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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91화 (91/250)

로엔의 마나뱅크 91화

“저는 세리아 공주님께서 영지에 계신 줄 알았는데, 언제 황도로 돌아오셨나요?”

“한 달 보름이 조금 넘었네요. 황태자 오라버니가 부르셔서 왔는데, 아바마마가 살아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아세요?”

“제가 들은 바로는요.”

세리아 공주는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했다. 그녀는 이미 반쯤 얼이 빠져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정도의 사고밖에 못 하고 있었다.

세리아 공주의 설명에 의하면 황궁보물창고에서 갑자기 보물들이 뭉쳐지더니 거대한 알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급히 아론 경을 불러 상황을 보려하는데, 아론 경이 보물창고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문이 닫히고 경계마법이 작동을 했단다.

그 후, 아론 경의 비명이 들리고 문이 열렸을 때에는 이미 골렘의 형태를 한 콜레스 2세가 한 손에 아론 경을 쥐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아바마마는 오라버니를 복종시키고 황실의 질서를 바로잡았데요. 아바마마의 명으로 외부에는 비밀로 했고요. 그 다음에 제가 이곳으로 오게 된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 아론 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바마마는 아론 경이 높은 경지의 마도사라 설득을 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단 지하 감옥에 가둔 후, 나중에 체프코트 가문이 정리된 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했어요.”

쯔쯔, 아론 경. 완전히 당했군.

마족의 후계자와 혼자 싸우는 것은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다. 하물며 보물창고의 경계마법이 발동된 상태에서 싸워야 했으니 그야말로 나보다 훨씬 지독한 함정에 빠진 셈이다.

“그런데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었나요?”

“아니요. 아론 경이 소식이 없자 곧 사람이 와서 확인을 하려 했데요. 하지만 그자는 아바마마와 대화를 나눈 후 그냥 돌아갔어요.”

세뇌를 당한 걸까? 아니면 설득을 당한 걸까.

어쨌든 세리아 공주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 보니 체프코트 가문은 지금 덴판 제국의 황실로부터 경고를 받고 근신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코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고 그냥 제국의 군제조직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양보를 하라는 식의 이야기였고, 아론 경의 구금은 반쯤 자발적인 것으로, 아론 경은 황궁 마법사직을 걸고 체프코트 가문의 권익을 위해 황궁 내에 머물면서 황제를 설득하고 있다는 식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아론 경이 세뇌를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8서클이 괜히 8서클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아론 경이 굴복하지 않는다면 제거를 당할 터인데, 지금 못 죽이는 이유는 체프코트 가문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 때문이다.

구금이라면 몰라도 죽이면 가문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알 가능성이 크다. 콘돌스핀 가문에서도 가주를 비롯한 탑주 정도 되면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마법을 걸고 다니니까.

문제는 아론 경이 스스로 콜레스 2세에게 넘어가는 경우다.

상대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마족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마나뱅크 사건 이후 아론 경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과거처럼 넘치는 마나를 마음껏 꺼내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몸속의 마나를 써야 하니 옛날 같은 자신감은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8서클은 대접받을 만 할 건데…….”

불의 정령까지 있잖아? 마음을 비우고 10년 정도만 수련하면 거의 옛날처럼 강해질 수 있다고.

“그 나이에 10년 수련은 힘들까?”

아무리 정령이 노화를 막아준다 해도 아론 경은 이미 나이가 꽤 있다. 체력적인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사고를 당했으니 어쩌면 이미 마법사의 자긍심이 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내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탈출.

원래 도망을 가려면 오랜 시간 조용히 있다가 상대가 방심을 했을 때 수를 쓰는 게 좋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시간을 끌 생각도 여유도 없다.

그렇다면 갇힌 직후 바로 도망가는 게 좋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심하게 사방을 살펴보았다. 혹시 나를 감시하는 마법적인 장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있네.”

무려 네 군데나 수상한 마정석이 박혀 있다. 작용하는 마나의 흐름을 살펴보면 방어나 경계가 아닌 탐색의 영역이니 틀림없이 감시를 위한 것이다.

