보다 더 강한 게 틀림없다.

“깨갱.”

렉스가 달려들다가 바위에 코를 부딪치고 비명을 질렀다. 환각에 의해 바위의 위치와 빈 공간의 구분이 안 되나보다. 서피 역시 쉭쉭 하고 위협만 하고 바위 근처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크리드 경만 드루이드 링을 넘어서 실라브엔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챙, 챙, 챙

실라브엔은 손으로 크리드 경의 공격을 막았다.

그동안 몰랐는데 지금 보니 실라브엔의 왼쪽 팔은 의수였다. 나무인지 유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재질이었는데, 처음 보는 물질이다.

크리드 경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물질은 아니겠지.

“어림없다. 하압!”

크리드 경은 자존심이 상한 듯 기합을 지르며 검을 정면으로 내질렀다.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빠르지도 않은 단순한 찌르기였다. 그러나 실라브엔은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팔로 막았다.

파캉

팔이 깨졌다. 그리고 검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실라브엔의 몸에 박혔다.

“쿨럭.”

실라브엔은 피를 토했다. 그런데 피가 녹색이었다.

크리드 경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피해 피가 몸에 묻는 것을 방지했다.

치익

역시 피는 강한 산성을 띠고 있었다.

순간 실라브엔의 몸이 스르륵 하고 녹으며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어딜!”

역시 크리드 경은 최상위 기사답게 한번 공격을 시작하면 표적이 제멋대로 벗어나게 놔두지 않는다. 그는 실라브엔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한 템포 먼저 몸을 낮추어 검으로 지면을 긁듯이 베었다.

“꺄악!”

실라브엔의 상반신이 미처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잘려나갔다. 그런데 막상 자르고 보니 녹색 피는 튀는데 사람의 몸이 아니라 나무로 된 조각상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싸운 실라브엔은 나무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라브엔이 잘리는 순간 여덟 개의 바위가 일제히 크리드 경을 향해 모여들었다. 묘한 압력결계가 쳐져 크리드 경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저기에 낑기면 크리드 경은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에잇!

나는 급히 지팡이를 던졌다.

쒜엑, 퍽

겨우 늦지 않게 지팡이가 바위 사이로 들어갔다. 뿌우가 뇌전의 힘을 최대한 강화해서 순간적으로 결계를 뚫은 것이다.

지팡이 일부분이 결계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구멍을 뚫은 것과 마찬가지. 그리고 안에 살고 있는 뿌우에게는 자유롭게 결계를 드나들 수 있게 된 셈이다.

“뿌우야, 크리드 경과 함께 벗어나!”

“뿌우!”

파지직, 쾅

뿌우가 크리드 경을 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실라브엔이 자신의 몸인지 나무인형인지 모르지만 그걸 미끼로 친 함정이 깨어졌다. 여덟 개의 바위는 서로 부딪쳐 하나로 뭉치려 비비고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저 돌들을 처리할까?

“이반 경, 저 돌들을 막아야 할 거예요.”

“알았네. 포스 큐브!”

바위가 뭉쳐진 주변에 투명한 육면체의 막이 생겼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구속 마법중 하나다. 드루이드 링이 무섭다는 것을 안 이반 경이 8서클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드루이드 링을 구성하는 바위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려 했지만 투명한 막에 갇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원래는 포스 큐브의 압력에 가루가 되어야 하지만, 8서클 마법의 힘으로도 드루이드 링을 파괴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상관없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돌들이야말로 실라브엔이 가장 믿고 있었던 무기이니까. 저걸 봉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충분히 극복해낼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주변을 경계했다. 사방에 수많은 생명체가 느껴졌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하얀 털을 가진 늑대들이다. 그것들은 보통 늑대보다 서너 배는 컸는데, 추운 지방에서 무리를 지어 사는 윈터 울프다.

그리고 허공 쪽에는 작은 벌레들이 윙윙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검은 색의 벌들이었는데, 이것들은 아무래도 마법적인 생물인 듯 추위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날았다.

