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90화
덴판 제국의 황궁은 언제보아도 웅장하고 호화롭다.
황제인 칼론 2세는 내가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환대하는 영접관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따로 숙소를 잡지 않고 수도의 관문에서 황궁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황궁 내부로 들어가면서 보니 역시 소문처럼 마법사가 몇 명 보이지 않고 근위기사들이 이전보다 몇 배나 늘어나 있었다.
아론 경의 체프코트 가문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려나?
당장 다음 칼론 2세의 탄생일에 초대장 좌석 번호가 궁금하다. 이전까지는 무조건 아론 경이 1번 이었고, 그 뒤로 10대 가문이 줄을 섰었다. 거의 50번까지는 마법사로 채우는 게 관례라고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기사들을 우대하기로 결정한 이상 순번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크리드 경이 1번 좌석을 받게 될 지도 모르지. 정령기사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거의 확실하게 3번 이내의 초대장을 받게 될 거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아론 경처럼 8서클 마법사가 바로 푸대접을 받을 리는 없겠지.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칼론 2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식 알현은 내일 이루어질 거라고 했고, 오늘은 비공식적인 인사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집무실로 들어간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아, 젠장.’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칼론 2세의 눈빛으로부터 마기가 느껴졌다. 설마 덴판의 황실에 콜레스 2세의 후계자가 남아 있었나? 황위의 후계자가 아닌 마족의 계약을 이어받은 후계자 말이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어.
콜레스 2세를 화끈하게 보물에 파묻혀 죽게끔 제거한 걸로는 사태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어쨌든 칼론 2세는 이미 마기에 푹 빠져 있는 게 확실하다. 이건 일반 마법으로는 알아볼 수 없고, 탐지도 안 된다. 이걸 알아보는 것은 나와 이반 경만의 특권이다.
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칼론 2세의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렌 브로스마이어가 인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만만세.”
칼론 2세는 웃으면서 내 인사를 받고는 손짓으로 근위병들을 모두 나가게 했다. 심지어는 자신을 호위할 최소한의 근위기사도 남기지 않았다.
나를 믿어주는 것일까?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이러는 거지?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다.
칼론 2세는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그런데 내 자네를 위해 말해주는 거지만 호칭과 인사말을 고치는 게 좋겠군.”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폐하.”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게. 표면적으로는 내가 제위에 올라 있지만 사실은 아직 선황께서 살아계시니 말이야.”
“선황께서 살아 계시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후계자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놈이 안 죽은 거였어? 으, 미치겠다.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자 칼론 2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침 나오시는군. 선황께서 렌 경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네.”
둥
벽 너머로 징 소리가 울리더니 벽이 스르륵 하고 갈라졌다. 비밀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쪽에서 쿵, 쿵, 쿵 하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리면서 거대한 덩치의 무엇인가가 걸어 나왔다.
그것은 거의 3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골렘이었다. 작은 거인 사이즈의 골렘이라 그런지 무게감이 장난 아니었는데, 전신에 마기가 철철 넘쳐흘렀다. 놀랍게도 그 골렘은 각종 보물이 뭉쳐져서 이루어져 있었다.
이름하여 트레져 골렘.
황금과 백은, 그리고 보석과 심지어 마법 아이템들이 하나로 뭉쳐서 몸체를 이루는데 강력한 마기는 마법무구의 힘을 받아서인지 더욱 강력하게 사방으로 기운을 퍼뜨렸다.
이정도면 일반 사람도 몸으로 느낄 정도의 마기다. 오래 접하면 의식이 붕괴되어 발광할 정도랄까?
하지만 이미 마기에 취한 칼론 2세는 전혀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황홀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쿠우, 쿠우
황제라 불린 트레져 골렘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대로 내 앞까지 다가와 옥좌에 앉았다. 어쩐지 옥좌가 저번보다 훨씬 크게 바뀌었다 했더니 주인의 사이즈에 맞춰서 새로 만들었군.
나는 도망갈까 생각하다가 그냥 작은 한숨을 쉬며 그대로 서 있었다.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무례하군. 폐하의 앞이니 인사를 드리게.”
칼론 2세가 나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분이 설령 콜레스 2세라 할지라도 저는 인사를 할 수 없습니다. 골렘은 황제가 될 수 없으니까요.”
쿠우, 쿠
트레져 골렘이 숨을 멈추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금속이 긁히며 나는 소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말이기는 했다.
“짐은 살아서 황제였으니, 죽어서도 황제다.”
“정말 콜레스 2세 폐하시군요. 언데드로 살아난 겁니까?”
“크, 크, 크. 그건 짐도 잘 모른다. 하지만 짐이 무엇이든 상관은 없다. 여전히 제국은 짐의 것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물은 짐의 소유물이다.”
“그건 동의하기 어렵군요.”
배짱이다. 어차피 이놈들은 나를 함정 속에 빠뜨린 것이다. 하지만 함정에 빠졌다고 당황해서 겁에 질려 떨 필요는 없지.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나를 죽일 셈일까?
조금이라도 빨리 이놈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어 그에 따른 대응을 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원하는 게 내 목숨이라면 나도 목숨 걸고 도망을 가야하는 거고.
눈치를 보니 죽일 것 같지는 않다.
