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83화
*
“파이어 볼!”
화르륵, 쾅
내 지팡이 끝으로부터 작은 불덩어리가 날아가 허공중에 폭발했다. 사방으로 퍼지는 열기와 충격은 충분한 살상력을 가졌지만 크리드 경의 안개 속에서는 평소의 반의반도 못 되는 파괴력밖에 나오지 않았다.
연속해서 이반 경이 주문을 시전했다.
“아이스 자벨린!”
파파파파팡
팔뚝만한 굵기의 얼음창이 다섯 개나 생성되어 크리드 경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크리드 경은 교모하게 검을 휘둘러 얼음창을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이반 경이 얼음창을 조종하는 법도 능숙했지만 역시 이런 쪽은 크리드 경이 한 수 위다.
크리드 경은 지금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두 눈을 가리고 우리의 마법 공격을 받아내는 중이다.
이 훈련으로 이반 경과 나는 몸속의 마나를 사용해서 마법을 쓰는 법을 수련하고 크리드 경은 안개를 통한 감각의 확장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경은 물론이고 나도 마나 뱅크를 사용하지 않고 몸 안의 마나를 직접 사용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옛날 수준의 마나는 몸 안에 쌓아야 할 것 같아서 당분간은 마나뱅크 자체를 봉인하기로 했다.
원래 그 정도 마나를 쌓으면 몸이 약해지는데 이반 경과 나는 정령의 힘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괜찮다. 지금의 체력을 유지한 채 마나를 축척할 수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해야 한다.
“대단하군요.”
이반 경이 작은 목소리로 나한테 말했다. 아무리 3서클 제한으로 공격마법을 펼치고 있다고 해도 두 명의 마법사가 연속해서 사용하는 공격마법을 모두 받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두 눈을 가리고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안개를 통한 감각의 확장에 거의 완벽하게 익숙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하죠.”
가장 빠르게 마나가 떨어진 내가 외쳤다. 그러자 크리드 경이 안대를 풀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어때요? 이제 완벽해 졌나요?”
“아닐세. 아직 반응이 조금 느린데 이제는 좀처럼 빨라지지 않는군.”
크리드 경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토록 빠르고 능숙하게 우리의 공격을 받아냈으면서 아직 느리다니. 기분이 조금 나빠지려 한다.
“그래도 덕분에 새로운 감각에 익숙해 졌습니다.”
크리드 경은 이반 경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자는 지금 이반 경을 비공식적인 스승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물의 정령을 공유시켜 준 사람이 이반 경이니 그럴 만도 하지.
“크리드 경은 어느 정도 된 거 같고, 문제는 우리네요. 마나 홀이 작아서 마법을 많이 쓸 수 없으니 옛날에 비해 전력이 3분의 1도 안 나올 거 같아요.”
내 말에 이반 경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는 마법을 사용해도 탈력의 느낌이 덜 들어서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힘들어서 연속해서 마법을 쓰기 힘들더군요.”
“정말 탈력감만큼은 조심해야 해요. 앞으로도 싸움이 격렬해지면 어느 순간 걷지도 못하게 체력이 빠질 수 있으니까요.”
“옛날에 목숨 걸고 워메이지를 할 때 몇 번 경험해 봤습니다. 정령이 있으니 이제는 괜찮을 겁니다.”
“정령이 체력 유지에 큰 힘이 되지요. 하지만 결국 정령도 마나를 소모해서 소환을 유지해야 하니 마나가 고갈되면 소환이 해제될 수 있어요.”
나는 이반 경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뿌우를 소환하려면 마나가 소모되는데, 마나 뱅크에 마나가 가득 차 있을 때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정령의 소환유지만으로도 부담을 느낀다.
아우, 이거 어떻게 정령에 들어가는 마나만이라도 마나뱅크에서 빼서 쓸 수 없나?
어! 정말, 그건 가능할 것도 같네.
나는 말을 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나무 아래로 가서 털썩 주저앉은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인간인 나는 마나가 급격하게 주입되면 고통을 느낀다. 압력이 강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령이라면?
마나가 팍팍 들어가면 그만큼 더 세지는 게 정령이다.
“뿌우야, 잠깐 나와 봐라.”
“뭐냥?”
“너 요즘 내가 마나를 찔끔찔끔 줘서 불만이 많지?”
“말이라고 하냥? 사업하다 말아먹고 하루 세 끼 먹다 한 끼만 먹어야 하는 거지 정령의 심정이당.”
뿌우는 볼을 부풀려 완벽한 불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정을 이해하니 참는당. 내 의리로 살고 의리로 죽는 정령 아니냥. 넌 불안해하지 말고 수련이나 열심히 해랑.”
이놈이,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너 라고 부르네. 맞먹겠다는 거냐!
나는 살살 기어오르는 뿌우에게 마법사의 무서움을 가르쳐 주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얘가 내 생각을 해주는 면이 있으니 곱게 봐 주자.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너한테 엄청난 압력의 마나가 주입되면 견딜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죽을 정도의 압력인데 말이야.”
“마나 압력이 세면 좋징. 뭘 견디고 말고가 있냥? 우리 정령은 그렇게 허약한 육체가 없당.”
“하긴, 풍선에 바람 세게 분다고 터지지는 않겠지.”
“풍선 아니당. 바람이당. 안 터지고, 세게 불면 더 힘 세진당.”
괜찮네. 혹시나가 역시나네.
남은 건 나를 통하지 않고 마나뱅크의 마나를 얘한테 직접 주입하는 방법인데, 이건 또 시도해 볼 게 있다.
