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94화
“여기는?”
1층의 방 중 하나인가 보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없었다.
“으, 어지럽네.”
마나도 거의 고갈되고 피도 많이 흘렸다. 당장 바닥에 쓰러져 기절할 것 같지만, 여기서 기절하면 평생 못 깨어나고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 안 되지.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말 최후의 마나를 쥐어짜서 마법을 시전했다.
“투명!”
파앗
내 눈에 내 모습이 반투명하게 보인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예 안 보이겠지.
나는 칼론 2세를 어깨에 짊어지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몇몇 병사들이 보였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난리에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지만 투명 마법을 꿰뚫어볼 수 있는 장비는 없는 듯 했다.
조심해야 한다. 이미 경계 마법진은 발동 되었으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걸린다.
아까 걸린 메이즈도 황궁에 방어설비를 한 체프코트 가문의 실력을 얕봤기 때문이다. 내 감각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함정은 정말 보기 드문데, 이곳에 쳐진 방어설비가 바로 그렇다.
나는 감각을 집중시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나아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거인의 허리띠를 차고 있어서 칼론 2세를 짊어져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은데, 그냥 체력이 완전 바닥이다.
거기에 뿌우를 소환한 상태라 마나가 계속해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미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서 쓴 상황인데 정령소환을 유지하고 있으려니 피가 수증기로 변해 증발하는 느낌이다.
뿌우도 상황을 알 테니 마리포즈에게 세리아 공주를 넘긴 후에는 알아서 소환해제를 할 텐데,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문제가 있나보다.
적어도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가야 한다. 마리포즈와 렉스, 서피, 그리고 렉스의 목띠가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수는 있다.
털썩
으,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렸네. 바닥에 쓰러진 나는 더 이상 몸이 말을 듣지 않음을 깨달았다. 걷기는커녕 지팡이를 쥐고 있을 힘도 없다. 의식도 점점 흐려져갔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삼켰다. 고통과 피의 맛이 나의 정신을 조금 일깨웠다.
[뿌우야, 어디냐?]
이판사판이다. 나는 뿌우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띠링띠링 하고 알람이 울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황궁 내에서는 함부로 텔레파시를 써서는 안 되는구나. 그것도 가장 방비가 심한 1층에서는 말이야.
이제 곧 근위병들이 달려오겠지. 투명 상태라고 해도 곧 위치를 들킬 거야.
[지금 마리포즈에게 세리아 공주를 넘겼당. 중간에 정령 경계막이 있어서 뚫느라 힘들었엉.]
뿌우의 목소리도 힘이 없다. 잡음도 심하고. 그래도 아직 교신이 되니 얼마나 다행이야.
[내 위치 찾아서 다 같이 이쪽으로 와줘. 서둘러. 콜레스 2세가 먼저 오면 힘들다.]
[알았당. 지금 간당.]
파직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 들며 텔레파시가 끊겼다. 황궁 측에서 차단막을 발동시켰나보다. 그래도 마법사들이 없어서인지 대응이 조금씩 늦는다.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좀 쉬자.
멍 하니 바닥을 보고 있으니 내가 흘린 핏자국이 선명하다. 이런, 피는 투명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대로 있으면 그냥 나 여기 있소 하고 선전하는 꼴이네.
“끄응.”
나는 억지로 몸을 뒤집어 벽 구석에 붙었다. 핏자국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기둥 뒤로 숨은 것이다. 근위병들이 나를 조금이라도 늦게 찾으면 찾을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죽을 정도로 힘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장 간단한 결계라도 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하다.
“여기다!”
드디어 근위병들이 왔다. 그들은 곧 내가 흘린 핏자국을 발견하고 주변을 살폈다.
저놈들이 내가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나 근위병들은 일부만 사방을 뒤지고 나머지는 바로 내가 있는 기둥 뒤로 걸어왔다. 몸을 뒤집어 움직이면서 흘린 피가 기둥 뒤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속이려야 속일수가 없다.
툭
“여기 뭐가 걸린다!”
“투명 마법인가?”
근위병 하나가 칼을 뽑아 내를 내리쳤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강식장갑로브는 마법검으로도 벨 수 없는 재질. 팍 하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무사했다.
“확실히 여기 뭐가 있다!”
그래, 나 여기 있다. 어쩔 건데?
