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88화
“놀라셨을 텐데, 이거 하나 드세요. 생약성분으로 만든 안정제에요.”
“고마워요.”
실비아 공주는 내가 주는 약을 순순히 받아 입안에 넣고 삼켰다. 그런데 이게 살짝 발효가 된 상태라 술기운이 좀 있다. 공주는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체질인지 금새 얼굴이 붉어졌다.
“약에 술이 들어있네요.”
“조합제로 버번이 조금 들어갔어요.”
“버번이라는 술은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데 독하네요.”
버번이 고급술은 아니지. 당연히 독하고.
“다음번에는 와인을 조합제로 쓸 게요.”
“풋, 와인도 반잔만 마시면 취해요.”
실비아 공주는 어지러운 듯 살짝 비틀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항상 바른 자세의 실비아 공주만 보다가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또 다른 매력이 있네?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 마법사의 냉정심을 깰 수 있다니. 역시 예쁜 여자는 고위 마법보다 무서운 존재인가?
“고마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어요.”
“괜찮아요. 제가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실비아 공주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왕국이 약해진 후 많은 일들이 있어서 이제는 나름 각오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일을 당하니 견디기가 어렵네요.”
“누구라도 참기 힘든 일일 겁니다. 다음에 혹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검으로 찔러 버리세요. 제가 뒷수습을 할 테니.”
공주는 타이틀이고, 사실은 기사잖아? 제대로 싸우면 표도리안 왕자쯤은 문제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왕자를 죽일 수는 없어요.”
“이 경우는 죽여도 되니까요. 정 죽이기 싫으시면 팔다리라도 부러뜨리세요.”
“다음번에는 그렇게 할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못 하겠지. 옆 왕국의, 그것도 이제는 강대국이 되어가는 나라의 왕자를 함부로 대했다가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테니.
내가 뒷수습을 한다고 해도 믿지 못할 거다. 아무리 장래가 촉망받는 마법사라도 왕자를 해하고 무사하기 힘들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특히 지금처럼 마법사가 약해진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 설명이나 설득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공문이 갔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비원을 늘려야겠네요.”
마법사를 상주시켜야겠다. 이 방에는 간단한 방어 마법진을 치고. 아니지. 마법진을 대놓고 그리면 보기 흉하겠지?
내가 주변을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할 때 실비아 공주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 했다.
“제가 그림 하나를 보내 드릴 테니 그걸 이 방에 걸어 두세요. 그림에 걸린 방어마법을 발동하는 시동어도 알려드릴 테니 유사시에 외치시면 될 거에요.”
“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시만 같이 있어주시면 안 될까요? 혼자 있으면 무서워질 거 같아요.”
실비아 공주는 살짝 머뭇거리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아직까지 마음의 안정이 안 된 것 같다.
나는 창문 밖을 보았다. 태양의 위치로 보아 어느덧 점심때가 훌쩍 지나가 3시가 넘어갔다.
마리포즈에게 떠날 준비를 해 놓으라고 했는데, 지금 안 돌아가면 오늘은 못 떠나겠지? 밤중에 도망치듯 떠나기도 그렇고 말이야.
상관없나? 오늘 떠나나 내일 떠나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럼 잠시만 머물도록 하지요.”
실비아 공주의 안심했다는 표정. 이 여자가 이렇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정말 불안하긴 한가 보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공문을 보낸 이상 사 왕자는 다시 안 올 테니 염려 마세요.”
“정말 그가 오지 않을까요?”
“그 정도 담이 있는 자도 아니고, 사실은 아까 제가 수작을 조금 부렸습니다.”
“아, 아까 목 뒤에 그린 것 말인가요?”
눈치 빠르네. 하긴, 왕족이라면 기본적으로 마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테고, 독이나 저주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도 있는 지식을 지니고 있겠지. 저주라는 게 본인이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눈치를 채냐 못 채냐에 따라 발견시기가 달라지니까.
“예, 하도 화가 나서 채식화 마법진을 새겨 넣었거든요.”
“채식화 마법진이요? 처음 듣네요.”
“쉽게 말해서 위장이 육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죠. 사 왕자는 앞으로 당분간 채소와 과일, 곡류만 먹으며 살아야 할 거예요.”
“어머, 그런 심술을 부리시다니.”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사람이 고기를 안 먹으면 단기적으로는 기력이 쇄한 느낌이 들지만 적응하면 오히려 몸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어요. 그래서 채식화 마법진은 일반 저주 탐지에 안 걸리거든요.”
채식화 마법은 원래 체질개선 형 마법이다. 어떤 마도사가 비만에 걸린 아들을 위해 개발한 피시술자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축복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저주다. 그래서 저주마법으로 분류되지만 저주 탐지에는 안 걸리는 거다.
