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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93화 (93/250)

로엔의 마나뱅크 93화

이론 적으로 지하에서 위로 땅을 파고 올라가면 1층 바닥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파다가 곧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런, 지하에서 침투하는 걸 막아놨군.”

이 느낌은 잘 알고 있다.

바로 메이즈 마법이다. 공간을 비틀어 미로를 만들어 놓는 8서클 마법. 들어갈 때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가면 그냥은 빠져나올 수 없다.

8서클 마법을 지하에 설치해 놓다니. 체프코트 가문도 만만히 볼 곳은 아니네.

나는 일단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파고 온 땅굴의 입구를 보았다. 웃기는 게 일직선으로 팠는데 땅굴이 지렁이처럼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었다.

“이거 다시 기어나가도 입구로 안 나가지겠지?”

공간 왜곡이란 게 원래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한 줄기 땅굴을 팠는데 돌아서 나갈 수 없는 게 바로 8서클 마법의 신비함이다.

어떻게 할까? 내가 고민할 때 구멍 바깥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크, 쥐새끼가 이런 곳에 갇혀 있었군.”

망했다. 결국 콜레스 2세에게 따라잡혔네. 저놈은 지금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저놈이 볼 때 이 땅굴은 일직선인 거지. 난 아니고.

“짐은 네놈에게 딸을 주고 제국의 중신으로 삼으려 했는데, 감히 황태자와 공주를 납치해 도망가다니. 네놈에게 제국의 고문과 처형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도록 하지.”

“미안한데, 아직 날 잡은 건 아니잖아? 그런 말은 잡은 다음에 말하라고.”

이판사판이다. 나는 콜레스 2세에게 반말을 했다. 그리고는 기절해 있는 칼론 2세를 앞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나에게는 칼론 2세가 있지. 섣불리 공격해오면 나보다 칼론 2세가 먼저 죽을 걸?”

어느 쪽이 악당인지 모를 대사를 내뱉으며 나는 일단 계속해서 땅굴을 팠다. 콜레스 2세가 나를 어느 정도 거리에서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할 필요가 있다.

“흥, 네놈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슈슈슉

윽, 촉수다. 저놈이 촉수도 다 있네.

메이즈 밖에서 저렇게 신체 일부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면 안에 갇힌 사람은 고생하게 되는데, 쩝. 그 고생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짜증나네.

“실드!”

티티티팅

입구에 방어막을 치니 촉수가 튕겨나갔다. 그러나 튕겨나간 촉수가 땅을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내 머리위쪽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에잇, 라이트닝 커터!”

촹, 파지지직

지팡이에서 뇌전의 기운을 머금은 창날이 튀어나오며 촉수를 잘라냈다. 뇌전의 기운으로 절삭력을 강화한 창날은 금속도 단숨에 잘라낼 수가 있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그 지팡이는 굉장한 보물이구나. 네놈이 아닌 아론 경이나 이반 경이 들고 다녀도 될 만한 아티팩트라니. 그것도 이리 내놔라!”

콜레스 2세의 웃음소리에 탐욕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저 괴물이 남의 물건을 탐내다니! 두고 보자.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잘라낸 촉수 조각들을 서둘러 주웠다.

“역시 이것들은 마법금속이군.”

보물이 뭉쳐서 살아난 콜레스 2세의 촉수다. 촉수 역시 보물의 일부분인 셈이다. 거기에 마기까지 품고 있으니 흑마법의 재료로써는 꽤 훌륭한 것이다.

이정도면 아쉬운 대로 힘을 뽑아 쓸 수 있지.

나는 지팡이를 벽에 꽂고 주변에 촉수 조각들을 박아 넣었다. 마법진을 그릴 시간이 없으니 비상수단을 써야 했다.

“피의 힘이여. 나를 지켜라!”

내가 창날에 팔뚝을 가져다 대자 피가 튀었고, 피는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기묘한 문양을 만들어냈다.