근위병들이 자꾸 칼로 날 내리친다. 이렇게 충격을 받으면 투명 마법은 금방 깨어진다.
스스슥
내 모습이 드러나자 근위병들은 움찔하며 일단 뒤로 물러섰다. 최후의 발악을 할까봐 경계하는 거겠지?
미안한데, 나 정말 발악할 힘도 없어. 그 힘 있었으면 벌써 빠져 나갔을걸?
“핫, 폐하!”
근위병 중 하나가 칼론 2세를 알아보고 외쳤다.
얘들이 놀라는 것을 보니 아직 콜레스 2세가 부활한 것을 모르네.
이곳은 외궁이다. 아무래도 콜레스 2세는 내궁을 수비하는 근위기사와 근위병만 제압을 한 것 같다.
하긴, 외궁에 근무하는 근위병은 기본적으로 출퇴근을 하는 자들이 많으니 이들까지 다 제압하려면 수도의 기사들이나 귀족들 대부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다.
근위병들은 서둘러 칼론 2세를 나로부터 끌어내며 나의 얼굴을 칼로 찌르려 했다. 황제의 안위를 위해 나를 바로 죽이려는 거다.
이봐, 그렇게 찌르면 나 죽잖아.
나는 얼른 로브를 얼굴까지 뒤집어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근위병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를 보호해라. 내궁에서 마족과 관련 있는 괴물이 나왔다.”
“뭐라고?”
근위병이 공격을 멈췄다.
“괴물은 아론 경을 제압하고 폐하를 손에 넣은 후 황제 행세를 하려 한다. 어서 폐하를 데리고 체프코트 가문으로 탈출해라. 안 그러면 제국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으음.”
근위병은 내 말에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였다. 그는 나를 알고 있다. 내가 마족과 싸우는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전 황제가 마족의 계약자에게 암살당했다는 것도 안다.
현 황제인 칼론 2세는 여기 있다. 그가 깨어나기 전에는 내 말이 진짠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어서 서둘러.”
나는 다시 재촉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물론 그들이 내 말만 믿고 칼론 2세를 데리고 황궁을 빠져나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칼론 2세가 더 이상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도 싫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시간. 이대로 모두가 멈춰서 있으면 만족한다.
“아악! 괴물이다!”
왔다. 내 동료가. 근위병이 놀라 방 밖을 볼 때, 마리포즈와 렉스는 이미 방문 바로 바깥쪽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렉스의 목띠로부터 튀어나온 하얀 색의 서피가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사방의 병사들에게 검은 마기를 뿜고 있었다. 서피의 특기 중 하나인 독마기다.
저 독마기가 섞인 공기를 마시면 보통 인간은 숨을 쉴 수 없다. 외부의 근위병들은 이미 다들 질식하여 괴로워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있당. 그럼 난 들어간당.”
뿌우가 날 확인하고는 슉 하고 사라졌다. 여기까지 길안내를 하느라 소환을 유지했지만 내 상태를 보고 바로 스스로 소환해제를 한 것이다.
가슴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있다가 내린 느낌이다. 뿌우에게 흘러 들어가던 마나가 멈추니 조금은 살만 했다.
“마리포즈야. 황제 챙기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자.”
“예.”
콰쾅
마리포즈가 몸통박치기를 하자 칼론 2세를 부축하던 근위병 대여섯이 버티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마리포즈는 칼론 2세를 한 손으로 잡아 허리에 끼고 다른 팔로 나를 잡아 일으켰다.
“죽어랏! 역도!”
카캉
근위병들이 마리포즈를 공격했지만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전신갑옷은 내 강식장갑로브와 비슷한 수준의 방어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마리포즈가 일단 전투형이 되면 전신의 고통을 무시할 수 있고 재생력도 트롤 수준으로 올라간다. 힘과 속도는 말할 것도 없다.
한 마디로 최고 등급의 전투병기라 할 만 하다. 크리드 경이라고 해도 마리포즈를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다.
“빠져나갑니다.”
휘익
마리포즈는 바로 몸을 날려 렉스의 등 위에 올라탔다. 렉스의 등 위에는 이미 세리아 공주가 잘 묶여서 매달려 있었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서 렉스의 목띠를 잡았다. 강력한 마나의 힘이 느껴지니 내 몸이 조금은 편해졌다.
