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78화
*
크리드 경의 구레나룻에 살짝 섞여있던 새치가 사라졌다. 갈색의 머리카락 사이에 비치던 흰 머리가 싹 뽑은 것처럼 없어진 것이다.
“우와, 크리드 경, 며칠 사이에 젊어졌네요.”
“하하하, 정령의 힘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네.”
내가 반쯤 놀리듯이 말하자 크리드 경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도 의외다. 정령의 힘으로 노화를 방지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젊어지는 건 몰랐다.
그런데 마법으로 크리드 경의 몸을 살펴보니 나름 납득이 갔다.
내면의 마나를 운용할 줄 아는 크리드 경은 정령의 힘을 받아들인 상태로 기사 수련을 했다. 그 결과 육체 자체가 어느 정도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발견이다.
엘프의 가족이 된 인간이 계약의 영향으로 점점 하프엘프처럼 변해간다는 것은 고대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데 마스터 경지에 이른 기사가 정령과 계약하니 이것과 비슷한 효과가 나는 것이다.
어쩌면 정령은 마법사보다 기사와 더 상성이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상황을 보면 이쪽이 훨씬 좋다.
“오늘 훈련은 제가 강화마법을 다 걸고 할게요. 그래도 되죠?”
“그렇게 하게. 나도 정령력을 좀 써 볼 테니.”
윽, 가능하면 크리드 경은 예전 그대로 상대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크리드 경의 눈빛을 보니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해 보고 적응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봐요. 나를 몰모트로 쓸 생각인가요?
나는 조금 서글퍼졌지만 참고 묵묵히 강화마법을 있는 대로 다 걸었다.
크리드 경은 묵묵히 기다리다가 내가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자 짧게 한 마디 외쳤다.
“소리아 소환.”
촤아아아
크리드 경의 발밑으로부터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지하에 수맥이 흐르나보다. 다음번엔 수련장을 옮겨야지.
소리아는 크리드 경의 몸을 적시며 크리드 경의 등 뒤에 살짝 껴안은 모습으로 소환되더니 곧 바로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걱, 저 인간이 우째 정령빙의를 쓴다냐. 저런 걸 가르쳐 준 적은 없는데.
크리드 경의 눈동자가 맑은 코발트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피부 자체도 살짝 물광이 나기 시작했다. 물을 뒤집어썼는데 옷은 전혀 젖지 않았다.
“시작하지.”
잠깐만요! 그 정도로 정령을 다룰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대기를 외치려 했지만 이미 크리드 경은 움직였다. 평소처럼 내가 공격하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전투력을 제대로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리라.
“젠장!”
쾅
가볍게 휘두른 검격에 거인의 힘을 지닌 내 창이 밀려났다.
힘의 집중이 다르다. 타격 순간 일점에 전신의 모든 힘을 집중시키는데 그게 겉으로는 전혀 표시가 안 난다.
파지지직
그래도 창으로부터 뇌전이 흐르자 크리드 경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물의 방어막이 뇌전은 제대로 막지 못하는군.”
“그 정도면 제대로 막는 거라고요.”
나는 이를 악물고 외치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고수를 상대로 섣불리 접근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행위이지만 지금은 물러나는 게 더 위험하다.
이판사판.
쾅, 쾅
무기가 부딪치는데 왜 폭발음이 들릴까? 내 팔목은 어째서 이리 시큰 거릴까?
그래도 두어 번 무기를 부딪치니 상대의 힘을 대충 알겠다. 이정도면 몇 방 정도는 방어막으로 막을 수 있어.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한 걸음 접근했다. 반걸음도 위험한데 단숨에 한 걸음을 접근하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크리드 경의 검이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방어막을 강화하며 오히려 반격을 가했다.
치고받기!
콰쾅
“끅!”
숨이 막힌다. 아까 무기 부딪칠 때는 가볍게 친 거였구나. 공격이 제대로 먹힐 때 들어가는 힘은 세 배 이상 강하다.
방어막이 한 번에 깨어지고 난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며 뒤로 튕겼다.
그래도 크리드 경은 내 방어막을 깨는 순간 공격을 멈췄다. 안 그랬으면 검이 내 몸을 정통으로 가격했을 것이다.