세뇌인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콜레스 2세의 붉은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뱀처럼 스물스물 다가와 내 주변을 둘둘 감았다. 물론 나는 그게 다 보였지만 적어도 이자들은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내 몸속에 마기를 심을 생각이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몸을 떨었다. 몸에 걸어놓은 항마 마법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짐작했던 대로 콜레스 2세께서는 마족의 계약자였군요. 저에게 마기를 심으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백마법으로 방어되어 있으니까요.”
“쿠우, 쿠. 그렇군. 9서클 백마법이라 깨기도 쉽지 않아. 이로써 명확해졌어. 짐을 시해한 것은 바로 너희 데빌 베인이야.”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요.”
시치미다. 여기는 딱 잡아떼고 보자.
“쿠우, 쿠. 공주를 보낸 게 실수였어. 설마 이반 경이 마기를 눈치 챌 줄이야.”
“세리아 공주?”
벽 뒤쪽으로부터 세리아 공주가 걸어 나왔다. 칼론 2세처럼 눈동자가 검게 변한 것이 이미 마기에 의식이 제압된 상태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리아 공주는 과거 콜레스 2세가 몸속에 마기를 심은 후 나에게 보낸 바 있다. 그래서 이반 경과 함께 그 마기를 감싸는 백마법 보호마법을 걸어 놓았는데, 그 기운이 사라졌다. 공주에게 건 마법은 지금 나에게 걸려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시간을 들이면 내 방어 마법도 풀 수 있다는 거군.
콜레스 2세는 다시 말했다.
“짐은 누가 짐을 시해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그런데 공주를 자세히 살펴보니 알겠더군. 네놈들은 이미 짐의 정체를 알고 만나러 온 거야. 짐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가요?”
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냥 이반 경이 알아서 한 일이니 나는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마리포즈와 렉스, 서피는 외궁에서 대기 중이다. 거리가 있으니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없다. 어쩌면 그들도 위험할지 모르겠군.
내가 태연하게 반응하자 콜레스 2세는 웃었다.
“쿠, 쿠, 쿠. 역시 데빌 베인이 차세대 리더로 지목할만한 담력이로군. 어쨌든 좋다. 그대는 내가 공주를 주기로 약속했으니 부마로써 대우해주지. 오늘부터 후궁에 머물며 공주와 지내도록 해라.”
“공주께서 지금 정상이 아닌 듯하니 곤란하군요. 그리고 저는 데빌 베인의 회원으로 마족의 계약자와 싸우기로 맹세한 몸입니다. 마법사는 맹세를 어길 수 없어요.”
“마법의 시대는 갔다. 그리고 그대는 곧 나의 호의를 감사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세뇌할 자신이 있다는 거군. 나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근위기사들이 와서 내 양팔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내 몸을 뒤져 아공간 주머니를 비롯해 내가 지닌 소지품을 모두 압수했다. 심지어는 강식장갑 로브까지 벗겨내려 했지만 이놈은 내가 벗지 않으면 절대 벗겨지지 않는다.
근위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콜레스 2세를 보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옷에는 방어력 말고는 특별한 기능이 없는 듯하다. 놔 둬라. 나중에 알아서 벗을 테니.”
안 벗을 거거든. 그리고 지금 가져간 물건도 다 다시 찾을 거야.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다행히 지팡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중요 물건들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었기에 따로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인의 벨트는 빼앗겼는데, 이게 풀리니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대항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발악을 할 걸 그랬나? 아공간주머니에서 지팡이를 빼서 뿌우를 소환하고…아니지.
이자가 나를 세뇌할 생각이라면 지금 무리할 필요는 없어.
나는 참기로 했다. 상황을 조금 더 보면서 콜레스 2세가 어떻게 살아났는지도 확인하도록 하자.
콜레스 2세도 어차피 내가 세뇌되면 스스로 아공간주머니의 물건들을 꺼낼 거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재촉하지는 않았다.
탈탈 털린 나는 근위기사들에게 끌려 후궁에 있는 한 방에 갇혔다. 말이 방이지 창문도 없는, 조금 넓은 감옥과 같다.
무엇보다 사방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으로부터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여기 있으면 진짜 언젠가는 방어마법이 해제될 것 같았다.
“대단하군.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진을 마기 버젼으로 바꾼 건가?”
상당한 수준이다. 9서클 방어마법을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마법진 역시 9서클이라는 뜻이다. 아론 경이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애초에 마기를 주입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다른 용도로 쓰였던 것 같다.
내가 한참 방 안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세리아 공주가 들어왔다.
그리고 공주를 들여보낸 근위기사는 바로 문을 닫고 아예 밖에서 잠가버렸다. 진짜 얘들이 왜 이래?
“공주님, 괜찮습니까?”
“아바마나가 저에게 렌 경의 아이를 낳으라고 명하셨어요.”
우왓! 안 돼!
나는 세리아 공주가 옷을 벗으려는 것을 얼른 잡아서 말렸다.
“진정하시고 일단 대화나 조금 나누죠.”
“좋아요. 급할 것은 없으니. 며칠 내로 렌 경께서도 아바마마를 따르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예, 예. 잠깐만요. 거기 의자에 앉아 계세요.”
다행히도 내가 만류하니 세리아 공주는 더 이상 옷을 벗으려 하지 않고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찻주전자에 든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한 찻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니 차분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당황을 했었나 보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나는 속으로 생각을 하며 세리아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