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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87화 (87/250)

로엔의 마나뱅크 87화

다음 날, 나는 어제 실비아 공주에게 말했던 대로 볼스테어 왕실과 아도리아 왕실에 공문을 보냈다.

-(전략) 데빌 베인에 가입한 사람은 마족의 계약자들에게 일차적인 표적이 되기 때문에 가족까지 어느 정도 자유를 제한할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왕실 사람들을 그렇게 관리할 수는 없고, (중략)

데빌 베인의 회원들은 회원들간의 결혼을 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략)-

이정도면 대놓고 실비아 공주의 혼사는 우리 데빌 베인에서 주관할 테니 신경 끄라는 뜻이다. 실제로 처음 가입 받을 때 한 맹세가 있으니 뒷말하기도 힘들걸?

그리고 콘돌스핀 가문이 아닌 데빌 베인의 이름으로 낸 공문이라 저쪽에서 자존심 상할 일도 없고.

이걸로 이번 혼사는 일단락 지은 셈 치자. 아도리아 왕실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말이야.

“문제는 세리아 공주와의 관계네.”

암묵적이라 하지만 전대 황제가 직접 주관한 일이고 세리아 공주 자신도 승낙했으니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걸 깨고 다른 여자와 혼약하겠다고 하면 이건 덴판 제국과 인연을 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인연만 끊어지면 그나마 다행이고, 문제가 어디까지 커질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사실 그런 문제는 어떻게든 처리한다고 쳐도 세리아 공주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가장 큰 일이다.

솔직히 세리아 공주도 나를 사랑해서 결혼하려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결정되어졌던 혼사가 일방적으로 거부당하면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좋게 해결해야 한다. 그게 이번 일처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끙. 여자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파혼하는 방법이라, 뭐가 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쪽은 그야말로 생초보나 다름없는 나에게 너무 무거운 숙제가 주어졌다. 내가 벌인 일이니 남을 원망할 수도 없다.

한참을 고민한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일단 세리아 공주를 찾아가자. 욕을 먹더라도 할 수 없지.”

욕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사의 존재가치가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 눈치 빠른 덴판 황궁은 이미 마도가문에 대한 대우를 약화시키고 기사단의 보강에 나섰다는 정보가 있다. 그 정보 때문에 다른 왕국들도 비슷한 행동을 보이려는 거다.

데빌 베인 역시 그렇다. 마법사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조직이라 이제는 마족의 계약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알게 모르게 퍼지고 있다.

그래도 이쪽은 8서클 마도사가 둘이나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무시당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런 저런 잣대로 이용가치를 평가받고 있을 것이다.

“쩝, 내가 이용가치가 적어졌다고 평가받기를 원하기는 또 처음이네.”

그래, 황제에게 지금의 나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살짝 운을 띄우고, 세리아 공주에게도 솔직하게 사과하고 데빌 베인에 가입을 철회하라고 권하자. 그게 제일 무난하겠다.

직접 찾아가 해결을 할 생각을 하자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이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을 한 나는 바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영지의 대비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셈이라 안심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은 사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 이반 경이나 크로드 경을 동반하지 않기로 했다.

나, 마리포즈, 그리고 렉스와 서피만 데리고 간다.

떠나기 전, 나는 몰던을 만났다. 그리고 실비아 공주와 혼약하기로 한 사실을 모두 말했다.

“잘 됐구나. 난 네가 제국의 황녀와 결혼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듣자하니 결혼하면 그쪽에서 영지를 받게 될 거라 했는데,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살면 별로 좋지 못한 법이다.”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어쨌든 이건 손익계산을 떠나서 그냥 저지른 일이에요. 아버지가 이해해 주시니 고마워요.”

“나야 이해고 뭐고 아들이 공주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어리벙벙하니 알아서 해라.”

몰던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가 나를 어떤 심정으로 보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숨어사는 양치기였고, 나는 어린 고아 소년이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마법사의 제자가 되고, 다시 마도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대륙 전체에 이름이 알려져 제국의 황녀와 혼약까지 했으니 역사 상 이런 벼락출세는 또 다시 없으리라.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계세요. 슬슬 경비대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집에서 쉬시고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난 지금 삶이 좋구나. 옛 부하들 다시 부리는 재미도 있고.”

“아무튼 무리하지 마세요.”

몰던에게 지금 귀족의 삶을 살라고 하면 오히려 적응이 안 되겠지? 그냥 영지의 병사 대장 노릇을 하면서 지내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집에서 쉬시라고 해야지.

생각해보니 공주에게 몰던에 대해 부탁을 조금 해야겠네. 시아버지로 모시라는 것은 무리일까? 그래도 지금까지 기사들을 엄중히 관리해서 병사들에게 실수하지 않게 한 것을 보면 나름 신경은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자.

나는 다시 실비아 공주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쪽으로 가다보니 멀리서부터 하나의 깃발이 보였다. 볼스테어 왕가의 깃발이다.

“뭐지?”

볼스테어 왕실 사람이 우리 영지에 온다는 전갈은 없었다. 그것도 영주관이 아닌 실비아 공주의 저택이라니.

나는 서둘러 저택 앞으로 갔다.

“아, 역시.”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 걸까? 가까이서 본 왕가의 표식은 다름 아닌 사왕자인 표도리안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택의 문 앞에는 볼스테어 왕가의 위병들이 서 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창을 십자로 교차하며 외쳤다.

“정지, 이곳은 오늘 출입금지다.”

“웃긴 놈들, 난 렌 브로스마이어다.”

“앗, 브로스마이어 경.”

그래, 이 영지의 실질적인 영주다. 비켜라.

