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85화
4장 실비아의 혼사
마나 파동포에 대한 기본 구상이 끝날 무렵, 나는 병상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영지의 방어준비를 시작했다.
아생 후 살타,
내가 먼저 살아남아야 적을 칠 수 있다는 의미다.
적이 한둘도 아니고 공격을 나갔는데 본진이 털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일단 카탈라난을 재정비해서 마법사들의 마나량이 적은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카탈라난의 발동 유지 시간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위력은 전과 별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당분간 마법사의 역할은 병사와 기사의 강화와 보조 쪽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요. 직접 공격 하는 행위는 마나의 소모가 극심해서 단기전이 아닌 한 효율이 좋지 않아요.”
내 설명에 스승님도 동의했고, 우리는 각 마탑마다 한 부대의 카탈라난 병대를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해당 마법사들에게도 상당한 수련이 되는데, 카탈라난은 한번 발동하면 내부의 마법사 중 몇몇이 흔들려도 마나의 연동작용으로 효과가 유지되기 때문에 집단 마나 수련의 효과가 있다. 하급의 마법사들은 카탈라난을 시행할 때마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마나홀이 성장하는 경험을 하니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매일 자발적으로 카탈라난의 훈련을 한다.
그 사이 나를 비롯한 가문의 마도사들은 영지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하러 다녔다. 마법진의 도해는 미스틱 엑스가 그려준 것으로 그들은 이 수준 높은 마법진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구축하고 발동시킬 수 있다는 점에 감격까지 할 정도였다.
문제는 마법진에 들어가는 재료, 그러니까 돈이 문제인데 덴판 제국으로부터 받은 재물을 모두 아낌없이 쓰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위치에는 이반 경이 직접 마법진을 구축했는데, 이게 말하자면 9서클 방어마법진이다. 우리 영지는 그야말로 엘시아가 있던 프리스톤 가문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방어체계가 갖춰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석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
“볼스테어의 사 왕자와 실비아 공주와의 혼담이라고요?”
파우스 스승님께서 갑자기 방문해서 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실비아 공주는 현재 우리 데빌 베인에 속해있고, 나와는 잠정적인 약혼관계…가 아니구나.
실비아 공주와 나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왜냐하면 난 덴판 제국의 세리아 공주와 사실 상 혼약 관계이기 때문에 실비아 공주와의 관계는 거의 끊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볼스테어 왕실에서는 머지않은 미래에 아도리아 왕국과의 합병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 첫 단추를 혼담으로 끼워 맞추려는 듯하다.”
“아도리아 측에서는 어떤 반응인가요?”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아도리아 측 귀족들의 의견은 지금 거의 균등하게 둘로 나뉘어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독립을 유지하고 왕국을 재건하자는 자존파와 차라리 합병을 하여 실질적인 평화와 번영을 이루자는 의존파다. 이번 혼담은 의존파가 진행시켰는데, 독립을 하든 합병을 하든 볼스테어와의 관계를 위해 왕족간의 혼담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고 하더구나.”
“그런가요.”
반박을 할 수 없다. 내가 볼스테어 측 귀족이나 왕족이라도 이번 혼담은 꽤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왕족과 왕족간의 혼담이니 아도리아 측에서 자존심 상해 할만 한 혼담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만 봤을 때의 이야기고, 사실 볼스테어의 사 왕자인 표도리안은 인성에 문제가 있는 자다.
자국의 왕자에 대해 할 말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개**라 할 수 있다.
표도리안이 이번에 결혼을 하면 세 번째다. 나이 17에 세 번째 결혼인 것이다.
앞에 두 아내는 어떻게 되었냐고? 죽었다. 병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소문으로는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국 내에서는 더 이상 표도리안 왕자에게 딸을 주겠다는 귀족이 없다. 아주 하급 귀족이라면 몰라도 왕실의 격에 맞는 혼담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볼스테어 왕실 최대의 골칫거리인 표도리안 사 왕자.
그런 그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국 타국의 공주를 붙여주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또한 실비아 공주는 기본적으로 기사의 수련을 받은 몸이니 표도리안 왕자의 폭력에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 있는 듯하다.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당히 기분 나쁜 혼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 씁쓸한 이야기다. 어찌되었든 실비아 공주는 내 혼약자였던 셈이다. 그런 여자를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혼담을 진행시키는데, 그게 평범한 사람도 아닌 쓰레기 같은 놈에게 팔아먹는 거라니.
아도리아 왕실, 실비아 공주를 봐서 독립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놈들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화가 치민다.
그런데 막상 또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하기도 애매하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내가 그녀를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난 실비아 공주를 데빌 베인에 가입시켜 놓고, 그녀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세리아 공주와의 혼담을 진행시켰다.
실비아 공주는 나를 기다렸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 바람에 실비아 공주는 혼기를 놓치고 이제는 정상적인 혼인을 하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실비아 공주를 만났을 때에도 안색이 좋지 못했지.
