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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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리아의 숲의 예언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미리아에게 숲을 제공한 영주이자 미래의 연인으로 숲에 인식을 시켜 놓았기 때문에 비밀의 의식을 봐도 문제가 안 되지만, 이반 경이나 크리드 경은 외인이라 불가능하다.
이반 경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크게 낙담했지만 양아버지는 자격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숲은 양부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작할게.”
미리아는 옷을 거의 다 벗고 자신의 거처 바로 옆에 있는 나무들 사이로 갔다. 그곳은 굵은 덩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는데, 미리아가 다가서자 살아있는 것처럼 덩굴이 미리아의 몸을 엮더니 그녀를 들어올렸다.
숲 전체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영지 외곽을 빙 둘러서 벽을 친 것처럼 조성된 숲이다. 말하자면 미리아의 숲은 우리 영지의 첫 번째 방어벽인 셈이다.
미리아의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졌다. 마치 드라이어드같다.
사사사사사
숲이 바람을 부른다. 마치 바람을 통해 다른 숲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마나는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마법과는 다른 신비함이다. 어떻게 보면 궁극마법과도 같다.
가만, 이거 혹시 진짜 궁극마법진의 힘 아닐까?
인간 중에는 내가 9서클에 도달한 유일한 존재가 맞는데, 엘프 중에는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전 세계의 숲을 통합시키려면 적어도 궁극마법으로 마법진을 만들어서 영구화 시킨 정도는 필요하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건 마나뱅크급의 궁극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에이, 설마?
9서클 대마법사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건 아니지. 엘프들 중에도 마법을 익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들은 정령과 숲의 힘에 너무 심취되어서 다른 부분에는 성취욕이 부족하다고 알고 있다.
마법이라는 게 어렸을 때부터 거의 세뇌 당하다시피 연구와 수련에 몰두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건데, 엘프들이 그런 열정을 지니고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역시 확인을 해 봐야겠지?
“뿌우야, 잠깐 나와 봐.”
“헹, 마나 고갈 풀렸다고 벌써 날 부르냥?”
“마나 달리니까 잔말 하지 말고, 너 포트라한테 좀 갔다 와라.”
“내가 꼭 맞은 모습을 보고 싶은 거냥? 너와 나의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냥?”
“아, 좀! 물어볼 거 있으니까 갔다 오라고.”
“킁, 알았당. 뭐냥?”
“나 말고 9서클에 도달한 마법사가 있는지 물어봐. 특히 엘프라던가 말이야.”
“알았당.”
슉
뿌우가 사라졌다. 마나의 소비가 줄어든 것으로 보아 정령계로 간 것 같다.
과연 무슨 대답이 올까? 9서클에 도달하면 사대 정령계에 모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대기의 대정령인 포트라가 모를 수 없다.
없으면 몰라도 있으면 대답해 주겠지.
뿌우는 곧 돌아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눈에 멍자국이 없네. 안 맞았나?
“편지당. 말로 하기에 복잡하다고 했당.”
뭐가 복잡하다는 거야? 그냥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면 되잖아.
나는 뿌우가 가져온 편지를 받아보았다. 무슨 정령이 종이에 편지를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포트라는 물질계에서 인간들을 상대로 사업까지 하는 놈이니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없다. 그런데 엘프들 중에서 식물과 동화된 마법사가 하나 있는데, 생각이 멈춰 있어서 사실 상 죽은 것과 같다. 문제는 그자가 언제부터인가 그런 힘을 쓰더라.
내가 조사해 봤는데, 그자 이후에 다른 엘프 마법사들이 계속 식물과 동화되어 의식의 합일을 꾀했다고 하더라.
그 결과 거의 궁극마법과 비슷한 힘을 쓸 수 있게 된 모양이다.-
“흠, 식물과의 동화와 의식의 합일이란 말이지?”
얼마나 많은 엘프 마법사들이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도 식물과의 동화가 엘프의 종족적 특성이니 이것은 종족 단위로 펼친 궁극마법이라고 봐야겠네.
나는 어느 정도 납득을 하며 포트라의 편지를 계속 읽었다.
-조심해라, 뿌우에게 들으니 너 이번에 섀도우 드루이드를 찾아갈 거라고 하던데, 초대 섀도우 드루이드가 바로 식물과 동화한 첫 번째 마법사다. 아마 그들이 너를 적대한다면 넌 숲의 마법진을 상대해야 할 거다.-
“아, 놔. 이게 왜 이렇게 되는겨.”
궁극마법에 해당하는 숲의 마법진을 어떻게 하라고? 내가 무슨 대마법사야? 난 이제 겨우 6서클이라고.
왜 포트라가 편지를 썼는지 이해가 됐다. 옛날에도 포트라는 중요한 이야기는 꼭 문서로 전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건 진지하다는 소리다.
포트라 그 녀석, 그래도 전생의 친구라고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걱정해 주는구나.
나는 한숨을 참으며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아공간 주머니 뽀개면 너한테 손해배상 청구할 거다. 그리고 뽀갠 거는 나중에 다시 만들어라.-
“역시 마음에 두고 있었군. 쯧.”
포트라는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지. 나중에 9서클이 되면 다시 아공간 주머니를 만들어 줘야겠군.
어쨌든 알 건 알았다. 숲의 마법진이라, 이게 어떻게 작용하는 지 미리아에게 물어봐야겠다.