마녀들이 쓰는 피의 마법진이다. 피와 함께 몸 안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힘이 좌악 빠지는 게 상당히 기분 나쁘지만 지금을 넘기는 게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

촤아아아아

마법이 완성되자 검은 안개가 굴을 타고 급격히 퍼져나갔다.

미로 안에서 방어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안쪽에서 또 다른 미로를 만드는 것이다.

검은 안개의 미로는 흑마법 중에서도 꽤 쓸 만한 것으로 바깥쪽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안개 안으로 들어가면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게 되는 마법이다.

“아니, 네놈이 어떻게 흑마법을?”

“마족과 싸우려면 마족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흑마법사들 때려잡으면서 얻은 마법서로 익혔다.”

“크흠, 스승 없이 마법서만으로 흑마법을 익혔다고? 그리고 방금 전 사용한 수법은 마녀의 저주술인가?”

감탄스럽지? 흑마법은 일반 마법과는 이론체계 자체가 달라서 혼자 마도사라 해도 익히려면 오랜 연구시간이 필요하거든. 거기에 마족과 계약을 안 하면 고위 흑마법은 못 쓰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마나의 이용공식이 룬어로 이루어지는지 마족과의 연결로 만들어지는지만 달라. 이치를 알면 마족과 연결 안 해도 쓸 수 있거든.

나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내가 우려하는 부분은 콜레스 2세가 마법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검은 안개의 미로를 꿰뚫어 보거나 해제하는 건데, 눈치를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그러니까 저놈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힘만 센 괴물이라고 봐도 된다. 그 외에 마족과의 계약으로 얻은 능력이 좀 있겠고.

“역시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천재마법사답군.”

그래, 감탄하고 있으라고.

나는 콜레스 2세가 말을 하는 사이 지팡이를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검은 안개의 미로를 시전한 이유는 적의 시야를 가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안개가 퍼져나가는 느낌을 파악하니 대충 메이즈 미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이 갔다. 벗어나는 것은 무리라고 해도 안쪽에서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아 움직이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일직선이 아닌, 이리저리 구불구불하게 파 들어갔다. 메이즈의 경계를 벗어날 생각을 버리고 복잡하게 꼬인 마나의 흐름에 따라 길을 만들었다. 검은 안개는 여전히 사방으로 퍼지고 굴 안에 가득 찼지만 이것은 나의 피로 인해 만들어진 안개이다. 나의 시야는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사사사삭

묘한 소리가 들린다. 콜레스 2세가 무슨 짓을 했나보다. 촉수는 시야가 가려서 함부로 못 보낼 테고, 뭐지?

내가 살짝 긴장을 한 채 바깥쪽을 보니 작은 보석들이 바퀴벌레처럼 구멍을 타고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이걸 징그럽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횡재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가만히 보석 벌레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내 예상대로 그것들은 메이즈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구멍을 타고 들어오다 결국 방향성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이걸 보면 콜레스 2세는 마법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이다.

상대가 마법에 대해 잘 안다면 메이즈는 나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텐데, 아론 경은 구금되어 있고 체프코트 가문의 다른 마법사들은 마탑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메이즈가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콜레스 2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칼론 2세를 데리고 황궁을 탈출할 수만 있다면 덴판 제국의 군세는 칼론 2세의 명을 받고 콜레스 2세와 대적할 것이다.

만약 칼론 2세를 저쪽에 빼앗긴다면 세뇌당한 칼론 2세의 명으로 덴판 제국이 무슨 짓을 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의 확실한 것은 덴판 제국 제일의 적은 우리 데빌 베인이 될 거라는 점이다.

“그건 진짜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지. 내가 제국군 수십만과 싸우는 사태는 없어야 하는 거야.”

시체의 산을 쌓고 피의 바다를 만들어 대륙을 통일할 생각은 없다.

그런 대량 학살은 가능하면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게 목표인데 정복전쟁 따위나 하면서 낭비할 수는 없다.