사실 그래도 강식장갑로브가 있으니 괜찮았겠지만 충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허참.”
크리드 경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 잘 때려놓고 왜 혀를 차세요?”
“렌 경은 4서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요.”
“4서클 방어막이 그리 세다면 마도사의 방어막을 일격으로 깨기 어려울 것 같군.”
아, 그런 걱정을 하고 계십니까?
염려 마세요. 님의 방금 일격은 이반 경 정도가 아니면 충격 없이 막기 힘들어요.
나는 크리드 경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었다.
“제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얻은 게 적지 않아요. 이반 경 같은 분과 같이 행동하면서 살아남으려고 방어막은 거의 마도사급으로 강화해 놨거든요. 그러니 제걸 일격에 깰 수 있다면 6서클 마도사의 방어막도 깰 거예요.”
“그런가?”
“제가 보기에 방금 일격은 7서클 마도사의 방어막도 부술 수 있겠어요. 8서클은 힘들고요.”
“음, 그렇군. 7서클까지는 된단 말이지.”
일격에 방어막만 깨면 맞서 싸울 만 하다고 크리드 경은 판단한 듯하다.
일리가 있는 소리다.
방어막이 깨지면 마법사는 충격을 받는다. 내가 크리드 경에게 맞아서 내상을 입은 게 아니라 방어막 깨지는 충격에 이렇게 된 거다.
크리드 경에게 근접거리를 허용하면 마도사라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다. 환상마법으로 허상을 만들어서 공격을 회피하기 전에는 막을 방법이 거의 없다.
“혼자의 힘으로 그 정도라면 마법 강화를 조금 받으면 8서클 방어막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가? 그것 나쁘지 않은 소리군. 혼자 힘으로 싸울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마세요. 정령 계약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8서클과 일대일로 붙을 생각을 하세요.”
“하하하, 마법사인 자네 자존심을 건드렸나보군. 미안하네. 그래, 내가 너무 성급했지.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크리드 경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사과를 하다가 곧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다.
현재의 강함을 냉정하게 측정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아직 얻지 못한 강함을 조급하게 욕심내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나 보다.
“그럼 계속 하지.”
크리드 경은 자세를 바꾸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빠른 움직임으로 내 아래위를 번갈아 가면서 공격하는데 물의 방어막이 묘하게 빛나면서 잔상을 남겼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창을 땅에 박은 후 손에서 놓고 뒤로 주욱 물러났다.
그러자 창 안에 있는 뿌우가 내 의도를 알고 강력한 뇌전을 사방으로 뿜었다.
파지지지지
크리드 경도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것으로 거리를 띄우는 데 성공. 이제는 마법사의 전투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파워 램!”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성추가 크리드 경을 향해 날아갔다. 이건 물리력이 장난 아니라 부숴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니 피할 수밖에 없지.
생각대로 크리드 경이 피했다.
난 이때다 하고 다시 파워 램을 땅에 꽂아 놓은 내 창을 향해 날렸다.
펑, 파지지지지
뇌전을 뿜어내는 창이 파워 램에 튕겨 크리드 경을 향해 날았다.
“이런! 임기응변이 뛰어나군.”
크리드 경은 감탄성을 발하며 피해를 각오하고 뇌전의 그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놀랍게도 검으로 뇌전을 갈라 버리고 창을 쳐내려 했다.
그건 안 되지.
“뿌우 소환!”
“뿌우!”
창속으로부터 뿌우가 튀어나와 자신의 집인 창을 잡아 휘둘렀다.
캉
뿌우는 거인의 힘이 없기에 크리드 경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겼다. 그러나 바람의 정령답게 허공에서 가볍게 몸을 뒤집으며 연속해서 크리드 경에게 창을 찔러댔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
뿌우가 튀어 나와서 그런지 창의 기운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 찌를 때마다 앞으로 뇌전이 튀긴다.
크리드 경은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허공에서의 공격은 의외로 피하기가 어려운 듯 공격의 영역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 사이 다시 마법을 완성시켰다.
“진흙 장판.”
크리드 경이 서 있는 일대가 꿀렁대며 발목이 푹푹 빠지는 진흙지대로 바뀌었다.
