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01화
로엔의 마나뱅크 5권
1장 새로운 시작
드루이드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신비한 집단이라고 한다.
숲의 수호자들,
숲을 자기 집으로 삼는 엘프들과는 달리 자신을 숲의 일부로 생각하고 자연과 숲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 다시 두 가지 성향을 띠는데, 인간과 같이 발전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숲에 침입해 오는 자들의 움직임 또한 자연현상 중 하나로 생각하고 최대한 부드럽게 막으려는 일반 드루이드와 자연을 훼손하는 자들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적대시 하는 섀도우 드루이드가 있다.
“섀도우 드루이드는 수가 상당히 적어. 하지만 그들의 힘은 강력해서 엘프의 장로들도 경계할 정도야.”
미리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장로가 경계한다면 일반 엘프들과 섀도우 드루이드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린가?”
“거의 그래. 엘프들은 다른 종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싫어하거든. 그리고 섀도우 드루이드 때문에 숲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도 문제가 되고.”
“인간이 숲을 경계하니 숲도 인간을 경계하게 되는 것이군.”
“응.”
엘프들에게 있어 숲은 살아있는 가족과도 같다. 그런데 숲이 인간을 경계하면 엘프들도 자연스럽게 인간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엘프가 인간에게 배타적이 된 이유 중에는 이런 면도 적지 않게 작용한 듯하다.
장로들은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종족간의 교류는 냉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근원적으로 싫은 감정을 가지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
“그렇다면 만약 그들과 싸우게 될 때 엘프들이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섀도우 드루이드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다른 엘프가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해. 엘프가 그들을 도울 이유가 없지.”
쩝, 그런데 어쩌다가 섀도우 드루이드가 마족의 계약자를 돕게 된 거지? 마족은 그들에게도 적일 텐데 말이야.
섀도우 드루이드에 대한 것은 로엔 시절에도 들은 바가 없을 정도로 은밀하다.
세상에 십여 명만 존재하는 자들.
느낌이 묘하다. 만약 정말로 섀도우 드루이드가 콜레스 2세를 부활시킨 거라면 그들 역시 마족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리아야. 만약 점을 쳐서 그들이 콜레스 2세와 연관이 있다고 나오면 엘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걸. 하지만 섀도우 드루이드가 있는 장소는 알 수 있을지도…….”
“그래, 그럼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의식을 진행해 줘. 예상대로라면 위치도 알아봐주고.”
“그럴게.”
미리아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된다. 이러 정보가 없었다면 정말 대륙을 다 뒤져야 할 뻔 했는데 말이야.
나는 미리아와 대화를 끝내고 고개를 돌려 마차의 창문 밖으로 비치는 들판을 보았다.
이반 경은 명상에 잠겨 있고, 미리아도 내가 말을 안 하자 살짝 눈을 감고 앉은 채 잠을 청하는 듯 했다.
나는 몸이 안 좋기 때문에 안쪽에 누워 상체만 쿠션으로 받쳐 창문을 볼 수 있는 자세로 있다.
마차의 진동은 전혀 없다. 그래서 며칠 동안이나 마차로 여행을 했는데 피곤하기는커녕 침대에 계속 누워있어 따분한 기분이다.
오직 창문 밖으로 흐르듯 지나가는 풍경만이 우리가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영지까지는 아직 일주일 이상 더 가야 한다. 그 사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논의는 다 끝났다.
내일은 이반 경이 영지로 정령을 보내 우리가 오는 것을 알린다고 한다. 미리 준비할 것을 다 준비시키고, 우리가 도착하면 바로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할 생각이다.
문제는 나다.
마나고갈 상태가 회복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린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
이반 경은 크리드 경과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성은 쉬라고 하는데 내 심장이 쉬지 않겠다고 항의를 한다.
콜레스 2세, 그놈은 내가 꼭 마나파동포를 먹여주겠다고 결심했다.
“영지로 돌아가면 치유 마법을 써도 될까?”
나는 다시 미리아에게 물었다.
미리아는 눈을 뜨고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애매하긴 한데,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마나고갈 상태만 벗어나면 마법적 치료도 큰 부작용은 없을걸.”
“그렇지. 그럼 마나고갈 벗어나면 말할게.”
“응, 빨리 나아. 렌은 아픈 거 안 어울려.”
“훗, 이제 부상은 안 당할 거야.”
“그래야 렌이지.”
“그런데 너 지금 자려던 거 아니지? 명상 하는 거도 아닌 듯한데 뭐야?”
“생각 안 하고 시간 보내기.”
“명상이랑 틀린 건가?”
“명상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건데. 엘프들은 이거 많이 해.”
“아항, 그냥 노는 거군.”
엘프의 종족 특성은 시간낭비라는 말이 있지. 워낙 오래 사는 종족이라 이렇게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고 며칠씩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말 엘프는 동물인지 식물인지 구별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혹시 그거 할 때 광합성 하는 거는 아니지?”
“광합성 하는데?”
“잉, 역시 식물인 거냐?”
“꼭 식물만 광합성 하라는 법 있어? 엘프들은 피부로 빛을 흡수해서 마나로 바꾸는 능력이 있어.”
“빛을 흡수한다고?”
“빛도 에너지니까 흡수하면 마나로 바꿀 수 있잖아. 옛날에 엘프의 장로가 드라이어드한테 배웠데.”
“그렇군.”