“마족의 후계자들과 싸우는 것만도 더할 나위 없이 큰 민폐란 말이야.”

생각해보니 이가 갈릴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 내가 왜 이렇게 두더지처럼 구멍을 파고 피해 다녀야 하는 건데?

나는 구멍 바깥쪽을 보았다. 여전히 보석 벌레들은 방향성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수가 불어나고 있었다.

“좋아. 네놈이 그리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나는 땅굴 파는 것을 멈추고 창을 이용해 벌레들을 하나씩 찍어 잡았다. 그리고 그 보석들을 땅굴의 요소요소에 박아 넣으며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이미 메이즈의 공간 비틀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일정 거리까지는 헤매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는데. 계속해서 벌레들 수십 마리를 벽에 박으면서 나아갔다가 다시 안쪽으로 돌아오니 땅굴 안이 보석들로 인해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다.

그때, 바깥쪽에서 콜레스 2세가 외쳤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항복하고 짐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그러면 네 너를 중하게 쓰겠다. 하지만 거역한다면 내 주얼 버그들을 폭파 시키겠다. 황태자가 죽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놈을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 저 인간이, 아니지, 저 골렘이 극단적인 방법을 쓰려 하네.

설마 황태자까지 날려버릴 생각을 하다니. 쩝.

내가 흑마법까지 쓰는 것을 보고 정말 도망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폭파라. 이거 나쁘지 않네.

애초에 계획한 마법진에 폭파의 힘까지 주입한다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날 것 같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도 실험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이거 타이밍 틀리면 나 죽는 거 맞지? 그럼 안 틀려야지.

나는 급하게 대답을 했다.

“항복했다가 마기에 세뇌를 당하면 꼭두각시가 되는데 어떻게 항복을 할 수 있지? 내가 세뇌를 안 당한다는 보장을 해 주지 않으면 항복할 수 없다.”

“크크크, 짐에게 흥정이란 없다. 어쩔 수 없군.”

역시 말이 안 통하네. 그래도 말 몇 마디 하는 동안 준비는 끝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팔뚝에 피를 뽑았다. 마나도 거의 바닥나고 피는 너무 흘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 있을 힘도 없다고 할까?

그야말로 남은 힘을 모두 써서 다시 한 번 마녀의 피의 저주술을 사용했다.

스르르륵

피가 흘러 동굴 전체에 피의 마법진을 형성했다. 요소요소에 박힌 보석들이 마법진에 반응해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검은 안개는 그 빛을 빨아들이며 더욱 짙은 어둠의 장막을 형성했다.

겨우 타이밍이 맞았다. 다음은 네 차례다. 콜레스 2세!

콜레스 2세는 내가 마음속으로 부른 것에 대답하듯 말했다.

“그럼 죽어라. 자폭!”

콰콰콰콰콰쾅

주얼 버그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폭발력은 모두 강력한 마법력으로 변해 검은 안개 속에 빨려 들어가 파란 색 화염으로 변했다.

콰르르르르르

파란 불기둥이 땅굴을 타고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그것은 8서클 마법인 메이즈의 경계조차 부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사실 그 힘은 콜레스 2세의 능력인 주얼 버그의 자폭에 의한 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만든 마법진에 의해 힘의 길이 정해졌다. 바로 내가 판 굴을 따라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메이즈의 경계마저 뚫었기 때문에 파란 불기둥을 가로막을 것은 더 이상 없다.

“크아아아!”

콜레스 2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구멍 앞에 서 있다가 제대로 뒤집어 쓴 모양이다. 죽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격이 없지도 않을 걸?

“훗, 네 힘에 네가 맞은 거니 날 원망하지는 마라.”

나는 혼잣말로 콜레스 2세를 비웃으며 얼른 다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미 메이즈 마법이 깨어져 더 이상 안에서 헤매지 않게 되었다.

곧 나는 1층을 뚫고 지표면으로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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