“재생 가동.”
드드드득
아윽, 재생을 했더니 급격한 고통이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너무 부상이 심해서 아예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나 보네. 죽기 직전에 살아난 셈인가?
어쨌든 살았다는 생각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렉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서피는 여전히 사방에 독마기를 뿌려댔고, 근위병들은 거의 숨을 쉬지 못했다.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린다. 마나 고갈 현상이 계속되다가 겨우 살만해지자 억눌렸던 심장이 이런 식으로 괴롭히면 확 멈춰버린다고 시위하는 것 같다.
역시 마나뱅크가 좋긴 좋구나. 몸 안의 마나를 쓰니 체력적인 손실이 장난 아니다.
마리포즈는 렉스의 등 위에서 대검을 풍차처럼 돌리며 달려드는 근위병과 근위기사들을 쳐냈다. 그리고 렉스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의해 흥분을 하기 시작하니 드디어 목띠의 마나가 렉스의 기운에 동화되어 빛의 가루처럼 퍼져 나왔다.
사라라락
렉스의 털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러면 렉스의 몸 자체가 거대한 결계처럼 변해 무기도 마법도 소용이 없게 된다. 마족의 계약자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방비인 만큼 콜레스 2세가 직접 나오기 전에는 안전하다.
나는 어느 정도 마나가 돌아오자 다시 뿌우를 불러냈다.
“뿌우야. 콜레스 2세가 오는지 살펴봐라.”
“알았당.”
뿌우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사방을 살폈다.
설마 대놓고 외궁까지 나오지는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른다. 접근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차리면 빠져나갈 확률이 높다.
그러나 콜레스 2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의 공격이 제대로 먹힌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우리는 결국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체프코트 가문으로 달려가 부가주인 마이어 체프코트를 만났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뿌우를 먼저 보내 전갈을 했는데, 마이어 경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뿌우의 말만 듣고도 바로 가문의 입구까지 나를 마중 나왔다.
“어떻게 된 건가?”
“콜레스 2세가 되살아났습니다. 아론 경은 잡혔고, 여기 카론 2세와 세리아 공주는 마기에 의해 세뇌 당했는데 겨우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가!”
“어쩌면 곧 황궁에서 근위대가 나와 이곳을 공격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론 경이 콜레스 2세에게 굴복할 수도 있습니다.”
“으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군. 알았네. 대비를 하도록 하지.”
마이어 경은 상황이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 수도의 각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귀족들에게 전갈을 가져간 마법사들 중 태반이 급하게 다시 돌아와 말했다.
“이미 우리 체프코트 가문에게 역적모의의 죄가 떨어졌습니다. 북부 수도 방어군이 직접 출군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내가 마이어 경에게 묻자, 마이어 경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서 실수를 했군. 수도 방어군을 출동시킬 수 있는 권한은 황제 폐하에게만 있네. 그런데 황궁에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그쪽이 폐하도 없는 상황에서 월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북부 수도 방어군의 지휘관은 돌튼 장군. 고지식하지만 융통성이 있는 분이니 우리가 직접 폐하와 함께 가서 돌튼 장군을 설득한다면 틀림없이 우리 편이 되어 줄 것이네.”
아항, 그렇지. 황제는 여기 있는데 칙명이 가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누구 이름으로 칙명을 내릴 수 있겠어? 이미 죽은 콜레스 2세의 이름?
콜레스 2세는 자신이 황제라 생각하고 있기에 상황이 급해지니 스스로 칙명을 내린 모양이다.
마이어 경, 역시 최고 마도가문의 부가주답게 상황판단이 빠르네.
“그래도 혹시 모릅니다. 돌튼 장군이 이미 세뇌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지요.”
“마족에게 세뇌를 당했다면 알아보기가 쉽지 않겠군. 혹시 방법이 있는가?”
“뿌우를 보내겠습니다. 정령의 시선으로 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요.”
정확하게는 뿌우와 시야공유를 한 내가 확인하는 거지만 그게 그거지 뭐.
우리는 곧 뿌우를 보내 돌튼 장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돌튼 장군은 아직 세뇌를 당하지 않았고, 마이어 경의 말대로 우리는 북부 수도 방어군과 힘을 합쳐 오히려 황궁을 향해 진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내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