적어도 시전자가 이미 생각을 못 하는 상태이니 섀도우 드루이드들도 마음대로 조작하지는 못 할 거다. 궁극마법진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자와는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다.
파스스스스
미리아의 몸에 얽혀있던 덩굴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끝난 모양이다.
미리아는 여전히 눈동자가 없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섀도우 드루이드가 콜레스 2세와 계약을 했어. 숲은 섀도우 드루이드가, 숲이 아닌 부분은 콜레스 2세가 다스린데. 콜레스 2세의 영혼은 그가 평생 지니고 있던 보물들로부터 떠나지 않고 있어서 섀도우 드루이드들이 저주로 그의 영혼을 보석에 묶어버렸어. 숲의 저주가 사용되었고, 콜레스 2세는 원래 가지고 있던 마기를 저주의 힘으로 강화시켜 더욱 강해졌데.”
미리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특히 숲에서 강하데. 거의 불사의 존재가 된다는데?”
“쩝, 불사의 쥬얼 골렘이라. 그런데 왜 섀도우 드루이드가 하필이면 콜레스 2세와 계약을 한 거지?”
“마족의 계약자가 누구든 상관없었데, 숲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계약만 하면 물질계의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도록 하겠다는 거라서. 콜레스 2세는 계약을 깨면 바로 저주가 풀려 생명이 끊어지니 딱 좋은 상대였데.”
“그렇게 된 거군.”
미리아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당히 피곤한지 잘 걷지를 못했다. 그래도 이번 의식은 예언의 힘이라기보다는 숲의 지식을 이용한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로도 걷지 못할 정도라니, 함부로 예언의 힘을 쓰라고 해서는 안 되겠네.
나는 미리아를 쉬게 하고 영주관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모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이반 경, 역시 성격이 급하군. 크리드 경보다 먼저 묻다니.
“짐작했던 대로인데, 상황은 더 나빠요. 새도우 드루이드가 콜레스 2세와 계약을 했데요.”
나는 일행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숲에서는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니 이반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사라는 게 단순히 안 죽는 게 아닐 거라는 것을 그는 대충 짐작할 수 있나보다.
불사는 다시 말해 훼손할 수 없는 존재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다.
이론 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죽일 수 있다.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불사는 아예 상처도 안 입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콜레스 2세는 그런 존재일까?
“마나파동포라면 통하겠지요.”
이반 경은 스스로를 위로 하듯 말했다. 궁극마법 수준의 공격력이라면 불사도 깰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뭐, 창과 방패라고 할까요? 저쪽이 버티던가, 아니면 소멸되겠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것일 수도 있어요. 저쪽이 스스로 불사라고 믿는다면 웬만한 공격을 피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마나파동포를 명중시킬 확률은 늘어나는 셈이죠.”
“아하, 그건 좋군요. 렌 경의 말씀대로 확실히 잘 피하는 자보다 막고 버티는 자가 공격하기는 편하지요.”
“그런데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
“말씀하세요. 크리드 경.”
“마나파동포 말이야. 이반 경에게 설명은 들었는데. 그거 정말 그렇게 세?”
“미스릴 우산 만들어 드릴게요. 괜히 버티지 마시고 다른 사람이 우산 펴면 크리드 경도 펴세요.”
“그 충격파 막아준다는 우산 말이지? 충격파가 그 정도라면 확실히 셀 거 같긴 한데, 일단 그냥 한 번 맞아보면 안 될까?”
물의 정령 덕분에 마법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이거지? 이런 마법 무서운 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를 보았나.
“시험해 보고 싶다면 해 드릴게요. 하지만 지금은 실험을 하다가 부상당하면 안 되니까 콜레스 2세 문제를 처리한 후 돌아와서 해요.”
“그러지. 그때 부탁해.”
부탁은 무슨, 콜레스 2세한테 쓰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보자.
“그리고 말한 김에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야, 하나만 질문한다며?
크리드 경이 은근히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구나.
참자, 이 사람이 그래도 현재 대륙 최강의 기사다. 사실 지금은 전투력도 우리 중에 최고라 할 수 있고 말이지.
“말씀하세요.”
“미스틱엑스 경은 만날 수 없나?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흔적도 찾을 수가 없더군.”
“때가 되면 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웬만하면 안 나타나실 거예요. 사실 미스틱엑스 경은 데빌 베인의 결성에만 힘을 보탠 거고, 필요할 때 이외에는 따로 행동해요.”
“그런 관계였군. 알았어.”
“그럼 내일부터 미리아와 함께 엘프의 영역으로 떠날 준비를 하죠. 다른 엘프들을 자극하면 안 되니 조심하도록 하죠.”
“엘프의 숲에 들어가게 되다니, 역시 살다보면 별 일을 다 겪는군.”
크리드 경은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번에는 경계선에서 미리아를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거의 궁극마법에 가까운 힘으로 이어진 엘프의 숲, 그것은 가장 강력한 결계이자 방어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정보의 공유와 전달의 역할도 하는 것을 보니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곳에 가서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을까?
만약 숲이 미로를 만들어 우리를 가두면 지난 번 황궁에서처럼 깨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규모가 왕국 하나보다 더 큰 미로일 테니까.
공격이나 방어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대비가 필요하다.
그곳을 이곳 물질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이계라고 생각하고 대비하는 게 옳을 지도 모른다.
나는 철저한 준비를 하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