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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86화 (86/250)

로엔의 마나뱅크 86화

*

실비아 공주의 숙소는 기사관의 중앙에 있었는데, 내가 찾아갈 무렵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실비아 공주는 갑자기 찾아온 나를 살짝 당황한 시선으로 보다가 곧 안으로 들이고 말했다.

“식사 하셨나요?”

“아직 안 했습니다.”

“렌 경도 저녁을 늦게 드시는군요. 그럼 같이 먹어요.”

무뚝뚝하다고 할까? 상당히 건조한 말투다. 좋게 말하면 품위가 있는 거겠지.

나는 실비아 공주를 따라 저택의 식당으로 갔고, 곧 우리는 시녀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진지하지? 나는 일단 적당한 화제를 찾아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가 좋을까?

“카탈라난의 훈련은 잘 진행되는 모양이더군요. 볼스테어 쪽보다 이쪽이 더 진척도가 빠릅니다. 공주님이 기사 10명을 지원해 주신 게 효과가 있었지요.”

“그래요? 저는 따로 보고받은 게 없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네요.”

“마나뱅크가 사라진 이후 지휘체계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마법사측은 강화에만 집중하고, 부대의 지휘관이 전체를 통괄하는 형태인데, 사실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의 정신력이라면 한꺼번에 수천 명의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명령을 내리기가 쉽지 않죠.”

“아.”

“그런데 아도리아 측 지휘관인 클래임 경은 상당한 정신력의 소유자더군요. 클래임 경을 보좌하는 다른 아홉 명의 기사들도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고요. 덕분에 카탈라난의 운용이 훨씬 부드럽고 유기적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잘 됐네요. 클래임 경은 우리 왕국에서 자랑할 만한 기사에요.”

“예. 확실히 실력도 인품도 훌륭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크리드 경도 몇 번이나 칭찬했지요.”

“마스터 나이트 크리드 경의 인정을 받았다면 클래임 경도 기뻐할 거예요.”

“아무튼 마탑의 마도병단에 그런 훌륭한 기사를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우리 왕국은 지금 카탈라난 부대에 거는 기대가 커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유사시 주전력으로 사용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아마 비슷한 수로는 대륙 최강의 부대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다. 볼스테어 측에서 지원해준 병사들은 평범한 일반병이고, 지휘관도 하급기사들이다. 마탑의 주도하에 조직되는 군세에 진짜 정예군을 투입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아도리아측은 카탈라난에 거의 국운을 걸었다는 느낌으로 최고의 정예병을 비롯하여, 상급 기사 열 명을 지휘관으로 투입했다.

마법사들도 볼스테어에 적을 둔 자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확실히 한 부대만의 질을 보면 병사도 마법사도 아도리아 측이 강한 것이다.

단지 볼스테어에는 카탈라난 부대가 이미 4부대나 있고, 아도리아는 딱 하나이기에 수적 상대가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아도리아측 부대를 공격성 보다는 방어위주로 훈련을 진행시켰다. 현재 아도리아가 다른 곳을 침공할 여력은 없고, 오로지 사방에서 밀려오는 외압에 맞서 방어할 전력이 필요할 뿐이기에 그렇게 했다.

그 때문에 아도리아의 카탈라난 부대는 방어만큼은 정말 대륙 최강이라고 할 만 하다. 이들이 요지에 주둔한 채 방어진을 짜면 열배가 넘은 대군으로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도리아 측 기사들의 칭찬을 하며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거실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실비아 공주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을 거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챈 듯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고, 나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차를 마신 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에잇, 역시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최고다.

“이번에 실비아 공주님과 관련된 혼사 이야기가 있더군요.”

“예.”

대답 한 번 짧다. 표정의 변화도 없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것인가?

“공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왕족의 의무니까요.”

“저에게는 중요합니다만.”

“렌 경은 무엇을 원하시죠?”

실비아 공주의 말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역시 속에 쌓인 게 있구나.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저는 공주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하길 원합니다.”

“호호호,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되세요?”

“그냥 바라는 것을 말씀하세요. 그럼 방법은 제가 생각하겠습니다.”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실비아 공주는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약간 화가 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렌 경과의 결혼이에요.”

윽, 대놓고 말하다니. 이 여자 강단 있네.

말문이 막혔다. 내가 먼저 질러놓고 상대가 같이 지르니 대답이 잘 안 나오다니. 이것 참 쑥스럽군.

실비아 공주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농담이에요. 렌 경은 이미,”

“잠깐.”

나는 실비아 공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게 일 년의 시간을 주십시오. 일 년 안으로 공주와 정식으로 혼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비아 공주의 비취색 눈이 몇 번 깜박였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말을 하지는 못했다.