그날 밤, 나는 마리포즈만 데리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리포즈의 능력은 바로 마나의 조율이다. 내 구상대로 되면 좋지만 만약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마리포즈가 나를 도와서 수습을 해 줄 것이다. 그러면 최악의 상황은, 그러니까 내 몸이 터져 죽는 상황은 면할 수 있겠지.
“이쯤에서 시작하자.”
나는 마법진을 그리면서 마리포즈에게 설명을 했다.
“내가 마법진을 이용해 마나뱅크의 게이트를 몸에서 약간 떨어진 공간에 열거야. 이론적으로는 그럴 경우 마나가 바로 흩어져 버리는데, 뿌우가 흩어지기 전에 그 중 일부를 흡수하는 거지. 한번 흡수하면 링크를 걸어서 계속 흡수할 수 있게 되는 거고.”
기존에 링크되어 있던 것은 마나뱅크의 계좌가 사라질 때 끊겼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이으면 뿌우는 내가 차단하지 않는 한 영구히 마나뱅크로부터 마나를 보급 받게 되니 난 아무런 부담없이 뿌우를 소환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내가 기대하는 것은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뿌우의 힘이 강해지는 것인데, 그게 뇌전의 힘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건 엄청난 공격마법이 탄생하는 셈이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8서클의 위력은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새로운 실험을 하는 마법사는 언제나 가슴이 뛰는 법이다.
살짝 흥분된 나와는 달리 마리포즈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예.”
“몸에서 떨어진 공간에 게이트를 열면 몸에는 부담이 안 가야 정상인데, 지금 마나뱅크의 마나가 워낙 대단해서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이 잘 안 된다. 그러니까 만약의 사태에는 마리 네가 내 마나링크를 차단하라고. 역류하는 순간 차단해야 내가 사는 거 알지?”
“알겠습니다. 0.03초 이내에 차단시키도록 하지요.”
“그래, 그 정도라면 죽지는 않겠지.”
마리포즈의 최고반응속도가 0.03초였구나. 파이어볼이 바로 옆에서 터져도 실드해줄 수 있겠네.
나는 마리포즈의 가드 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마법진 구축에 집중을 했다.
그런데 마법진이 거의 완성될 무렵, 미리아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나타났다.
“렌, 뭐해?”
“어, 미리아. 안 자고 일어났네?”
“꿈 꿨어. 내가 여기 있어야 한데.”
“여기 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래?”
“몰라. 꿈에서 누가 그렇게 말했어.”
이거 예언 맞지? 성녀의 특기 중 하나인 오러클 능력이 발현된 모양이네.
“미리아야. 이건 비밀 실험이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응.”
“이반 경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아! 아버지한테도 비밀로 해야 하는구나. 우웅, 알았어.”
미리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대답을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미리아에게 마법진 한쪽 공간을 가리키며 거기 앉아서 구경을 하라고 하고는 다시 마법진을 그려 완성시켰다.
“뿌우야, 나와라.”
“준비 끝났엉? 미리아 누님, 안녕하세용.”
뿌우는 지팡이에서 나오자마자 미리아에게 인사를 했다. 나보다 미리아에게 더 저자세로 대하는 모습이 조금 얄밉다.
저놈이 끝에 응 발음을 안 붙일 수 있는 유일한 단어가 바로 누님이란다.
하지만 성녀는 모든 정령에게 있어 영원한 누님이라는 뿌우의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신성력으로 정령을 강화하는데, 이게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계속 성장을 시킬 수 있다니 그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계약자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미리아는 손을 흔들며 뿌우에게 말했다.
“뿌우, 안녕? 신성력 다 소화되면 말 해. 또 해줄게.”
“넹, 전 누님만 믿어용.”
아주 아부가 꽃피는구먼.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섰다.
“부분 폴리모프!”
슈슈슉
변신 마법인 폴리모프를 응용해서 팔의 길이를 1.5배로 늘였다. 늘어난 팔 부분은 문어 다리처럼 뼈가 없고 재생 능력이 뛰어나 혹시 사고가 터져서 충격으로 날아가도 큰 피해는 없을 거다.
나는 그렇게 늘어난 팔의 끝부분에 커넥트 마법을 시전 했다. 그러자 마법진이 이에 반응해서 팔보다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나뱅크의 접점을 생성했다.
생각대로다.
공간을 격하고 게이트를 열면 마나가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나오기 때문에 정신에 직접적인 압력을 주지 않는다.
드드드드드
“어엇!”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게이트가 열렸는데 바로 마나가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다.
워낙 안에 들어있는 마나의 덩어리가 커서 다른 방식의 힘이 작용하나보다. 아공간과 현공간이 직접 연결되면서 묘한 공간간섭이 일어나고 있다. 그냥 빈 아공간이면 이럴 리가 없는데, 상상을 초월한 마나 덩어리가 원래의 공간에서 안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물이 아래로 흐르듯 마나뱅크의 마나는 현 공간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곧 진동이 더욱 격해지면서 뭔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본능의 경고를 알 리 없는 뿌우는 마나가 흘러나오는 낌새가 보이자 얼른 그 앞에 섰다.
“우왕, 마나의 폭포샤워를 뒤집어 써 보겠구낭. 난 행복한 정령이양.”
“피햇!”
나는 급히 외쳤다. 목소리보다 내 의지가 먼저 뿌우에게 전달되었다.
뿌우는 반사적으로 피했다. 동시에 마리포즈 역시 내 외침에 반응하면서 바로 게이트를 차단시켰다. 0.03초의 미학을 완성시킨 마리포즈는 역시 대단했다.
그러나 살짝 늦었다.
마나뱅크의 마나 중 일부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피하고 있는 뿌우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