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96화
내가 지금 가진 힘은 6서클 마법, 대기의 정령 뿌우, 렉스, 서피, 마리포즈, 그리고 마나뱅크다.
이 중에 뿌우와 렉스, 서피, 그리고 마리포즈는 힘이라기보다는 동료이지만 일단은 나에게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그들의 발전과 강화도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뿌우는 빼더라도 렉스와 서피, 마리포즈는 유사시 나와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결국 강해지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강화를 해야 할 것은 마법과 마나뱅크라 할 수 있다.
“7서클은 아직 힘들지. 이건 기본적으로 시간이 필요해.”
난 지금 깨달음이 모자라서 7서클이 못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마나홀의 확장이 안 됐을 뿐이고, 이건 수련만 지속적으로 하면 자동적으로 되는 대신 갑자기 뚫린다거나 할 수는 없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빨리 마나홀을 확장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러면 그 다음 단계인 8서클 올라가기가 몇 배나 힘들어진다. 그나마 나니까 올라가지 원래는 7서클로 끝나는 방법이다.
그런 만큼 서클 올리기는 보류.
남은 것은 마나뱅크의 활용이다.
“결국 마나파동포를 조금 더 쓸모 있게 개량하는 게 필요한데 말이야.”
현시점에서 마나뱅크의 마나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마나뱅크뿐이다. 그런데 이건 사용하기 위해 전제조건이 너무 많다.
발동시간, 마리포즈, 지팡이.
이 중에 지팡이는 저번에 일회용 지팡이를 만들어 기존의 지팡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다.
그 다음 해결해야 할 것은 역시 마리포즈겠지?
마리포즈 없이 혼자 궁지에 빠졌을 때에 마나파동포를 못 쓰니 문제가 있다. 이건 사실한 단독 기술이라기보다는 연합기인 셈이다.
문제는 마리포즈의 역할이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라는 데에 있다.
마리포즈는 개방된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닫는 역할과 충격파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보디가드 역할을 겸한다.
이 중 보디가드 역할은 나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철벽에 지팡이만 들어갈 구멍을 뚫으면 충격파를 막을 수 있다. 다른 골렘을 만들어 막으라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마법적인 방벽이 아닌 충격파로 마법적인 기능이 정지되어도 괜찮은 실제 물질로 된 방어막이면 쓸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타이밍으로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닫는 것은 마리포즈만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인간이 아닌 인공자아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그렇다면 마리포즈에게 원격조종을 하게 할 수 있을까?”
한참 궁리하다보니 좋은 발상이 떠올랐다.
원격조종!
이게 되면 마리포즈가 바로 옆에 없어도 마나파동포를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격조종을 할 수 있을까?
꾸웅, 꿍
렉스가 심심하단다. 내가 혼자 생각에 몰두하느라 목띠도 안 만져주니 응석을 부리는 거다.
“렉스야. 넌 강아지가 아니라 늙은 개거든. 그 덩치에 응석은 좀 아니지 않니?”
컹
윽, 개 일생에 응석은 평생이라는 거냐?
렉스는 조금 졸린 듯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나는 목띠로부터 마나를 보충 받으며 다시 렉스의 목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서피도 심심했는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서피는 사람말도 할 수 있었잖아?
“서피야, 너 요즘 왜 말을 안 하니?”
“말하는 거 힘들다. 마기 써야 한다.”
“아, 발음기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마기를 방출해서 소리를 만드는 거구나. 그런데 지금 마기는 어느 정도 축척했지?”
서피는 나와 종속의 맹약을 맺은 뒤 렉스의 목띠에 살면서 흡수한 마나를 서서히 자신의 몸속에서 마기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 소환했을 때의 마기는 내가 다 빼앗아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때의 힘을 쓸 수 없다. 그 외에 마족의 후계자와의 전투에서 마기를 흡수하도록 했는데, 요즘은 그런 전투를 안 해서 거의 발전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전투가 없다면 원래의 힘을 되찾을 때까지 10년 정도 걸릴 것 같다.”