내가 눈짓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위병들은 놀라면서도 비키지 않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주먹으로 위병들을 때려 눕혔다.

자이언트 벨트를 차고 있는 나의 힘을 위병들이 견딜 리가 없다. 그들은 몸이 통째로 떠서 구석에 처박혀 버렸고 나는 당당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많은 위병들이 있고, 실비아 공주의 하녀가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것들이 방문이 아니라 약탈을 하러 온 건가? 애들이 인상부터가 위병이라기 보다는 동내 건달 같은데?

하긴 표도리안 왕자의 위병을 정상적인 귀족자제들이 할 리가 없지. 끼리끼리 모인다고 이것들은 귀족가의 떨거지들이다. 장래에 빛을 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냥 오늘을 사는 망나니의 모임과도 같다.

“누구냐!”

“렌 브로스마이어다. 실비아 공주님은 어디 계시지?”

“브로스마이어 경! 공주님은 지금 사왕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나중에 다시 방문하시지요.”

헛소리 하네.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어차피 공주의 방이나 거실의 위치는 모두 안다.

“뿌우 소환, 실비아 공주를 찾아 위치를 알려줘.”

“뿌우! 실비아 공주 찾는당.”

이럴 때 뿌우는 빠르다. 바로 지팡이에서 튀어나와 돌개바람으로 변해 실비아 공주의 방문을 차서 열고 들어갔다.

“억, 뭐냐?”

남자답지 않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표도리안 왕자인가?

“뿌우! 변태퇴칭!”

헉, 뿌우야, 그건 좀.

콰당

“끄어어억, 괴물이다!”

쩝, 사왕자가 비명을 지른다. 저놈이 막장 변태긴 해도 신분은 왕잔데. 왕자는 때리면 곤란하거든.

나는 혀를 차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역시 상상했던 대로 사왕자로 보이는 인물은 피를 철철 흘리며 한쪽에 찌그러져 있고 실비아 공주는 안색을 굳힌 채로 반대편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뿌우가 허공에 떠서 손에서 뇌전을 일으키는 상황이다.

“허락 없이 공격하면 어떻게 해?”

“저 변태가 공주에게 강제로 키스하려 했당.”

나는 얼른 방문을 닫아 잠갔다. 그리고 뿌우에게 말했다.

“죽이지는 마라.”

“알았당.”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

뇌전이 터지자 사왕자는 옷이 타고 머리카락과 피부가 까맣게 그을리며 죽을 듯 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보며 주변에 사일런트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혹시 위병들이 문을 부술까봐 문에 강화마법까지 걸었다.

“아,암살자! 왕자인 나를 암살하려, 끄아아아악!”

다시 터지는 뇌전 줄기에 사왕자는 헛소리를 하다말고 계속 비명을 질렀다.

나는 주먹을 꾸욱 쥐었지만 직접 손쓰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저놈을 때리면 죽여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거친 행동은 뿌우에게 맞기고 나는 공주를 보호, 위로하자.

“괜찮아요?”

“예, 예, 그런데 렌 경은 괜찮나요?”

실비아 공주는 거의 죽기 직전이 되서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는 사왕자를 보며 말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뒷수습을 생각하나보다.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미친놈은 좀 때려줘야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죠.”

“하지만 왕족을 때리면…….”

“방법이 있어요.”

나는 뿌우에게 손짓으로 물러나게 하고 거의 죽어가는 사왕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데빌 베인의 이름으로 혼사 거부 공문 보낸 거 못 봤지?”

내가 공문을 보낸 건 집을 나오기 바로 전이고, 이놈이 여길 온 건 그 뒤 몇 시간 차이가 안 난다. 볼스테어 왕성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반나절은 걸리니 못 봤을 거다. 그걸 보고도 이런 짓을 할 정도로 대담한 놈으로는 안 보인다.

“그게 무슨…….?”

역시.

“알았다. 오해에서 벌어진 일이니 공식적으로는 없던 걸로 해 주지. 자라.”

나는 발로 차서 사왕자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치유물약을 꺼내 사왕자의 머리카락과 피부에 살살 발랐다.

확 붓는 게 아니라 겉부분만 치료되게 하는 거다. 골병은 거의 치료가 되지 않는다.

나는 꼼꼼하게 표면 상처를 치료한 후, 복구 마법으로 타버린 의복도 원래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왕자의 목 뒤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은 완성되자마자 핏빛으로 살짝 빛나다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저주의 마법진이다. 미친놈은 때려도 안 고쳐지지만 저주로는 어느 정도 해결을 할 수 있다.

“다 됐군요.”

“상처 치료한 걸로 일이 해결되나요?”

“아니죠.”

나는 실비아 공주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기절해 있는 사왕자에게 다시 마법을 걸었다.

“메모리 블러!”

지난 10분간의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걸고는 사왕자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정신이 반쯤 들어 무기력하게 신음성을 흘리는 사왕자에게 말했다.

“표도리안 왕자님, 저는 렌 브로스마이어입니다. 데빌 베인의 이름으로 이번 혼사에 대한 공문을 보냈으니 왕성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곳에 오시면 안 됩니다.”

이건 암시다. 사왕자는 아직 자신의 머리로 판단할 정도로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다.

그러니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왜 이렇게 쓰러져 있었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사왕자를 일으켜 문을 열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위병에게 사왕자께서 돌아가시니 호위하라고 명한 후 문 밖으로 쫒다시피 내보냈다.

위병은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사왕자를 보았지만 정작 사왕자가 별 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나가자 어쩔 수 없이 같이 돌아갔다.

저택의 문을 닫은 후, 나는 실비아 공주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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