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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05화 (105/250)

로엔의 마나뱅크 105화

*

실라브엔은 유능한 안내자였다. 숲의 길이라는 게 인간의 도로와는 달라서 경계선과 경계선 사이는 아무나 지나갈 수 없도록 미로화 되어 있는데, 실라브엔은 그런 경계를 쉽게 넘어갔다. 그녀는 이미 엘프의 숲 중 대부분을 보았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북으로 나아갔는데, 어느 정도 가다보니 나무 위에 눈이 쌓인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낮에도 얼음이 녹지 않을 정도로 추워진 것이다.

미리아는 이렇게 추운 곳은 처음인 듯 몸을 덜덜 떨었지만 내가 강식장갑로브의 온도조절기능에 대해 알려주자 크게 기뻐하며 얼른 온도를 올렸다.

실라브엔은 그것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미리아는 하프엘프라서 추위를 타나 보내요.”

“네, 온도에 대한 감각은 인간일 때와 별로 바뀌지 않았어요.”

“왜요? 그것도 바꾸려면 바꿀 수 있었을 텐데요.”

“추위를 느끼지 못하면 따뜻함도 못 느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엘프처럼 온도변화에 강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따뜻함에 둔해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건가요? 전 잘 모르겠군요.”

“옛날에 혼자 살 때는 이상하게 항상 추웠는데, 렌이 와서 같이 살 때는 항상 따뜻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건 소중한 기억이고, 인간이 홀로 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전 엘프의 가족이지만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따뜻함이라, 소중한 거일 수도 있겠군요.”

실라브엔은 어느 정도 납득을 한 듯 약간 부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엘프는 외로움을 안 탄다고 했는데, 숲을 떠나야 하는 상황의 실라브엔은 아무래도 외로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나보다.

결국 정도의 차이이지 엘프도 인간처럼 사회적 동물인 걸까? 어쩌면 사회적 식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속 나아갔고, 기온은 점점 더 떨어졌다. 나중에는 폭설이 내리는 곳까지 왔는데, 땅과 나무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추위에 강해야 하는군. 드루이드가 되려면.”

나는 반쯤 투덜거리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결계로브를 입어서 큰 문제는 없지만 사방이 눈 천지라 추운 느낌이 든다.

“드루이드들은 날씨를 조종할 수 있어요. 지금 오는 눈도 그들이 방문자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낸 걸 거예요.”

미리아가 말했다. 우리가 불청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려는 것 같다.

사실 나도 비밀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일 년 내내 눈보라가 치게 해 놨었지. 100년이 넘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여기서 계속 북쪽으로 가서 엘프의 숲 지역을 지나면 내 연구소 자리겠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더 추운 곳에 만들었던 거군. 하하하.

지금은 렉스의 목 띠가 된 연구소의 파워와 마리포즈와 민민포즈로 나뉜 연구소의 관리자아가 그때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가만, 이정도 눈보라를 계속 내리려면 상당한 마법진을 설치해야 하잖아. 파워도 필요하고.

“미리아, 드루이드들은 무엇을 파워로 쓰지? 역시 숲의 힘인가?”

“아니, 그들은 큰 돌 여덟 개를 원형으로 박아 넣은 드루이드 링을 파워로 써. 돌 하나당 담당 드루이드가 있어서 계속 파워를 주입하기를 백년 넘게 해야 비로소 드루이드 링 하나가 탄생한데. 그래서 드루이드는 한 그룹 당 최소 여덟 명이 필요하고, 오래된 링일수록 힘이 강해.”

“그럼 여기 말고 드루이드 링이 또 있다는 소리군?”

“여기가 가장 오래된 하이 드루이드의 링이야. 링 자체는 숲 곳곳에 꽤 있어.”

그렇군. 수장의 허가가 필요한 거였군.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도 엘프에 대한 지식은 별로 많지 않다. 미리아에게 배우는 게 꽤 많네.

내가 새로운 지식의 습득에 만족한 미소를 짓는데, 갑자가 실라브엔이 우리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제가 드루이드를 만나볼게요.”

더 접근하면 위험한가 보지?

“그렇게 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언제까지 돌아온다는 기한을 정해줘요. 그때까지 안 오면 우리도 앞으로 진입할 테니.”

내가 말을 걸어도 실라브엔은 여전히 들은 척도 안 하고 미리아가 다시 내 말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좋아요. 3일 안에 돌아올게요.”

휘익, 휙

빠르다. 민첩함으로만 따지면 거의 크리드 경 수준이네. 생각보다 대단한 여자구나 실라브엔은.

내가 감탄하는데 크리드 경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하군.”

“뭐가요?”

“여기는 대기하기에 상당히 안 좋은 장소인데, 여기는 시야가 좁고, 반대로 남의 눈에 뜨이기는 쉬워. 지리적으로도 습격당하기 딱 좋지.”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이반 경도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워메이지답게 전투지형을 볼 줄 아나보다.

나도 그런 지형을 읽을 줄은 안다. 단지 전문적인 지휘관이 아니기 때문에 빨리 인지하지 못했을 뿐. 크리드 경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곳은 머물만한 곳이 아니다.

적어도 이곳이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보니 숲의 상태도 이상해. 여기 있는 나무들은 다 잠이 들었는지 말을 안 해. 나무에 사는 새나 다람쥐도 없고.”

새나 다람쥐는 추워서 없다고 치고, 나무가 말을 안 한다고?

“일단 이동하죠. 앞으로 나가는 건 힘들어도 뒤로 물러서는 것은 상관없을 거예요.”

이상하면 즉시 움직여야 한다. 나는 바로 서번트 마법을 써서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반투명한 안내인을 하나 만들어냈다.

이성은 없고, 그냥 간단한 명령만 행할 수 있는, 이를테면 음성지원 표지판 같은 존재다.