“서피, 렉스, 저놈들을 막아라.”

컹, 컹

쉬익, 쉿

렉스가 늑대 무리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고, 서피가 허공을 날며 독마기를 뿌렸다.

쿵, 쿵

바위가 계속해서 포스 큐브를 부수려고 부딪치는데, 상태가 장난 아니다. 아무래도 바위 자체에 마법을 해제하는 힘이 있나보다.

“마리야, 포스 큐브에 계속 마나를 주입해.”

“옛.”

마리포즈가 달려갔다. 이미 시전된 마법의 힘이 해제되지 않도록 강화하는 것은 연구실의 자아였던 마리포즈만의 특기다.

그 사이 크리드 경이 내 앞까지 날아왔다.

“덕분에 살았네.”

“별 말씀을요. 일단 바위를 봉인하는데 성공했으니 어떻게든 버텨 보죠.”

“실라브엔이 가짜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가짜가 아니야. 저건 실라브엔의 일부 맞아.”

“그게 무슨 소리니? 미리아야.”

“아무래도 실라브엔이 그 사이 나무와 동화된 거 같아.”

“그렇군. 이미 나무가 됐단 말이지?”

“응, 아마 이 근처에 동화된 나무가 있을 거야. 그걸 뿌리 채 뽑아 버리면 실라브엔을 처치할 수 있어.”

미리아도 은근히 과격하네. 아무래도 실라브엔이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해 크게 화가 난 모양이다.

도움을 요청해서 기껏 도와주고 며칠 동안 여러모로 보살펴 줬는데 그게 다 속임수였다고 하면 나도 화가 나겠지.

“좋아, 크리드 경은 돌아다니면서 실라브엔을 찾아 주세요. 환혹마법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으니 아마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알았네. 꼭 찾아내지.”

크리드 경이 꼭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늑대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자, 이제 크리드 경이 실라브엔을 찾아낼 때까지 여기서 버티면 되는 거지?

대충 견적이 나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드루이드 링을 봉인하는 거다. 나머지 공격은 아직 우리에게 있어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드루이드 링은 척 보기에도 무섭고, 실제로 싸워보면 더욱 위험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뿌우야, 서피와 함께 하늘을 방어해줘.”

“알았당.”

철저하게 방어를 하기로 했다. 지금이라면 이 자리를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한번 물러서면 계속 물러서게 된다.

적은 우리가 서둘러 이동할 것을 전제로 함정을 팠을 테니까.

물러나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

어떻게든 실라브엔을 찾고 이 지역의 섀도우 드루이드들의 본거지를 찾아내고야 말겠다.

“이반 경, 도와주세요. 이곳에 마법진을 그려야겠어요.”

“무슨 마법진입니까?”

“탐색의 마법진이죠. 아까 드루이드 링이 움직일 때 허공의 마나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어요. 아마 땅으로부터 힘을 받아쓰는 것 같으니 마법진으로 찾아야겠어요.”

“오, 땅의 정령을 이용한 마법진이겠군요. 필요한 부분을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일행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하기 짝이 없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 다행히도 실라브엔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 꽤 타격이 컸나보다. 믿었던 드루이드 링도 일시적이지만 봉인을 당했으니 동물과 곤충 소환, 그리고 혹한의 날씨 등으로만 우리를 공격할 뿐이었다.

꽈드드등

이크, 번개도 치네. 하지만 뿌우가 허공에 떠서 피뢰침 역할을 해 주었다.

“뿌우! 맛있게 잘 먹겠당.”

뿌우는 좋다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번개를 받아먹었다. 마치 눈송이를 받아먹는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표정이다.

실라브엔, 이제 쓸 수 있는 공격마법이 없지? 훗.

우리는 마음 편하게 마법진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눈보라가 멈추고 허공의 벌들과 땅의 늑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요동치던 드루이드 링의 바위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크리드 경이 성공했나 본데요?”

