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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02화 (102/250)

로엔의 마나뱅크 102화

영지를 떠난 지 몇 달 밖에 안 됐는데, 돌아와 보니 뭔가 확 바뀌어 있었다. 추수철이라 들판에 밀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것은 당연한데, 영지 외곽 전체가 숲으로 덥여 있었고, 그 사이에 깔끔한 집들이 꽤 운치 있게 나열되어 있다.

“뭐지? 숲은 미리아 네가 어떻게 했다고 치고, 집들은 어떻게 된 거야?”

“실비아 공주가 청소 사업을 시작했어. 거리와 집의 청소를 하고, 신청하는 집들은 외곽 익스테리어를 대신 해 주는데, 이게 꽤 집을 예쁘게 꾸며주더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신청했어.”

미리아가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허, 실비아 공주가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이반 경이 말을 이었다.

“실비아 공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말을 안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공사가 훨씬 많이 진척되었군요.”

“몇 개월 사이에 영지의 진입로 전체의 집 모양을 바꿨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 규모로 일을 벌인 거지요?”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업무는 거의 청소 위주였고 영지병들의 집들 위주로 공사를 했었는데 몰던 경이 바뀐 집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기 시작했지요. 영지병들 역시 모두 집을 바꾸기를 원했고, 이게 소문이 나자 영지에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신청을 하더군요.”

“우리 영지 사람들 돈 많데요?”

“워낙 집 모양이 예쁘게 나오고 또 비용도 거의 실비 수준이라고 합니다. 몰던 경이 개입한 이후 거의 영지 차원의 도시 미관 개선 작업으로 추진되는 중이지요.”

“그런가, 아버지까지 개입했다면 영지 차원의 사업이라고 할 만 하지.”

아무리 그래도 도시가 정말 몇 개월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마법을 보는 것 같다.

역시 마법은 마나로만 쓰는 게 아니라 살다보면 주변이 모두 마법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느낄 때가 많다.

꿈틀

“읏.”

“렌, 괜찮아?”

내가 몸속에 이상을 느끼고 짧은 신음성을 흘리자 미리아가 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아졌어. 지금 방금 마나가 제 흐름을 되찾았거든. 하하하.”

“와! 그럼 드디어 마나고갈 상태에서 벗어난 거네? 축하해.”

“이런 멋진 경관을 보니 내 몸도 감동을 했나 봐.”

정말이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영지의 마법 같은 변화는 내 정신과 육체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이렇게 오래 살았어도 아직 놀란 만한 일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리고 눈으로 본 감동에 이어 내 몸속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감동이 격하게 밀려온다.

한 번 말랐다가 다시 이어진 마나의 흐름은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강렬한 느낌이다. 마나와 마법은 나에게 있어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었구나.

나 렌은 마법사라는 존재로구나!

자신의 정체성에 강렬한 확신이 생기면서 마나의 흐름은 더욱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이어졌다. 굳어 있었던 심장의 서클에 마나가 흘러들어가면서 녹슬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처음에는 삐걱거렸지만 곧 예전과 다름없이 활발하게 서클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서 돌아가자. 아버지부터 만나고 실비아 공주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어.”

“응, 나도 숲에 가서 나무들에게 그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을 사과해야 하니까 서두르자.”

우리는 곧 바로 영주관으로 향했다.

영주관 근처까지 가자 몰던이 몇몇 사람들과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런데 몰던의 복장이 이상하다. 평소의 용병 복장이 아니라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그것이다.

“렌아, 어서 와라.”

“아버지, 직업 바꾸셨어요?”

“바꿨다기보다 겸업하기로 했다. 회사도 하나 차렸는데, 몰던 건설이라고 실비아 클린하고 파트너십으로 운영하고 있단다.”

“몰던 건설이라고요? 그럼 혹시 일꾼들은 다른 영지병들인가요?”

“영비병들 중 이쪽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애들이 있더라. 갸들을 정식으로 퇴역시켜서 사원으로 받았다.”

“본격적이네요. 하하하.”

“나중에 실비아 공주에게 설명을 들어 봐라.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꽤 마음에 들더라.”

실비아 공주, 진짜 능력 있네. 어떻게 몰던을 구워삶았기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시지?

몰던이 이 정도로 활기차게 무엇을 하는 것을 요 근래에는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건설회사 사장님이 적성에 맞는가 보다.

“건물만 하지 마시고 도로나 공공시설도 재정비 하세요. 영주대리로써 허가증 발행해 드리고 예산도 책정할게요.”

“오호, 그럼 좋지. 아들 덕에 말년에 돈 좀 벌어 보겠구나.”

돈이야 그냥 앉아 있어도 많이 드릴 수 있는데요. 그냥 일 하고 싶으신 거 같으니 일 하세요.

몰던은 한참 공사를 지휘하다 왔다고 인사만 하고 현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바쁘니까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말을 하자마자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몰던을 보면 정말 이번 일에 의욕을 불태우는 거다.

나는 영주관에 짐을 풀고는 대충 정리가 끝나자마자 실비아 공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상황이 재미있게 흐르니 빨리 설명을 듣고 싶었다.

공주의 저택 옆에도 하나의 건물이 서 있었는데, 문 위쪽으로 실비아 클린 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단순히 거리만 청소하는 게 아닌가본데?

나는 일단 실비아 공주의 저택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환대를 받았다.