나에게 대놓고 따지지도 못하고 속으로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내가 아도리안을 위한 카탈라난 부대를 만들겠다고 하니 그게 그녀를 무시한 대가성 호의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젠장, 내가 너무한 거였군.’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난 그냥 그녀가 마음에 들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가지고 논 셈이 되었다.
내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파우스 스승님이 물었다.
“넌 지금 세리아 공주와 혼담이 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실비아 공주와 일이 진행되었었지. 어떻게 할 거냐?”
“저에게 결정권이 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실비아 공주는 데빌 베인에 속해 있고, 데빌 베인의 규칙에는 국가의 이익보다 조직을 우선한다는 조항이 있으니 혼담을 막으려면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얼라? 파우스 스승님은 이 혼담을 반대하는 거네.
난 처음 파우스 스승님께서 이 이야기를 꺼낼 때 혼담이 잘 진행되도록 나를 설득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느낌은 오히려 나보고 데빌 베인의 핑계를 대서라도 혼담을 막으라는 거잖아?
“스승님은 실비아 공주가 마음에 드세요?”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왕실에서 우리 마도가문을 시험하는 거다.”
“예?”
“과거에는 가문의 차기 가주로 내정된 너와 관련 있는 여자를 왕실에서 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마나뱅크가 사라진 이후 왕실의 태도가 점점 이상해지는구나.”
아, 그런 건가!
사실 그동안 마도 가문의 위세는 왕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국가를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 가문은 국가에 완전한 충성을 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국가에 손해가 되는 행위를 해도 왕실에서는 별 말을 못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도리아 왕국에 카탈라난 부대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선언한 것만 봐도 볼스테어 왕실에서 좋게 생각할 리가 없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마법사의 힘이 약해졌다. 그런 만큼 왕실에서는 마도 가문에 대한 대우를 낮추려는 것이다.
파우스 스승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건 일종의 핑계로써 우리보고 알아서 기라는 신호이기도 하단다.
여기서 별 말 없이 혼담이 진행되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그러니까 기존에 마도 가문에게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행해 나갈 거라고 한다.
“어렵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왕실을 탓할 것도 못 된다. 그동안 마도가문이 엄청난 위세를 보인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스승님의 판단이 틀리다고도 말 못 한다. 스승님은 마도 가문의 가주이니 가문의 힘이 약해져서 점점 국가에 귀속되는 것은 참지 못하실 거다. 마법사에 대한 국가의 권리침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을 때의 마법사의 지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때도 마법사는 존경받는 위치였지만 지금처럼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몇몇 마탑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탑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고, 왕실마법사가 속한 마탑이 가장 위세가 좋았다.
즉, 마법사는 국가에 속한 자들로 자유로운 구석은 있었지만 나름 충성심도 있고, 국가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의 수보다 마도 가문의 수가 더 적다. 한마디로 가문 하나가 여러 국가에 마법사를 지원해주는 형태다. 이걸 국가가 좋아할 리가 없다.
힘의 균형, 약해지면 그만큼 권리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알고 싶구나.”
“글쎄요. 한 번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실비아 공주과도 만나봐야 할 거 같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가문과 왕실과의 관계도 다시 정리해야 할 거 같네요.”
“그래라. 사실 난 이런 면에는 거의 재능이 없다. 자존심은 상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파우스 스승님이 정치를 싫어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그래라. 어차피 이건 네가 직접 관련된 일이고, 우리 가문은 네가 이어야 할 테니.”
“예. 감사합니다.”
숙제가 생겼다. 이건 내가 해결해야 되는 숙제다.
실비아 공주,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뿌우를 불러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네가 나쁜 놈이라 생각한당.”
“인정할게. 그런데 너 같으면 이제 어떻게 처리할 거야?”
“그건 난 모른당. 우리 정령은 결혼 같은 거 안 하니깡. 왕국이니 가문이니 하는 문제도 없공.”
“그렇구나. 너네는 단순해서 좋네.”
“단순하깅, 너도 사장님한테 몇 번 맞아보면 안 단순하다는 것을 알 거당.”
“하하하, 맞아. 정령도 사람도 다들 고생하는 처지지.”
뿌우에게 의견을 물어도 좋은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해답을 얻었다.
정령과 사람이 다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도 모두 사정이 다르다. 그러니까 견해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할 준비를 했다.
“어디 가냥?”
“실비아 공주를 만나러.”
“지금 바롱?”
“당장 만나서 내 감정과 그녀의 감정을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아.”
“감정대로 처리할 거냥?”
“응, 사실 난 평생 그래왔어.”
국가니 가문이니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난 내가 정을 준 사람들이 소중할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실비아 공주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다. 전에는 엘시아 때문에 다른 여자에게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이제는 확인을 해 봐야지.
그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고, 청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