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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81화 (81/250)

로엔의 마나뱅크 81화

“잘 들어요. 다른 사람의 계좌에서 자신의 계좌로 마나를 이전할 때는 고통이 뒤따라요. 그쪽 계좌에 저장된 마나가 크면 클수록 고통이 커지는데 엘시아 경은 마나뱅크의 모든 계좌를 해지했어요.”

“그렇다면!”

“그래요. 성급하게 행동한 거죠.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에요. 엘시아 경이 그 큰 마나의 덩어리를 자신의 계좌에 이전하려 한다면 아마 몸이 터져버릴 정도의 고통을 받을 겁니다.”

실제로 터질 지도 모른다. 내가 로엔의 계좌로부터 현생인 렌의 계좌로 마나를 옮길 때 죽을 뻔 했으니까.

아무리 엘시아가 8서클이라고 해도 마나뱅크 전체의 마나가 옮겨지는 압력을 견뎌낼 리가 없다.

“고통으로 쓰러질 때 공격해야겠군.”

“그래야 해요. 어쨌든 그녀가 마나뱅크를 독점한 것은 사실이니 이 기회를 놓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내 설명을 들은 크리드 경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전신의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일격에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반 경도 납득한 듯 도망갈 생각을 버리고 쓸 수 있는 몸 안의 마나를 모두 동원해 하나의 마법을 준비했다.

엘시아, 넌 너보다 높은 마법사의 마나뱅크 계좌를 흡수한 적이 없어서 이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했구나.

나도 몰랐던 사실이니 너는 당연히 모르겠지.

작은 실수가 큰 실패를 부른다.

엘시아는 링크차단만 하고 계좌해지는 안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다른 사람의 계좌를 하나하나 안정적으로 털어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계좌해지까지 했으니 그건 정말 9서클이 되어서 마나의 허용한계가 아예 없어지기 전에는 먹을 수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거기에 마스터 계좌인 로엔의 계좌에는 현재 마나가 없다. 내가 이미 다 털어먹었단 말이지.

봐라. 엘시아의 안색이 변했다. 로엔의 계좌를 열었나보다.

9서클 대마법사의 계좌가 깡통계좌라는 사실에 당황했겠지.

하지만 엘시아는 당황하지 않고 다른 계좌를 열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꺄아아아아아악!”

엘시아의 눈과 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거의 뇌가 녹아내리는 모양이다.

이대로 놔두어도 죽을 게 거의 확실하다.

크리드 경은 엘시아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뛰어나갔다. 동시에 렉스와 서피도 엘시아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콰쾅

그 상황에서도 방어마법이 자동으로 발동했다. 본인이 어떤 고통을 당하든 마나가 엘시아의 몸을 통해 그녀의 계좌로 흘러들어가는 중이니 미리 걸어놓았던 마법은 최고 파워로 발동했다.

깨갱

렉스는 너무나도 자기종족적인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튕겼다. 눈치 빠른 서피는 얼른 렉스의 배 아래에 숨어 방어마법이 일으키는 충격파를 피했다.

뒤따르던 마리포즈가 한손으로 렉스의 목걸이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을 뻗어 방어막을 때렸다.

카앙

잘 한다. 목걸이의 에너지를 마법해제의 효과로 바꾸었구나. 8서클 방어막이 단숨에 해지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저건 내가 연구실 전체를 움직이기 위해 만든 동력원이다.

엘시아의 방어막이 강제로 해제되자 그녀는 고통 속에서 또 다른 충격을 받은 듯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크리드의 검이 정확하게 엘시아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고수의 승부는 단숨에 나는 법. 나는 혹시라도 엘시아가 고통을 끊고 대응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크리드 경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크리드 경은 그대로 검을 돌려 빼며 엘시아로부터 떨어졌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마법사의 자폭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엘시아는 이미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뚫린 심장으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냉정해지려 했는데 무리였다.

정적이 흘렀다.

아론 경은 갑자기 일어난 반전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땅에 쓰러진 엘시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아는 아직 죽지 않았다. 심장이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석화 마법의 영향으로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는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마나뱅크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여전한 듯 눈과 코, 귀, 입으로부터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내 품속에는 발데스 스팅이 있다. 처음 이걸 아론 경에게서 얻었을 때에는 복수를 위해 이것으로 엘시아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조용히 로엔의 마스터 계좌를 연결하여 엘시아의 링크를 끊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되는 건데, 괜한 복수심과 미련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사고가 터져 버렸다.

어쨌든 내가 그녀의 계좌를 없애 버림으로써 엘시아는 겨우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

“성공했는데…다 이루었는데…이렇게 허무하게…….”

엘시아는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엘시아의 곁으로 걸어가서 그녀가 쓴 모자를 벗겼다. 이 미친 모자가 갑자기 또 말을 하기 시작하면 내가 미쳐 죽을 지도 모른다.