“그래, 내가 좀 무심했구나. 나중에 기회 되면 마기 발생진 하나 만들어줄게.”
“기왕이면 그 나중이 언젠지 디테일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나 7서클 되면 해 줄게.”
“빨리 7서클 되라.”
“알았어.”
근데 얘가 반말을 하네. 음,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반말했지. 계약할 때 존댓말 하라고 할 걸.
애들 때문에 잠시 마나파동포로부터 생각이 떨어졌는데, 마침 마리포즈가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다.
“마리야. 어서 와라.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예, 말씀하세요.”
“너 내가 연 게이트를 닫는 거 말이야. 나하고 얼마나 가깝게 있어야 가능한 거지?”
“접촉하면 가장 확실하고, 거리가 멀어지면 시간 상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점점 커져요.”
“흠, 그럼 오차 감안하면?”
“시야에 있기만 하면 가능해요.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는 게이트의 작동을 확인할 수 없으니 힘들고요.”
“마나뱅크의 게이트와 시야 거리에 관계가 있어?”
“마나뱅크가 아니라 렌 경이 보여야 해요. 저는 렌 경을 통해 마나뱅크에 접속하는 거니까요.”
“맞다. 그러면 마리 네가 마나뱅크에 직접 접속을 하게 만드는 게 먼저네.”
원격조종을 하라면 마리와 마나뱅크의 직접링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마나뱅크 계좌를 만들 수도 없고, 내 계좌를 공유하는 건 더욱 안 된다.
“음, 아무래도 마나뱅크의 규칙을 조금 바꿔야겠네.”
가능하면 마나뱅크의 규칙을 바꾸고 싶지 않다. 마나뱅크는 지금 거의 완벽에 가까운 아티팩트여서 규칙을 조금만 바꿔도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크다.
“우선 마나뱅크에 문의를 해 봐야겠군.”
마나뱅크에도 관리자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마나뱅크의 자아는 감정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은 마리포즈를 마나뱅크의 보조자아로 임명하는 거다. 그러면 굳이 규칙을 바꾸지 않아도 마리포즈는 내가 게이트를 여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조종을 할 수도 있다.
“마리야, 나하고 같이 마나뱅크의 자아에 접속을 해 보자. 제대로 문의를 하려면 네 자아의 분석이 필요한데 그건 참을 수 있지?”
“렌 경이 원하시면 자아분석 정도는 참을게요.”
인공자아가 가장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자아의 강제변환과 분석인데 마리포즈는 전혀 기분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승낙한다.
얘가 참 착하긴 착하단 말이야.
“좋아. 그러면 일단 방 안에 방어막을 쳐라.”
“예.”
마리포즈는 렉스의 목띠를 이용해 결계를 쳤다. 이렇게 되면 서피가 결계의 관리자가 되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안 한다.
자아접속은 내 의식이 유체이탈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도중에 외부에서 심한 자극을 받으면 무척 위험하다.
“렉스야, 너도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끄응, 끙
렉스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척 하겠다는 표시다.
이로써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나는 마리포즈의 손을 잡았고, 로엔의 계좌에 접속했다.
엘시아가 모든 계좌를 해제해 버리는 바람에 마스터 계좌인 로엔의 계좌 이외에는 모두 사라지고 마나는 계좌 없는 공간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로엔의 계좌는 해제가 불가능한 계좌고, 마나뱅크의 자아에 직접 접속이 가능한 유일한 계좌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지지직 하고 잡음이 흐른다. 역시 로엔의 계좌는 내 계좌가 아니기 때문에 잡음이 없을 수는 없구나. 나는 두통이 생기려는 것을 견디며 조심스럽게 마나뱅크의 자아에 접속했다.
“자아접속, 팔로워 연결.”