광합성이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피부호흡은 인간에게도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피부에 적당한 태양빛을 받으면 몸 상태가 좋아지지만 반대로 너무 심하게 태양빛을 받거나 안 받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한다.
그런데 미리아의 말에 의하면 엘프는 태양빛을 아무리 쬐어도 피부색이 변하거나 일사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엘프가 사막에 살지 않는 이유는 숲이 없기 때문이지만 생각만 있으면 사막에서 가장 태연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엘프란다.
빛을 마나로, 이거 나도 되나?
마나고갈 상태에서는 명상을 통한 마나축척이 안 된다. 심지어는 생체조직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마나도 부족해서 지속적으로 외부로부터 마나를 보급 받지 않으면 육체가 쇠약해 진다.
시간이 지나 마나가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괜찮은데, 그때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빛으로부터 마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마나고갈 상태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미리아야, 그 광합성 나한테 가르쳐 줄 수 있어?”
“이거 인간은 안 될걸? 나도 하프엘프라 조금씩 밖에 안 되거든.”
“역시 무린가?”
“왜?”
“광합성 하면 마나고갈 빨리 벗어날 것 같아서.”
“아항, 그럼 나랑 같이 하자.”
“같이 하는 건 되?”
“육체를 링크하면 되지 뭐.”
왠지 모르게 좀 야하게 들렸지만 나는 미리아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다행히도 육체의 링크라는 게 그냥 미리아의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을 서로 복잡하게 엮고, 손가락 끝을 붙이는 거였다.
“렌은 명상하고 있어. 내가 알아서 렌의 피부까지 같이 광합성을 할게.”
“그래.”
“잠들면 안 돼. 인간은 잠들면 마나가 몸 밖으로 흘러 나가니까.”
“알아.”
나는 살짝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나를 느끼는 것은 아니고, 마나를 제어하여 축척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미리아가 말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인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피부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가 피부를 적신다. 정말 피부를 통해 마나가 흘러들어올 수도 있구나. 따뜻함이 창문으로 비춰진 빛의 영향인지 마나의 영향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어쨌든 마나는 내 피부로부터 조금씩 스며들어와 어느 순간 심장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직빵이네.
마나고갈은 기본적으로 몸 안의 마나가 완전히 메마르면서 기존의 흐름이 끊기는 게 원인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흐름이 생긴다는 것은 곧 마나고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작은 흐름도 결국에는 점점 커져서 거센 물줄기처럼 바뀌는 법, 나는 조용히 이러한 흐름을 관조하며 기다렸다.
“괜찮았어?”
어느 순간 미리아가 물었다. 눈을 떠보니 꽤 시간이 지났는지 해가 진 지 오래다.
“광합성은 해가 떠 있을 때만 되는 거지?”
“아니, 달이 떠 있을 때는 더 잘 돼. 달빛에는 마나가 풍부하니까.”
“그럼 계속하자.”
“안 돼. 너는 인간이니까 너무 오랫동안 안 움직이면 몸이 굳는단 말이야. 나도 하프엘프라 순수 엘프처럼 며칠씩 멈춰 있지는 못하고.”
“그렇군. 그럼 밖에 나가서 몸을 좀 풀어야겠네.”
“그게 좋겠어.”
미리아의 말대로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몸이 잘 움직이지를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거의 여섯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광합성의 부작용이 이런 거였군. 한번 빠져들면 몸을 전혀 안 움직이게 되나 보네.
“드라이어드가 남자를 유혹해서 같이 광합성을 하잖아. 그럼 남자는 며칠 못 가서 몸이 굳어 죽거든, 그럼 드라이어드의 나무가 죽은 남자를 양분으로 삼아.”
“으, 끔찍한 소리는 그만 해.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마나고갈에서 빨리 벗어날 것 같네.”
“도움이 됐다니 기쁘다.”
나도 기쁘다. 처음에는 그냥 인연이 닿아 만나서 보살펴 줬는데, 어느 새 얘가 이렇게 자라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네.
역시 세상일은 지나봐야 아는 거야.
“그런데 세리아 공주가 깨어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파혼할 거잖아.”
“으, 미리아 너 말이야. 그런 민감한 문제는 묻지 말아줄래?”
“물으면 안 되는 거야?”
“그래, 나도 고민되는 부분이라 딱 잘라 대답하기 어렵단 말이야.”
“세리아 공주는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는 거지?”
“힘들다고 봐야지. 실비아 공주와 혼약하기로 한 이상, 아마 세리아 공주는 자존심 상 힘들 거야.”
사실 반대의 경우라면 어떻게든 될 수 있다. 제국의 공주라면 소국의 공주가 숙이고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미 실비아 공주를 정식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세리아 공주가 제 이 부인의 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녀가 허락한다고 해도 제국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황제의 여동생을 일개 마법사의 제 이 부인으로 줄 수는 없는 거니까.
“어려운 문제지만, 세리아 공주가 깨어나면 내가 직접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거야.”
“그렇구나. 역시 렌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네.”
“회피고 뭐고, 이런 일은 직접 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솔직히 콜레스 2세와 싸우는 것보다 세리아 공주에게 파혼 얘기를 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이말 한 마디 하려고 제국의 수도까지 갔는데, 죽을 고비만 넘기고 결국 아직까지 숙제를 풀지 못한 채 또 다른 숙제만 생긴 셈이다.
하나씩 처리해야지. 물이 흐르듯 순리대로 행하다보면 시간이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