“실라브엔 양이 오면 우리가 여기서 반나절 정도 뒤로 이동했다고 알려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이동하죠.”

“확실히 렌 경이 리더를 할 만 하군. 결단력이 있어.”

크리드 경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크리드 경은 왜 이반 경이 리더가 아닌지 의아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결단력이 빨라도 이번 경우에는 이미 늦었다.

미리아가 안색이 변해서 외쳤다.

“나무가 깨어났어!”

“웃!”

나도 느꼈다. 이런 거구나. 잠들어 있던 수백 마리의 맹수가 일제히 눈을 뜬 것 같다. 나무가 살기를 발할 수 있다니.

공기가 바뀌었다. 숨이 탁탁 막히는 게 독성이 있는 것 같다. 눈보라도 더욱 거세지면서 눈송이가 칼날처럼 단단해졌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이 여기 있다면 1분도 못 버티고 피부가 모두 찢어진 채 얼어붙어 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방어막을 쳤다.

“미스트!”

촤아악

크리드 경이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물의 안개를 치자 확실히 눈보라의 영향은 줄어들었다. 역시 기사의 반응이 빠르군.

“어서 빠져나갑시다.”

“그래요.”

우리는 말을 끌고 뛰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렉스가 으르렁 거리며 북쪽 구릉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곳을 보니 실라브엔이 자신의 키보다 큰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젠장, 적이었군. 우리를 함정으로 끌어들인 거야.”

“호호호호, 미리아, 그대 혼자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요. 그러니 떠나세요.”

“실라브엔, 그대는 섀도우 드루이드인가요?”

“그래요. 그리고 이곳은 우리 섀도우 드루이드의 링이에요.”

아주 적의 앞마당으로 제대로 들어왔구나.

“어떻게 우리가 오는지 알았지요?”

“그대가 숲의 지식을 이용할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지요. 몰랐나요? 그대가 숲을 보면 숲도 그대를 봐요.”

“아!”

그러네. 섀도우 드루이드가 숲의 마법진을 장악하고 있다면 미리아가 그걸 이용해 의식을 행한 것을 모를 리가 없지.

반대로 이야기하면 지금 엘프의 숲은 섀도우 드루이드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안 그러면 탐지 자체가 안 될 테니.

미리아는 슬픈 눈을 하고 말했다.

“실라브엔이 나를 속였어. 엘프끼리는 서로 속이면 안 되는데…….”

“진정하고 지금은 현실 상황에 대처하자.”

“이건 중요해. 섀도우 드루이드는 이미 엘프조차 남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들의 의지가 그렇다면 숲도 그렇게 변해버릴 거라고.”

숲이 변한다. 엘프들은 모두 숲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는 운명에 처해버린다.

실라브엔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했던 말이 모든 엘프에게 적용된다는 의미다.

“잠깐, 그렇다면 왜 너만큼은 떠나라고 하지? 아직 저자들이 엘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건가?”

“그건 그래, 적어도 엘프의 장로는 숲의 마법진에 영향력을 가질 거야.”

“알았어. 그럼 일단 저 섀도우 드루이드를 잡자.”

“여길 빠져나가는 게 먼저 아닐까?”

“크리드 경, 저 여자가 여유 있게 웃고 있는 것을 보면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일단 공격을 해 보고 그 다음에 반응을 살펴보죠.”

“알았네. 차앗!”

촤아악

크리드 경은 대답을 하자마자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안개와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가는 크리드 경의 움직임은 거의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빨랐다.

그러자 바로 이반 경도 마법을 시전했다.

“안티 매직 웨이브!”

위이이잉

엷은 막 세 개가 겹쳐서 실라브엔을 향해 날아갔다. 상대를 감싸 마법시전 세 번을 무효화 시키는 고급 마법이다. 이걸 이렇게 단숨에 시전 하는 것을 보면 이반 경은 실전에 정말 능숙하구나.

“렉스. 서피, 가랏!”

지금은 전력으로 부딪쳐야 할 때다. 우리가 어느 정도 함정에 갇혔는지 모르니 늦기 전에 실라브엔을 제압해야 한다.

렉스가 크리드 경이 움직인 경로를 따라 뛰어갔다. 얘가 영리한 게 지금 이 공간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크리드 경이 뚫은 공간을 이용한다.

서피 역시 목띠에서 나와 렉스의 몸을 둘둘 감고 또 하나의 꼬리처럼 뒤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렉스의 공격에 이어 연속으로 효율 좋은 결정타를 날리려는 듯 했다.

나는 공격을 하지 않고 미스릴 우산을 펴서 미리아와 함께 썼다. 미리아 역시 미스릴 우산을 펴서 등 쪽을 가렸다.

이것은 미리 계획한 동작으로 적이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를 공격해 올 때 대처하는 반격의 태세이다.

실라브엔은 우리의 공격이 생각보다 격렬하고 빠르자 놀란 듯 여유 있는 태도에서 다급한 표정으로 바뀌며 얼른 떡갈나무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땅이 갈라지며 떡갈나무 지팡이에서 수많은 이파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곧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이반 경은 어림없다는 듯 땅의 정령을 소환해 갈라진 땅을 더욱 벌어지게 했다. 땅의 균열은 떡갈나무를 쓰러뜨려 집어삼킬 정도로 커졌고, 실라브엔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떡갈나무로부터 떨어져 뒤로 물러났다.

옳지. 적어도 저 여자가 우리의 전력이 어떤지 정확하게 모르는 것만큼은 확실하군. 이거 잘하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겠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라브엔은 비장한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며 외쳤다.

“드루이드 링 소환!”

불쑥

그녀의 주위로 여덟 개의 바위가 솟아 나왔다.

그것은 정말로 설명으로만 듣던 드루이드 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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