어때요? 이러면 움직임이 느려질 수밖에 없겠죠?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보았다.
그런데 크리드 경은 바닥이 변화하자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걸음을 굉장히 날렵하고 가볍게 옮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진흙에 발이 빠지지 않고 마치 수면 위를 걷듯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망했다. 물의 정령이 빙의됐으니 물 위에서 걸을 수 있겠지. 진흙 정도는 아예 신경도 안 쓰겠고.
우째 내가 이런 실수를!
귀중한 마법 하나를 헛되이 날렸다. 그 사이 크리드 경은 뿌우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제 마법을 쓸 여유는 거의 없다. 하나 정도를 겨우 쓸 수 있을까? 그것도 고급 마법은 불가능하다. 짧게 쓸 수 있는 하급마법 중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은?
“현혹의 그림자!”
촤라라라라
내 모습이 여섯 개로 갈라지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실체인 나는 왼쪽으로 뛰었는데 다른 다섯 개의 허상은 뒤쪽과 오른쪽으로 뛰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냥 원래대로 서 있었다.
하급 마법이지만 환상을 다루는 내 정신력은 하급이 아니다. 시각뿐 아니라 심장 뛰는 소리까지 그대로 재현해 냈다.
“이런!”
크리드 경이 당황한 목소리로 혀를 차며 멈추어 있던 내 허상 하나를 베었다. 팍 하면서 꺼져버리는 허상.
그때 뿌우가 창을 들고 오른쪽으로 뛰고 있는 내 허상 중 하나에게로 이동했다.
“그쪽인가!”
촤악
아니거든요. 페인트 거든요.
나는 마법을 쓸 충분한 거리를 벌였다. 그리고 크리드 경은 내 창의 바로 앞에 있다.
“라이트닝!”
파지지지직
내가 노린 것은 크리드 경이 아니다. 창이다.
라이트닝 마법이 창에 닿자 때마침 창속에 들어간 뿌우의 힘으로 급격히 확산되며 사방으로 퍼졌다.
꽈드드드등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는 천둥번개처럼 대기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뇌전과 충격파를 뿌리는 창. 이건 내가 최근에 개발한 공격법 중 하나인데 급한 김에 크리드 경을 상대로 쓰게 되는군.
“크윽.”
크리드 경은 검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며 가까스로 직격은 면했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물의 방어막은 화염과 물리력에 대해서는 상당한 방어력을 제공하지만 뇌전 쪽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졌네.”
“크리드 경과 대전해서 처음으로 이겨 보네요. 하하하.”
속이 시원했다. 그동안 얻어맞은 거에 대해 조금은 복수한 느낌이랄까?
“아직 멀었군. 자네에게 지다니. 환상의 진가를 구분 못할 때부터 승부는 난 거였나.”
크리드 경은 입맛이 씁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겠지. 아무리 정령을 사용했다고 해도 그가 아는 난 4서클의 마법사다. 6서클도 이긴 전력이 있는 크리드 경이 물의 정령까지 얻었는데 4서클인 나에게 패했으니 충격이 크겠지.
나는 그게 아니라는 듯 크리드 경에게 말했다.
“방금의 환상 마법은 특수한 거예요. 아마 6서클 환상 정도의 현실감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과거에 6서클 환상은 구분을 했었거든. 반쯤 운이었지만.”
“결국 지금 크리드 경이 마법사와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환상을 꿰뚫어 보는 훈련이 필요하겠군요.”
“도와주겠나?”
으윽, 이 양반이 눈치가 빠르네. 근데 이거 훈련 시켜줘도 되는 건가?
이 상황에서 환상까지 꿰뚫어 볼 수 있으면 정말 내가 못 이기는데.
어쩔 수 없다. 마법사는 배울 자격이 있는 자가 배움을 청하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알았어요. 제가 만드는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웬만한 건 다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오늘부터 연습하죠.”
“고맙네.”
감사의 인사를 받아도 그다지 기쁘진 않다. 대 마법사용 최종병기가 하나 탄생되는 느낌인데, 알고 보면 나도 마법사 아니겠는가.
그래도 나는 성심성의껏 크리드 경에게 환상마법을 펼치며 구분법을 익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