파앗
눈앞에 컴컴해지며 내 의식이 끝없는 구멍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났다. 전신의 감각이 서서히 마비되며 나 이외에는 오직 손에 잡고 있는 마리포즈만이 느껴졌다.
곧 손의 감각도 사라지고 나와 마리포즈가 어두운 공간에 떠 있는 듯 한 느낌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느끼는 거다- 만 남았을 때, 앞쪽에 또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것은 말하자면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감으로 이 공간 자체와 동화되어 있었다.
[마스터, 용건을 말해 주십시오.]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목소리, 역시 딱딱하다. 감정이 전혀 없는 자아와 대화를 하는 것은 조금 피곤한 일이기는 하지만 얘도 내가 만든 자아니 애정을 가지고 대해야겠지.
“마나뱅크, 보조자아 지정을 신청한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게이트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네 안에 있는 마나의 덩어리는 너무 커서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제어가 힘들어.”
[요청 분석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라면 기다려야지. 마나뱅크의 자아는 내 요청이 규칙에 어긋나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규칙 안에서의 변화라면 거의 무조건 승낙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접속을 할 수 있는 계좌는 마스터 계좌뿐이기에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규칙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청을 철회하거나 조정해 주십시오.]
윽, 걸리는구나.
“어떤 부분이 문제지?”
[보조자아가 게이트를 관리하면 마스터의 허락 없이 마나를 방출할 위험이 있습니다. 최소한 보조자아가 마스터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따르고 임의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윽, 그렇구나.”
마나뱅크의 말이 맞다. 나는 마리포즈를 믿지만 마나뱅크는 마리포즈를 믿을 수 없겠지.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
내가 마땅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고민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마리포즈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건 간단해요. 내 자아 중 일부를 마나뱅크와 동기화 할게요. 그러면 렌 경이 접속해서 명령을 내리는 거에 반응해서 게이트를 관리할 수 있고, 유사시 마나뱅크도 제 행동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요.”
“뭣? 네 자아의 일부를 변형하겠다고!”
“렌 경에게 필요하면 기꺼이 변형하겠어요.”
“마리야…….”
“렌 경, 저는 렌 경이 연구소에 오셔서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어요. 자아의 일부가 바뀌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저에게 움직일 수 있는 육체를 주시고 연구실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신 렌 경을 위해서 힘이 되고 싶어요.”
얘가 날 감동시키네. 사실 너를 데리고 나온 것은 나 편하자고 한 일이기도 한데 말이야.
나는 더 이상 말을 못 했다. 그러자 마나뱅크가 대신 대답을 했다.
[조정 접수. 규칙에 어긋나지 않은 요청으로 인정합니다. 지금 변형하겠습니까?]
“렌 경, 최종 승인을 해 주세요.”
“그래, 최종 승인. 마나뱅크, 부탁해.”
[승인 확인, 변형 시작.]
드드드드드드
공간이 변형되어간다. 마리포즈의 몸이 분해되어 어둠과 동화되는 게 느껴졌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고통이겠지? 영혼의 일부가 깎여나가는 고통.
곧 내 의식에 마리포즈의 의식의 일부가 연결되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나뱅크와 접속한 상태에서는 마리포즈와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변형 완료. 자아네임 마리포즈, 마나뱅크의 게이트 관리 보조자아로 설정.]
파앗
용무가 끝나자 자동적으로 연결이 끊겼다. 마나뱅크는 효율만 따지는 자아라 일이 끝나면 바로 가는 것이다.
나는 현실로 돌아옴과 동시에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마나뱅크와의 연결을 끊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내 손을 잡고 있는 마리포즈는 아직 연결이 끊이지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마리야…….”
얘가 깨어나면 어떻게 변할까? 자아의 변형은 일부라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마나뱅크처럼 감정이 점점 사라질 수도 있다.
나는 걱정 반 불안 반의 심정으로 마리포즈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