누가 덴판 제국의 황실이 아니랄까봐 감시하는 데 쓰이는 마정석도 비급은 되네.

“비급 마정석 네 개라면 나쁘지 않군.”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방안의 가구들을 보았다.

“저 침대 기둥이 좋겠군.”

꽤 화려한 침대를 지탱하는 기둥은 원통형의 금속관이다. 그런데 이 금속이 평범하지가 않은 게 마기를 받아도 변하지 않게 마도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방에 있는 가구들은 쓸 만 한 마법재료인 것이다.

재료는 다 있다. 이제는 만드는 동안 감시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게 남았다.

무엇보다 앞에 앉아 있는 세리아 공주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세리아 공주는 내가 쳐다보자 나를 보며 기대에 찬 눈을 했다.

아 놔, 그런 그린 라이트는 키지 말라고요. 지금 상황이 그 상황은 아니잖아요. 내가 어쩌다가 저 눈빛의 의미를 알게 되서 이런 고생을 하는 걸까?

눈빛만 봐도 심장이 뛰는데, 마법사로써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 약점은 바로 여자였구나. 흑.

나는 냉정을 되찾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세리아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세리아 공주.”

“예.”

“폐하가 저에게 원하는 게 뭘까요?”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세요. 저를 통해 제국에 충성을 다할 마법사를 낳는 것. 그리고 렌 경과 같이 활동하는 이반 경과 미스틱 엑스 경을 이곳 황궁으로 초대하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만 다 하면 렌 경은 제국에서도 고위 귀족으로 살게 될 거라고 했어요.”

“그렇군요. 저는 이반 경과 미스틱 엑스 경을 유인하기 위한 도구군요.”

당연하겠지. 콜레스 2세가 경쟁자들 이외에 가장 경계하는 적은 8서클 마도사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그런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웬만한 마법은 아예 통하지 않을 터. 7서클 마도사까지는 얼마든지 감당할 자신이 있는 것 같다.

“제 일행인 마리포즈와 렉스는 어떻게 됐나요?”

“외궁에서 대기하는 중이예요. 혹시라도 위험이 있을지 몰라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지만요.”

얘가 정말 사람을 놀리는 듯이 이야기하네. 하지만 그건 고의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어떻게 하면 세리아 공주를 제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기왕이면 칼론 2세도 세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대로라면 덴판 제국 전체가 콜레스 2세의 손에 넘어간다.

하지만 칼론 2세만 제정신을 찾으면 콜레스 2세에게 제국의 군대가 넘어가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결해야 할 일이 점점 정리되는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아론 경이 그렇게 되었으니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당분간 황궁을 돕지 않을 거고, 그걸 다시 말하면 지금 황궁에는 마법사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과도기적 현상인데, 마법사의 힘이 갑자기 약해지면서 기사를 중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의 역할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마법사들도 다시 새로운 위치로 돌아와 서로 조화를 이루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라는 거지.

결국 지금 황궁 경비는 기사나 근위병에게만 의존한 형태이니 빈틈이 많다고 봐야 한다.

좋아. 이제는 움직이자.

“잠시 저를 도와줄 수 있나요?”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그럼 잠시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공주와 함께 침대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마정석 중 두 개를 가리는 위치에 공주를 세웠다. 나는 반대편에 섰는데 이것으로 공주와 내 등이 감시하는 마정석을 모두 가린 셈이 되었다.

나는 세리아 공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렌 경?”

세리아 공주는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나를 불렀지만 지금은 대답할 여유가 없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바닥에 간이 마법진을 그렸다.

수련생 시절에나 그린다는 1서클 마법진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1서클도 소중하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 공주가 신고 있는 신발에 붙어있는 장식용 보석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내 강식장갑로브 안감으로부터 몇 가닥의 실을 뽑았다.

