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97화
마리포즈가 깨어나기까지는 약 10분 정도가 걸렸다. 멍하니 앉아있던 마리포즈가 갑자기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왼쪽 눈이 흰자위도 없이 전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
“마리야, 괜찮니?”
“괜찮아요.”
괜찮지가 않네. 마리포즈의 목소리가 둘로 갈라져서 들린다. 원래의 목소리와 거의 겹치게 조금은 굵은 기계음의 목소리가 섞여서 나온다.
마리포즈도 그것을 인식한 듯 잠시 손으로 목을 주무르더니 검게 변한 한쪽 눈을 감았다.
“거의 절반은 마나뱅크와 동화되어 버렸네요. 육체는 큰 문제가 없지만 목소리가 갈리니 평소에는 이쪽을 봉인 해 놓아야겠어요.”
“그래, 그게 좋겠네.”
한쪽 눈을 감으니 예전의 마리포즈다. 그러나 양쪽 눈을 뜨면 뭔가 변한 듯 한 느낌이 드는데, 단순히 눈동자와 목소리만 바뀌는 게 아니라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조금 더 웅장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있다.
마리는 한쪽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렌 경이 마나뱅크에 접속하면 저도 자동적으로 같이 접속하도록 설정해 놨어요. 하지만 평소에는 마나뱅크와 동화된 부분은 활동을 정지시키고 원래의 마리로 존재하도록 할게요.”
“괜찮을까? 자아의 일부분을 너무 오래 봉인 해 놓으면 이중 자아가 될 수도 있어.”
“지금도 어느 정도는 이중 자아와 같아요. 마나뱅크와 동화되면서 원래의 저와는 또 다른 사고방식이 생겼거든요.”
“이런, 곤란한 일이네.”
“상관없어요. 얘도 렌 경을 좋아해요. 마나뱅크의 영향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탄생한 이유가 렌 경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요.”
“그래, 그 아이에게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해야겠네.”
“렌 경이 인사를 하면 민민포즈도 좋아할 거예요.”
“민민포즈? 설마 분열된 자아에게 이름까지 지어준 거냐?”
심각하다. 이름을 지어준 순간 이미 분열된 자아를 또 하나의 개채로 인정한다는 거다. 나는 마리포즈의 경솔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민민포즈의 자아가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민민포즈의 성품이 나쁘다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제어를 해야 하는데, 독립자아가 아닌 분열자아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나쁜 자아가 생성되어도 처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마리포즈는 내가 만든 인공자아가 아니다. 다행히도 마리포즈의 인격은 훌륭한 것이고, 아버지로부터 교육도 잘 받았다. 하지만 마리포즈는 인공자아가 받아야 할 최소한의 제어도 받지 않았다.
분열된 민민포즈도 기본제어가 전혀 안 되어 있을 게 뻔 하니 심하게 말하면 악마와 같은 성격의 사이코패스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거다.
“마리야, 네가 동생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은 이해하겠는데, 분열된 자아를 독립시켜서 성장시키면 안 돼. 심하면 네가 소멸할 수도 있고, 성장한 자아 때문에 육체제어가 잘 안 될 수도 있어.
육체 중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기관이 있다. 만약 자아가 둘이라면 심장이 두 배로 뛸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것이 자연생명체가 정신적으로 분열하는 것보다 인공자아의 분열이 훨씬 심각한 이유 중 하나다.
“…….”
마리포즈는 내 설명을 듣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민민포즈를 흡수해야 하나요?”
“기본적으로 분열된 자아는 흡수하는 게 정석이야. 그것 때문에 네 성격이 조금 변할 수도 있지만 그냥 분열된 채로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해.”
“그래도…….”
마리포즈가 처음으로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망설인다. 역시 내 짐작대로 마리포즈는 가족을 가지고 싶었던 거구나.
창조주이자 주인인 나 말고 동생이라는 자신이 보살펴 주어야 할 가족.
쩝,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사실 나도 그런 마음이 강하다.
전생에도 10살 이후 마탑에 들어와 스승님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부모나 형제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게 되었다. 마탑의 교육 체계가 원래 가족을 잊고 모든 것을 마도연구에 몸 바치게끔 유도하니 어쩔 수 없다.
현생에서도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고 어머니 역시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나에게 있어 가족은 몰던과 파우스 스승님뿐이다. 그래서 그분들이 더욱 소중하다.
“외로움인가? 그래, 그렇겠지.”
“죄송해요.”
“괜찮아.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우선 민민포즈와 대화를 나누어 보자. 내가 네 자아를 분석해도 되겠니?”
“렌 경이라면 언제든지 상관없어요.”
마리포즈가 표정을 밝히며 말했다. 얘가 확실히 감정이 풍부해졌네. 평소에는 거의 내 옆에서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감정이 드러나니 표정도 좋다.
누가 만든 자안지 참 잘 만들었네.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리고 표정이 살아나니 얘가 또 엄청나게 예쁘다. 평소 무표정일 때에는 약간 중성적인 매력이 있었는데, 살짝 미소를 지으니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다. 수선화는 아니고, 장미도 아니고, 백합 같은 느낌인가? 은근히 고결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자아의 육체를 만든 게 아니라 예술작품을 탄생시켰었군.
나는 새삼 나의 심미안에 감탄해 하며 손을 뻗어 마리포즈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리포즈의 자아에 직접 접속을 하는 마법을 시전했다.
마리포즈는 나의 마법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니 곧 내 머리 속에 마리의 자아 생성식이 떠올랐고, 그녀가 알게 모르게 성장시킨 감정과 가치관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흘러 들어왔다.