내가 이반 경에게 말하자 이반 경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내 생각에 동의했다.

잠시 후, 우리가 마법진을 다 그렸을 무렵 정말로 크리드 경이 나무 한 그루를 등에 지고 걸어왔다. 뿌리와 가지 윗부분이 잘려나간 상태의 나무기둥이었는데. 기둥에는 실라브엔이 박혀 있었다.

“항복하지 않더군. 뿌리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네.”

“아직 안 죽었군요.”

나는 실라브엔이 눈에서 초록색의 진액을 흘리며 원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며 말했다.

“저주한다. 숲을 헤치고 나무를 베어낸 너희들은 절대 엘프의 숲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요. 저주든 뭐든 해도 좋으니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해줘요.”

“내가 인간과 대화할 것 같으냐?”

“이미 대화하고 있거든요.”

나는 실라브엔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뿌리가 잘릴 때 반쯤 죽으면서 이성이 흐려진 모양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적에게 자비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

나는 현혹 마법을 써서 실라브엔의 정신을 제압했다. 과연 실라브엔은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눈빛이 흐려졌다.

“가장 가까운 섀도우 드루이드의 본거지가 어디지요?”

“말할 수 없다.”

마법적으로 말을 못 하게 되어 있나 보군. 여긴 괜히 무리할 필요 없다.

“그대의 본명이 실라브엔인가요?”

“그렇다.”

“저기 미리아는 하프엘프에요. 어째서 죽이려고 한 거죠? 섀도우 드루이드는 엘프도 적으로 규정했나요?”

“미리아는 섀도우 드루이드의 구역에 모르고 들어왔다. 나는 관례에 따라 미리아에게 떠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이려 하지 않았다. 단지 다른 침입자들을 제거하는 사이 말려들어도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하, 그렇게 교묘하게 설정을 한 거군.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섀도우 드루이드의 구역에 들어선 순간 얼마든지 죽여도 되는 거고, 엘프의 가족인 미리아는 경고를 듣지 않고 남았으니 전투에 휘말려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네.

“왜 섀도우 드루이드는 마족의 후계자와 손을 잡은 거죠? 그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 텐데요.”

“마족은 계약을 중시하고 숲을 탐내지 않는다. 콜레스 2세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세상뿐. 그가 세상을 지배하면 숲은 영원히 인간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알아낸 것과 다르지 않군. 미리아가 얻은 숲의 지식대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실라브엔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마족의 계약자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의 세상이 아니야. 이 물질계 전체이지. 숲은 너희들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너희들조차 마족의 계약자에게 속하게 되는 거라고.”

말할 대상이 있으니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네.

“…….”

이것은 질문이 아니니 실라브엔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을 머릿속에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실라브엔의 눈이 점점 굳어져갔다. 이제 곧 완전히 생기가 빠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숲의 힘으로 콜레스 2세를 불사체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숲의 힘으로 콜레스 2세의 불사성을 풀 수도 있겠지?”

“그렇다. 그가 배신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의 몸을 분해하고 죽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래, 그 말이 듣고 싶었어. 꼭 확인해야 하는 대목이었거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궁극마법의 힘을 가지는 숲의 힘으로 불사성을 얻은 콜레스 2세를 죽일 방법은 많지 않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마나파동포를 정통으로 맞추기 전에는 힘들 것이다.

문제는 다른 수단으로 콜레스 2세를 구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속이 된다는 것은 불사성과 모순되는 점이 있다. 구속을 계속하면 영원히 봉인되는 셈이니까.

결국 숲 안에서 콜레스 2세를 만나면 사실 상 그자가 멍하니 서서 내 마나파동포를 맞아주기 전에는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방법을 알았다.

실라브엔은 자신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

우리는 완전히 굳어버린 실라브엔을 땅에 묻어주고 마법진을 발동하여 섀도우 드루이드의 본거지를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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