이 로브에는 방어적인 것 이외에는 어떤 마법적인 장치도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안감에 여분으로 천과 실을 끼워놓아서 혹시라도 로브가 손상을 입었을 때 수선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질긴 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보석에 마력을 주입하며 실을 연결했다. 마법을 억제하는 수갑을 차고 있었지만 이정도 미약한 마력은 손가락 끝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다.

마법에 반응한 강식로브장갑의 실이 보석에 달라붙었다.

나는 그것을 마법진 위에 놓고 진을 발동시키며 1서클 마법을 하나 사용했다.

“경화!”

지잉

실이 바늘처럼 변했다. 이러면 또 훌륭한 도구가 되는 거다. 나는 그것을 수갑의 열쇄 구멍이 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철컥

수갑이 풀렸다. 이제 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지팡이는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을 강화하는 역할이지 없다고 마법을 못 쓰지는 않는다.

-띠링, 띠링, 띠링

마법 감지 경계가 작동했다. 조금 늦네. 마법진 발동한 후 3초는 지났는데.

곧 문이 벌컥 열리며 근위병들이 뛰어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웹!”

촤악

내가 실과 보석 중 몇 개를 문 쪽으로 던지며 주문을 시전하자 그것은 거대한 거미줄로 변해 문을 막았다. 단순한 2서클 마법이지만 근위병들은 피하지 못하고 거미줄에 달라붙어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불로 태워. 웹 마법은 불에 약하다.”

뒤쪽에서 근위병 중 하나가 외쳤다. 확실히 2서클 마법인 웹은 질긴 거미줄로 통로나 문을 막는데 효과적이지만 불에는 금방 타 버린다.

그런데 그건 일반 웹이고, 내가 보석과 강식장갑로브의 실을 매개체로 쓴 웹은 조금 다르다.

질기기는 일반 웹의 열배 이상이고, 불에도 안 탄다.

입구는 막았으니 이제 마음 놓고 작업을 해 보자.

“렌 경! 소용없소. 그대가 무슨 짓을 해도 이 방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오.”

거미줄에 걸린 근위병 중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근위병이 저렇게 목소리가 거칠까? 욕만 안 했지 누가 들으면 용병인 줄 알겠네.

나는 그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벽에 가서 마정석을 뽑아내었다. 쉽게 뽑히지 않게 되어 있기는 한데 나에게는 보석과 실이 있다.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정석을 하나하나 빼 내었다.

타타타탁

벽 속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밀문이 있었나보네. 저기군.

벽이 열리려 하는 순간 나는 몸을 날려 다시 웹 주문을 시전 했다. 마정석을 빼낸 후라 보석과 실을 모두 사용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침대만 부수면 되는 거지.”

문제는 지금 나는 거인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건데, 아이템이 없으면 그냥 강화마법으로 때우면 되지.

“스트랭스!”

근력의 힘이 순식간에 2배로 불었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한 나라서 이정도면 근위기사 정도의 근력은 쓸 수 있다.

콰직

침대를 지탱하는 기둥 하나를 통째로 뽑아내었다. 나는 그 기둥 양쪽에 마정석을 두 개씩 끼우고 서둘러 표면에 마법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식을 그리는 재료 역시 방안에 있다. 마기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진, 그 중 일부를 건드렸다. 나는 이미 그것들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보조적인 부분은 해제하고 거기에 쓰인 재료를 썼다.

“마법은 나의 친구, 재료는 나의 장난감. 이곳은 나의 놀이방.”

콧노래를 부르며 작업을 하니 옛날 공방에서 신나게 제조를 하던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그땐 정말 재미있었지. 재료도 팍팍 쓸 수 있었고 말이야.

그 사이 문 밖에 근위병과 근위기사가 점점 늘어났다. 그 중 하나가 마법검으로 거미줄을 잘라내기 시작했는데, 상대의 마법검도 꽤 훌륭한 물건인지 카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이 한두 가닥씩 잘려나갔다.

상황은 급하지만 서두르지는 말자. 마법식은 조금만 틀려도 작동이 안 하니까 확실하게 그려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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