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82화
마녀 엘시아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사건은 전 대륙에 걸쳐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아론 경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발표되고, 엘시아가 마나뱅크를 해킹해서 독점하려다 죽는 바람에 마나뱅크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알려졌다.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싸움은 이겼는데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은 너무나도 크다.
이것은 마족의 계약자들이 벌인 어떤 사건보다 엄청난 일이었고, 모든 마법사들을 절망과 좌절 속으로 몰고 갔다.
원래 마나뱅크 이전 시대의 마법사들은 몸 안에 충분한 마나를 저장하는 수련을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최고 서클 마법을 적어도 서너 번은 쓸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나뱅크가 생긴 이후의 마법사들은 그렇게 여러 번 쓸 마나를 저장하지 않고 오로지 서클을 높이는 수련만 했다.
그 결과 그들은 최고 서클 마법을 딱 한 번 쓸 정도의 마나밖에 저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나뱅크가 있다면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게 사라진 지금 그들은 반쪽짜리 마법사가 된 셈이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마나수련법은 마나를 모아 마나뱅크에 넣은 작업이다. 자신의 몸속에 저장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익숙지 못하다.
또한 고위 마법을 쓸 때 느끼는 허탈감과 피로감 역시 그들을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보유 마나량이 적기 때문에 자신의 최고 서클 마법을 한번 쓰면 거의 마나고갈과도 같은 충격을 받아 기절해 버리는 것이다.
아마 마법사들이 예전처럼 몇 번씩 연속해서 마법을 쓰려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고생해서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젊음을 유지한 채로 대마법사가 되겠다는 엘시아의 꿈은 대륙에 마도의 전성시대를 가져왔고, 다시 그것을 빼앗아갔다.
*
영지로 돌아올 무렵, 나는 엘시아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끊을 수 있었다.
어차피 나는 렌이다. 로엔이 아닌 것이니 전생의 사랑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정말 큰 고민거리가 하나 남아있다.
마나뱅크에 존재하는 마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새로 계좌를 만드는 것은 쉬웠다. 그런데 새로 만든 계좌는 텅텅 빈 상태. 이제부터 조신하게 수련해서 채워 넣어야 한다.
마나 뱅크에 있는 엄청난 마나는 쓸 방도가 없다.
“뱅크의 마나를 내 계좌로 옮기려다가는 죽겠지?”
8서클인 엘시아도 얼굴에 난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6서클인 나는 그냥 즉사할 가능성이 99.9999%정도 될 거다.
이건 8서클로도 안 된다. 9서클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 수십 년짜리 장기 저축을 했다고 생각하자. 지금은 못 써도 일단 대마법사가 되면 무한한 마나를 손에 넣은 셈이 되는 거니까.”
솔직히 어차피 대마법사가 되면 마나에 대한 제약이 거의 사라지니 마나뱅크의 마나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마나를 끌어 쓸 방법은 있다.
대정령과 계약을 하거나 대자연의 힘을 끌어다 쓰면 마나뱅크가 없어도 끊임없이 마나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남의 것 끌어다 쓰는 거보다는 마나뱅크에 있는 것을 쓰는 게 훨씬 편하겠지. 그 정도로 마음을 비우자.
우리는 미리아를 위해 가능하면 도시에 머물지 않고 숲을 가로지르며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하프엘프화 되어버린 미리아는 실제로 숲에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영지로 돌아가면 미리아를 위해 영주관 뒤쪽에 있는 숲을 그녀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미리아는 오늘도 잘 자고 있다. 숲에서는 그냥 잠을 자도 알아서 마나가 몸 안에 쌓이는 체질이 되었단다. 솔직히 조금 부럽다.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해가 진 지금까지 명상을 하며 저마다 수련을 하고 있다.
나는 옆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이반 경을 보았다.
이반 경은 지금 몸 안에 마나를 축척하고 있다.
기존의 마나홀이 가득 찬 상태에서 계속해서 마나를 쌓으면 몸에 무리가 간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마나홀이 점점 커져서 몸에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몇 년이나 걸릴까? 예전의 8서클 마법사 정도의 마나홀을 구축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리겠지?
생각해보면 정말 마나뱅크가 사기적인 시스템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력의 균형을 깨고 마법사에게 절대 우위를 주게 할 정도니 말 다 한 거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서 야영지 반대쪽에 있는 크리드 경을 보았다.
크리드 경 역시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정령과의 동화를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물의 정령이 더욱 강력한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개는 수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정령으로 인해 생긴 안개는 다른 자의 시야를 가릴 뿐 아니라 마법적인 방어력도 월등하다. 더군다나 본인의 시야는 전혀 가리지 않으니 고위의 환상마법과 비슷한 효과가 있고, 집중을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지.
나는 몸을 일으켜 크리드 경에게로 갔다.
크리드 경은 내가 다가오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계하는 것은 아니지만 빈틈은 없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대단한 기사다.
“크리드 경, 정령으로 안개를 만들 수 있게 됐네요.”
“그렇네.”
“제가 배운 바에 의하면 정령과의 감각공유라는 게 있어요. 크리드 경도 아마 어느 정도 아실 거예요.”
“알지. 환상 마법을 간파하는 데에 소리아의 힘을 빌리고 있으니까.”
“맞아요. 그러면 말이죠. 안개가 된 정령의 감각도 빌릴 수 있지 않을까요?”