“부상을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죽은 황제가 되살아나서 황궁을 장악했더군요. 전 그야말로 호랑이 굴속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간 꼴이었습니다. 바로 잡혔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 여자가 한 번 마음을 여니 말투가 굉장히 다소곳해졌네. 부드러우면서도 품위가 있는 게 그야말로 공주느낌이 난다.

사실 지금까지는 공주라기보다는 긴장한 여기사 수준이었거든.

분위기가 부드러우니 평소처럼 차가운 미녀가 아니라 화사한 느낌까지 든다. 은발에 가까운 플라티넘 빛깔의 머리카락도 창문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빛을 받아서인지 조금 더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고, 입술도 붉어 보인다.

무엇보다 녹색 드레스가 상당히 성숙한 느낌을 주는데, 원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외모였기에 옷차림까지 받쳐주니 이제는 진짜 여자처럼 보인다.

내 취향도 이제는 점점 나이에 맞추어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약간 연상 취향이라고 할까? 나보다 어린 애는 정말 애기로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실비아 공주는 지금 내 눈높이에 딱 맞는 여인상이다.

“다행히도 황궁 경비태세에 마법사가 빠진 상태라 틈이 있었습니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무리는 좀 했지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가셔서…….”

“천만에요. 오히려 잘 된 거죠. 만약 그때 제가 안 가서 제국이 콜레스 2세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면 큰일이 났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일이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클린 회사를 차리신 건가요?”

“그냥 공주나 기사로는 별로 할 게 없어서 고민하다가 청소나 하려고 시작했어요. 원래 스트레스 받으면 제 방을 제가 치우는 습관이 있는데, 깨끗한 방안을 보면 기분이 좋거든요.”

이것 참, 공주답지 않은 습관이네. 하녀들이 무지 부담스럽게 생각했을 텐데 말이야.

실비아 공주는 깨끗한 것을 좋아한단다. 이곳 영지에서 지낼 때 거리를 오가다보면 아무래도 왕성보다는 도로정비도 미흡하고 공공시설의 관리도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비아 공주는 큰마음을 먹고 거리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녀 중 하나가 청소만 하면 뭔가 천박해 보인다고 건물들을 예쁘게 꾸미는 아웃테리어 일까지 같이 하자고 했단다.

“처음에 어떻게 광고하기도 그래서 몰던 경께 부탁을 드렸더니 영지병사 중 집을 고쳐야 하는 사람을 소개시켜줬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깔끔하게만 고치려고 했는데, 막상 해 놓고 보니 예상보다 예쁘더라고요.”

결국 청소는 공주의 스트레스 해소의 연장이고, 아웃테리어는 일종이 놀이 같은 건가?

상관없겠지. 시작과 동기는 어떻든 간에 지금 실비아 공주가 우리 영지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나는 마법과 정치적인 부분의 지식은 많지만 이런 식으로 꾸미고 관리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강력한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내가 보고 감탄할 정도니 다른 자들도 좋아할 것이고, 결국 이것은 영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줄게 틀림없다.

사람들은 좋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이로써 우리 영지는 주변 사람들이 살기를 원하는 선망의 지역이 될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쪽 부분은 정식으로 실비아 공주님께 일임할 테니, 앞으로도 영지의 미관과 정비를 맡아주세요. 부서의 이름은 영지 환경 미화부로 하고, 실비아 공주님께는 미화부장의 칭호를 드리지요.”

“호호호, 그것 괜찮네요. 어설픈 여기사 노릇 하기보다는 미화부장이 좋을 것 같네요.”

실비아 공주는 자신이 할 일이 생긴 게 기쁜 듯하다. 거기에 몰던까지 도우니 뭔가 자기 자리를 찾은 느낌인가 보다.

하긴, 왕궁과는 다르게 자연스러운 느낌이겠지. 정략적인 굴레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난 셈이니까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걸까?

어쨌든 실비아 공주의 열정이 나에게 도움이 되니 다행이다.

나는 공주와 차와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저녁이 될 때까지 담화를 나누다가 영주관으로 돌아왔다. 더 있고 싶었지만 몰던과 저녁 식사를 해야 했기에 아쉬운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관으로 돌아오니 몰던은 이미 와 있었고 식사준비도 끝난 상황이었다.

실비아 공주를 만나고 왔다는 말에 몰던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아가씨 성격 참 좋더라. 난 그런 성격이 좋더라.”

“흐, 실비아 공주님이 아버지한테 아부를 많이 했나 보네요. 혹시 선물도 받았나요?”

“커흠, 선물은 무슨? 받긴 좀 받았지만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다.”

역시, 기본이 확실한 공주라니까. 사람 사귈 줄 알아.

처음 기사들과 영지병들간의 문제가 안 생기게 잘 관리한 것도 있어서 원래 몰던은 실비아 공주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실비아 공주가 본격적으로 아부를 하니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간 모양이다.

뭐, 상관 없겠지. 그 여자가 몰던에게 잘 하면 좋은 거니까. 오히려 몰던이 평민이라고 무시하면 굉장히 안 좋은 거고.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몰던에게 ‘경’ 칭호를 붙인다.

원래 이 영지는 미스틱엑스의 영지이고, 나는 영주대리인일 뿐인데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영지의 영주를 나라고 여기는 것 같다.

몰던은 영주의 아버지라 자연스럽게 귀족 대우를 해주는 거고.

이것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라 나는 몰던의 건설회사 창립비사를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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