엘시아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세월이 지났지만 머리카락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도 침묵하는 모자의 영향일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죽으면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할 수 있어요.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요.”

“죽으면 다 끝…….”

엘시아는 허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숨이 멎었다. 생각보다 통쾌하지 않은 복수다.

화르르륵

이런! 마족과의 계약이 이행된다. 엘시아의 몸이 저절로 불타올라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불쌍한 엘시아, 영혼을 마족에게 빼앗겼구나.

하지만 괜찮아. 나중에 발데스를 소환해서 제거하면 너의 영혼도 풀려날 거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아론 경에게 가서 그의 몸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큰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녀는 죽었나?”

“예, 숨이 끊어졌고 저절로 불타서 재가 되었으니 죽은 게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마나뱅크가 돌아오지 않지? 아직 링크가 되지 않아!”

아론 경이 절규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문이 평생 모은 마나가 담긴 계좌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링크만 차단됐다면 복구가 가능했을 테지만, 계좌 자체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심지어 내 계좌도 사라져서 복구가 불가능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아마 그녀가 죽으면서 마나뱅크도 사라진 모양이에요. 어딘가에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링크하는 방법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새로 계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막아버리기로 했다.

원래 나는 마나뱅크를 세상에 공표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환생했을 때 마나를 이어받기 위해 만들었을 뿐이다.

엘시아의 음모에 의해 마나뱅크가 세상에 퍼졌고, 마도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계좌를 둘러싼 음모에 직접 휘말려 본 나로서는 역시 마나는 스스로 수련해 자신의 몸에 모은 것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나뱅크의 마나를 돌려줄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이것으로 마나뱅크는 세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하자.

이제는 마나뱅크가 없었던 시절처럼 마법사들은 스스로의 몸에 마나를 축척해서 마법을 써야 한다.

마도의 전성시대는 끝난 것이다.

전 세계의 마법사여.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이제 좋은 시절은 갔으니 너희들은 알아서 꿋꿋하게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런가. 이제 마나뱅크는 없는 건가.”

아론 경은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허탈함에 일어설 기력도 잃은 듯 한참동안이나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움직이지를 못했다.

*

아론 경은 떠났다. 프리스톤 가문 공격에 참여한 다른 마법사들과 만나러 간 것이다.

우리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호수에서 벗어나 숲을 따라 이동했다. 이번 공격에 데빌 베인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걸 지켜야 한다.

“마나뱅크의 마나를 되찾을 방법은 없을까?”

이반 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드 경의 앞이라 나에게 반말을 쓰지만 사실은 스승에게 도움을 청하는 질문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들 거 같아요. 설령 마나뱅크와 링크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이미 계좌 자체가 사라진 것 같으니까요. 새로 계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죠.”

“그렇군.”

“이반 경은 마나를 많이 모아 두셨나요?”

“그렇지는 않네. 나는 가문의 후계자도 아니니 평소 모아두었던 마나도 잦은 전투로 대부분 써 버렸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이반 경은 대답은 하지 않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정령이 남아 있잖아요.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훨씬 나은 상태인데, 그거라도 위안거리로 삼아야겠어요.”

“정령이라, 확실히 정령이 있으니 최악은 아니지. 하지만 당분간 마족의 후계자와 싸우는 일은 중지하는 게 낫겠네.”

“그렇죠. 마법사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지금 마족의 계약자는 너무 큰 부담이 될 테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약해진 셈이라 지금 마족의 계약자를 발견한다고 해도 모른 척 하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

다행히도 크리드 경이 있으니 최소한의 방어태세는 갖출 수 있다. 렉스와 서피, 그리고 마리포즈도 전투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암습에 대한 대비도 충분하다. 거기에 뿌우까지 있으니 어떤 상황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역시 불안하다. 내 전투력이 약해지니 이렇게 자신감이 사라지는구나. 돌아가면 마법진을 이용한 방어체계 구축에 힘을 써야겠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마나뱅크의 신규 계좌에 마나를 채워 넣어 예전의 전투력을 되찾아야겠다.

이반 경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나도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일이 아니라 엘시아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자꾸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데, 어쩌면 밤에 엘시아의 꿈을 꿀 지도 모르겠다. 꿈에서라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정리되려나?

나는 품속에 손을 넣어 침묵하는 모자를 만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가 이걸 챙긴 것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후일 내가 침묵하는 모자를 쓰고 있다가 대화를 하게 된다면 엘시아에 대한 것들을 알려달라고 해야지. 다른 소원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내가 없는 세월동안 엘시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능한 한 다 듣고 싶다.

미련이려나?

엘시아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 억지를 부려서라도 좋은 추억 쪽으로 남기고 싶다.

비록 엘시아가 대륙 전체에 큰 해악을 끼쳤지만 이제 나는 그녀를 이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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