크리드 경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게 가능할까?”
돼, 확실히 돼. 난 바람과 감각을 공유해 봤거든.
안개는 바람보다 훨씬 쉬운 영역이야. 아니지, 훨씬은 아니고 조금 쉬운 수준인가?
공간 전체에 감각을 유지하는 기법은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크리드 경은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 든 기사. 기감이 오감의 한계를 넘어 육감의 수준까지 도달했을 테니 올바른 길로 집중해서 수련하면 충분히 될 걸?
“제가 들은 바로는 항상 그 정도의 감각영역을 유지하면 인간의 신경이 버티지 못한데요.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집중을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르겠군. 우리 기사들도 전투시에는 기감을 사방으로 퍼뜨려 주변 상황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기법이 있지. 안개와 감각을 공유한다면 그것보다는 훨씬 쉽고 넓은 영역을 인식할 수 있겠군.”
“안개를 본 김에 그냥 생각이 나서 말씀드린 건데, 실제로 가능하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크리드 경을 속일 수 있는 환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거다. 10서클 궁극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정령마저 속일 수 있지만 현재 그게 가능한 사람은 없으니까.
나의 충고에 깨달음을 얻은 크리드 경은 곧 바로 다시 수련에 들어갔고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어느 새 눈을 뜨고 있던 이반 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땅의 정령으로는 그런 식으로 감각 영역을 확장시킬 방법이 없을까요?”
아저씨, 욕심이 너무 많으면 체하는 수가 있어요.
나는 한 마디 해주려다가 참고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반 경도 땅의 진동을 이용하잖아요.”
“그걸로는 허공에 뜬 자를 감지하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전에 에빌 미스트와 싸운 적이 있는데, 투명 상태로 허공에서 공격해오니 방비하기가 어렵더군요.”
“대신 유사시에는 땅속에 숨을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대비가 된다고 봐요.”
“없는 거군요.”
“꼭 없는 것은 아닌데, 땅의 정령을 이용하기 보다는 그냥 마법으로 경계망을 형성하는 게 훨씬 간편하다고 봐요.”
“하하, 맞습니다. 제가 욕심이 과했군요.”
역시 이반 경은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게 빠르다. 마법사가 마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정령에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 법.
지금 일시적으로 약해졌다고 해서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래서야 대마법사가 되기 위한 관문을 넘을 수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말 나온 김에 나도 정령이용법에 대한 강화를 조금 해야겠다.
남에게는 마법이 최고라고 말해놓고 뜬금없이 나는 정령강화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나에게는 정령도 마법의 일부나 마찬가지야. 정령도 결국 마법을 쓰기 위한 힘의 원천 중 하나이고, 내가 쓰는 마법 중 상당수가 정령과 연동하고 있으니까.
단지 아직 이반 경은 그걸 구분해서 써야하니까 충고한 거고.
“뿌우야, 나와 봐.”
“뭐냥?”
“저기 안개 보이지?”
“소리아 양의 안개당. 당연히 보인당.”
“소리아 양? 너 쟤랑 친하니?”
“난 모든 여성형 정령과 친하당.”
“으, 스승님.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소질은 있으니 죽어라고 노력하면 언젠가 여친 한 명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당.”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연예도 결혼도 다 할 수 있거든.”
“그럼 마음을 먹어랑.”
“쩝,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저 안개를 이용하면 뇌전의 힘을 강화할 수 있지?”
“잘 아넹. 원래 뇌전은 바람보다 물의 영역에 가깝당. 하지만 물의 정령은 뇌전을 별로 안 좋아해서 바람이 주로 쓰는 거당.”
“아무튼 크리드 경이 안개를 퍼뜨리면 그 안에서 너와 내가 강화된 뇌전의 힘을 쓸 수 있도록 연습을 좀 하자고.”
“오홍, 그거 좋당. 안개가 낀 영역에서 돌개바람을 일으키면 뇌전을 아주 소나기처럼 떨어뜨릴 수 있당.”
“그래, 그럼 허공중에서 그걸 위한 움직임을 일으켜 봐. 그래야 내가 정령력의 흐름을 이해하고 뇌전의 영역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
“알았당. 오늘은 춤추기 좋은 밤이니 밤새 돌개바람을 일으켜 주겠다.”
“미리아 자니까 방해되지 않게 저쪽으로 좀 가서 하자. 중간에 음파 차단 벽도 하나 설치하고.”
나는 뿌우와 함께 자리를 떴다. 내 대화를 옆에서 들은 이반 경은 감탄의 눈으로 나를 보았고, 대지의 정령과 다른 정령의 힘을 융합해서 강화하는 방법을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모른 척 했다.
그런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반 경.
언젠가는 이반 경이 나도 놀랄 만한 정령 융합술을 개발했으면 좋겠다.
대기의 정령을 주로 이용한 나로서는 땅의 정령을 메인으로 하는 융합술이 많지 않다. 내가 가르친 제자가 새로운 영역을 창출해 내고, 그걸 내가 다시 배울 수 있다면 스승으로써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제 실질적으로 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셋이네.
첫째는 미리아.
둘째는 이반 경.
셋째는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크리드 경.
세 명 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 언젠가는 내가 모르는 영역을 개발해서 보여줄 거 같다는 기대감이 그들에게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