이것은 기억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훨씬 고차원적인 인격분석법이다. 마법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최소 8서클은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마리포즈의 인격은 아주 훌륭한 것으로 나에 대한 충성심도 충분했다.
이윽고 가치관의 흐름이 바뀌었다. 민민포즈의 인격이다.
이것은 거의 감정이 없는 수준으로 마리포즈보다는 마나뱅크와 비슷하다. 하지만 아예 감정이 없도록 제어된 게 아니고 감정이 싹트지를 않은 것이다.
생각보다 위험하다. 싹이 트지 않은 씨앗은 어떤 싹을 틔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마리포즈의 말대로 나에 대한 충성심부분은 생성되었다. 처음으로 생성된 가치관인 만큼 이 부분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마법을 중지하고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마리포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민민포즈는 아직 어린 아기와 같구나. 마리 넌 민민의 부모이자 언니인 셈이라 그녀의 자아는 너로부터 거의 모든 정보를 얻어갈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돼. 그녀의 역할은 마나뱅크의 보조야. 감정이 너무 풍부해 져서는 임무수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결국 마나뱅크의 규칙에 걸릴 거야.”
“아!”
“애정만으로는 안 돼. 냉정하게 민민을 교육시킬 수 있겠니?”
“…….”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군. 정확한 계산이 안 되면 쉽게 대답을 못하는 게 인공자아의 특징 중 하나이다. 허풍이야말로 인공자아가 가지기 가장 어려운 감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최선을 다 해 노력한다는 대답이면 돼. 자아의 성장에 확실성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최선을 다 해 노력한다면 또 하나의 너인 민민은 틀림없이 너의 기대에 부응할 거야.”
“렌 경이 말씀하시는 틀림없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 너희들이 말하는 100%의 확률이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틀림없는 건 틀림없는 거야.”
“예, 저는 최선을 다 해 민민포즈가 좋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불안요소는 있지만 이 사건으로 마리포즈의 자아가 또 다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력이라는 것은 자연생명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리포즈는 이제 노력할 줄 아는 자아가 된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네가 떨어져 있어도 나는 마나파동포를 쓸 수 있게 되었구나.”
“하지만 충격파를 막을 방법이 필요해요.”
“그건 아까 생각해 놨어. 휴대하기 가장 편한 방어막을 말이지.”
“그게 뭔데요?”
얘가 호기심도 느끼네. 이제는 진짜 거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군. 그래도 기본제어가 있기 때문에 배신이라는 가치관은 배우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그것까지 배우게 할 수는 없잖아.
나는 마법책을 펴서 그림을 그려가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미스릴 판으로 만든 우산형 방어막을 지팡이에 장착할 거야. 평소에는 접어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마나파동포를 사용할 때 펴서 끼우는 거지.”
미스릴은 마침 미리아가 엘프의 숲에서 나올 때 몇 덩어리 선물로 가져 나온 게 있다. 원래 미스릴의 제련은 엘프와 드워프에게만 있고 인간은 거의 못 했는데, 나는 그게 가능하다.
가볍고 튼튼하고, 특히 음파와 충격파 같은 파동계열에 강한 방어력을 가지기 때문에 이걸 우산형으로 만들면 충분히 방어막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리고 가볍기 때문에 들고 뛸 수도 있는데다가 접은 상태에서 몽둥이처럼 쓸 수도 있다.
“아하, 이거면 정말 충격파를 막을 수 있겠네요.”
마리포즈는 이런 쪽의 계산을 정말 잘 한다. 충격파의 힘과 미스릴 판의 강도를 비교해 충분히 가능한 두께를 산정했다.
“그렇지? 그럼 내일부터 프로토 타입을 한 번 만들어보자.”
“하지만 아직 렌 경의 몸은 안정이 필요한데요.”
“난 지시만 할 테니까 네가 만들어. 제련할 때 마나주입하는 방식을 가르쳐 줄 테니까.”
“하긴, 아무런 마법적인 기능도 안 넣고 그냥 모양만 만드는 거니까 가능하겠네요. 그럼 제가 만들어 볼 게요.”
“모양만이라면 나보다 네가 더 잘 만들겠지. 하하하.”
내가 웃는데 갑자기 마리포즈가 감고 있던 한쪽 눈을 뜨고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내, 가, 만, 들, 게, 요.”
“어, 지금 민민이 말한 건가?”
“예, 그렇네요.”
마리포즈가 다시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갑자가 빨리 뛰는 듯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당황했지만 내가 괜찮다고 손을 한번 끄덕이자 스스로의 자아를 살짝 약화시켜 계속 민민이 이야기하게 놔두었다.
“만, 드, 는, 걸, 하, 고, 싶, 어, 요.”
흠, 민민포즈는 제작자의 성향이 있군. 이건 나쁘지 않네.
원래 장인은 대부분 과묵하고 참을성이 강하다. 반면에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센 단점도 있다.
민민포즈는 마나뱅크의 보조관리자로써 이런 성격이 그녀의 역할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가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만듦으로써 자아에 쌓이는 스트레스도 해소할 수 있겠지.
좋아, 민민포즈를 제작자로 키우자. 관리자 겸 제작자면 나쁘지 않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다시 손을 뻗어 민민포즈가 된 마리포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민민 네가 만들어라. 마리의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게 조심하고.”
“예, 렌, 경.”
민민포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감, 사, 합, 니, 다.”
마리포즈가 교육을 시키는군. 하하하.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