“호호호호,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채식을 하게 되면 성격이 조금 차분해지고 공격성이 약해진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어찌되었든 사 왕자는 당분간 속이 안 좋아서 밖에 못 나올 겁니다.”
왕자 밥상에 고기가 안 올라갈리 없지.
고기만 먹으면 바로 신호가 오는 마법이니 그걸 깨달을 때까지 고생 좀 할 거다. 깨닫고 나서도 채식에 적응할 때까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할 거고.
사 왕자 넌 이제부터 채식남이 되는 거다. 훗.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실비아 공주의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 같다. 하지만 계속 사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는 불쾌한 기억의 주인공이니 가능한 한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나는 화제전환을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제가 렉스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나요?”
“렉스라면 기르시는 대형 개를 말씀하시는 거죠? 들은 적이 없어요.”
하긴, 이런 잡담을 한 일이 아예 없으니 렉스는커녕 파우스 스승님이나 몰던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겠지.
나는 렉스가 어떻게 저런 괴물 같은 대형개가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습격과 주인인 나를 위해 죽으려고 한 늙은 개의 이야기. 그리고 운이 좋아 늑대를 죽였는데 알고 보니 웨어울프였다는 이야기를 하니 어느덧 공주는 아까의 일을 잊은 듯 이야기에 몰두하며 연신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서 전 파우스 스승님을 만나고, 마법사가 된 거죠. 렉스는 돌연변이 개가 됐고요.”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이야기 중 가장 신기한 이야기네요. 열 살짜리 목동과 늙은 개가 웨어울프와 싸워 이기다니 놀라워요.”
놀랍지. 지금 생각해도 내가 그때 어떻게 살았나 싶다. 웨어울프면 기사 서너 명이 붙어야 상대가 되는 수준인데, 아무리 작은 놈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 똥침이 제대로 박히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늑대 똥이 되어 있겠지.
돌이켜보면 내 생애에 가장 위험한 싸움은 마족의 후계자나 마족의 현생체와의 싸움이 아닌 그 늑대와의 싸움이었다.
“그때 이후로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세상일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발악하면 어떻게든 된다고요. 그러니 실비아 공주도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원래 힘든 일이 있으면 즐거운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럴게요. 렌 경의 말씀을 들으면 지금이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최악이 안 되도록 노력해야죠.”
다시 얼굴에 그늘이 지네. 최악은 왕국이 망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쩝, 그래도 제가 혼약하기로 약속했는데 최악을 생각하시면 좀 곤란한데요. 저 딴에는 잘 해드리려고 하는 건데…….”
“풋, 제가 실수했네요.”
내가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을 짓자 실비아 공주는 뭐가 그리 웃긴지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오더니 두 팔로 내 머리를 감싸고 갑자기 입에 키스를 해 버렸다.
어억, 이게 웬 일이야!
나는 당황해서 몸이 굳어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러니 내가 전생에 암살을 당했지.
실비아 공주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말했다.
“저도 앞으로 렌 경을 혼약자로 생각하기로 약속드리지요.”
“…….”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내가 멍하니 실비아 공주를 보고 있자 공주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다시 침대 쪽으로 가서 누우며 말했다.
“이제 편해졌어요. 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네요.”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 테니, 편히 쉬세요.”
나는 가까스로 말을 하고는 정중하게 공주의 방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뿌우가 지팡이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거냥? 어서 다시 들어강!”
“뭔 소리야?”
“키스 다음 단계가 뭐양? 이 눈치 없는 모태솔로양!”
헛! 서, 설마!
나는 고개를 돌려 닫힌 공주의 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공주의 묘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 버렸다.
이런! 이런! 이런!
뿌우의 말대로 다시 들어갈까? 들어가야겠지?
그러나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지, 용기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뿌우야. 그냥 방 안에서 텔레파시로 말해주지 그랬니.
내가 슬픈 눈으로 뿌우를 보자 뿌우는 킁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설마 그 상황에서 그냥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당. 너 어디 가서 내 제자라 말하지 마랑.”
알았어. 말 안 할게.
“그리고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잡기가 열 배는 힘들당. 앞으로 고생해랑.”
이게 저주야 뭐야? 이 자식 혹시 일부러 늦게 말해주는 건가? 날 놀리려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에효, 남 탓해서 뭐 하냐? 분위기 파악 못 한 내가 멍청한 놈이지.
그래 그 눈빛을 기억하자. 그게 바로 그린 라이트다. 절대 잊지 말자.
나는 한숨을 참으며 공주의 저택을 떠났다. 밤공기가 타는 내 속을 조금은 식혀줬지만 한번 불이 붙은 가슴과 머릿속은 그날 밤새 타올라 잠을 못 이루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