나의 폭탄선언에 당황한 것일까?

나는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실비아 공주는 헛기침을 살짝 하고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렌 경은 이미 제국의 세리아 공주와 혼약 관계가 아닌가요?”

“암묵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정식은 아닙니다. 정략적인 밀약 같은 거였지만 일 년 내에 정리하겠습니다.”

“진심이세요? 덴판 제국의 부마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아세요?”

“아직 안 되어봐서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나는 잠시 말을 끊었고 실비아 공주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플라티넘 블론드를 곱게 묶은 머리에 진줏빛 피부의 얼굴은 항상 차가움을 유지하지만 가끔씩 흔들리는 비취색 눈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솔직히 내가 여기 올 때에는 결혼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실비아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분위기 탓일까?

상관없다. 심장이 일을 저지르면 머리는 뒷수습을 하면 된다.

“고위 마법은 거의 언령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마법사는 가능한 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약속은 절대로 어기지 않죠.”

“…….”

“약속드리겠습니다. 일 년 이내에 실비아 공주님과 정식으로 혼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약속을 하는 거죠?”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입니다.”

“…….”

아 놔, 정말 그렇게 못 믿겠다는 눈빛을 하면 어쩌자는 거냐.

나는 터져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실비아 공주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그걸 마다하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입니다.”

“하아, 렌 경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저도 제 마음은 잘 모릅니다. 그냥 그때그때 다르거든요. 하지만 그걸 저는 그걸 좋아합니다. 제 머리는 그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고요.”

“그런가요?”

“저는 원래 평민 출신이라 가문이나 왕국을 위해 희생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어요. 그 점에서 공주님과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다를 겁니다.”

“그렇군요.”

실비아 공주는 겨우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럽네요.”

부러울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귀족이나 왕족은 의무만큼 권리를 지닌다. 평민은 말이 자유지 오히려 국가나 영지에 귀속되어 잇는 존재에 불과하다.

단지 내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났을 뿐, 마법사 역시 마탑과 마도가문의 계층에 속한 채 또 다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결국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신분이 존재하는 이상 어디서나 근본적인 것은 같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는 아무래도 희생당하기 쉬운 위치다.

어쨌든 나는 실비아 공주를 그 굴레에서 빼내기로 결심했다.

내가 실비아 공주를 사랑하는 걸까? 그건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생각뿐이다.

그걸로 일생의 반려를 결정해도 될까?

알게 뭐냐.

난 현명한 노마법사가 아니다. 머리보다는 심장이 더 중요한 피 끓는 젊은 마법사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실비아 공주가 예뻐보이기는 한다. 그냥 사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움직이는 아름다움이다.

엘시아가 죽은 뒤 전생의 감정에서 벗어난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는 점점 로엔이 남처럼 느껴진다. 그냥 전생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엘시아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현생을 전생의 연장선이라 생각하게 해 준 원동력인가 보다. 하긴, 그녀에 대한 원한으로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니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지.

어쨌든 할 말은 다 했다. 사고도 칠 만큼 쳤고.

이제는 돌아가서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나는 찻잔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데빌 베인의 이름으로 공주님의 혼약에 이의를 제기하는 서류를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실비아 공주는 나를 정문 앞까지 배웅했다.

나는 공주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앞으로 제가 공주를 만날 때마다 물을 겁니다. 공주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그러니 평소에 잘 생각해 두세요.”

“…….”

실비아 공주는 대답 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

내 방에 오니 뿌우가 소환하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와 말했다.

“잘 했당. 이제 어디 가서 내 제자라 말해도 된당.”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뜬금없이 튀어나오지 말라고, 마나 딸리니까.”

그립다 마나뱅크, 그때는 뿌우를 소환해 놓고 그냥 잠을 자도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 이제는 내 몸 안에서 마나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네.

역시 6서클로는 정령의 소환 유지가 쉽지 않군. 그런데 언제 7서클이 될까?

“근데 왜 키스는 안 했냥? 마지막에 실비아 공주는 키스를 기다리면서 반쯤 눈을 감던뎅.”

“잉? 그런 거였어?”

난 왜 몰랐을까?

“쯔쯩, 역시 아직은 내 제자라 말하면 안 되겠당. 말만 하지 말고 여성이 하는 행동을 잘 봐야징.”

뿌우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까닥 거리고는 슉 하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왠지 모르게 아쉬움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생각해보니 뿌우의 말대로 그 타임에서 키스 정도는 해 줬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생전 연애를 해봤어야 그런 걸 알지. 쩝.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부터 벌인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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