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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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영지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훈련장에 있는 몰던에게 갔다. 그리고 얼굴을 보자마자 얼른 결심했던 대로 호칭을 불렀다.
몰던은 잠깐 움찔하더니 약간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와, 왔니? 덴판의 수도에서 큰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말을 돌리시네요. 후훗. 그래도 한 번 부르니 이제는 훨씬 혀가 부드럽게 돌아갈 것 같다. 그동안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왠지 계속 혀가 굳는 느낌이었거든.
“예,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아요. 아버지.”
“그, 그래.”
“그 동안 기사들과 트러블은 없었어요? 아버지.”
입에 완전히 붙을 때까지 당분간은 계속 말끝에 호칭을 붙여야지. 며칠만 연습하면 말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익숙해 질 거야.
“없었다. 네가 떠나기 전에 실비아 공주에게 주의를 줘서 그런지 거의 같은 동료 대하듯 하더구나. 오히려 이쪽에서 미안해 할 정도다.”
“그것 참 잘 되었네요. 아버지.”
예상외다. 기사들의 뿌리 깊은 평민 천시 근성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닌데, 실비아 공주가 어떻게 주의를 줬는지 궁금하네.
나는 원래 한 번 주의를 준 후, 그 다음에 기사들이 사고를 치면 강하게 대처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기사들이 전혀 사고를 안 쳤다면 뭐, 나쁜 일은 아니다.
실비아 공주의 기사 관리 능력을 인정해야 하려나?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슬쩍 알아봐야겠다.
나는 몰던과 계속해서 아버지를 말끝에 붙이며 대화를 나눴다. 영지의 치안이나 병력 사항, 주변에 출몰하는 마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큰 문제는 없었고, 용병단원도 대부분 우리 영지의 정규병사가 된 것을 만족하는 분위기라 했다.
다행이다. 내가 배려를 해준다고 해도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건데 지금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한 시간 정도 몰던과 대화를 나누고 영주의 저택으로 오니 파우스 스승님께서 와 계셨다. 마탑의 일이 바쁘실 텐데 내가 온다는 전갈을 듣고는 시간을 내신 것 같다.
“덴판의 수도에서 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정말 마족의 계약자가 황제에 이어 아론 경까지 암살하려 한 거냐?”
이게 소문이 크게 나긴 크게 났네. 몰던에 이어 파우스 스승님도 만나자마자 같은 질문을 하시다니. 하하하.
“예,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가 어느 정도 끝나서 데빌 베인에서도 한판 거들기로 했습니다.”
“정말 난세구나. 우리 볼스테어도 조심해야겠다.”
“볼스테어는 당분간 괜찮을 거예요. 이쪽을 장악하고 있던 웨어울프 킹은 이미 제거되었잖아요. 다른 자들이 침투해 들어올 때까지는 여유가 있다고 봐요.”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왕국보다 콘돌스핀 가문의 재정비는 잘 되고 있나요?”
“이쪽은 너무 잘 되서 걱정이란다. 이반 경과 너의 명성을 듣고 가문에 속하지 않은 마법사들이 매일같이 찾아온단다.”
“그들 중에 쓸 만 한 자가 있어요?”
유랑 마법사 중 이반 경 같은 특이한 경우를 빼면 고위의 마도사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가문에 소속되지 않고 돌아다니겠는가. 거의 3서클 이하의 마법사이고 여러 가지 문제로 가문에서 축출된 자들이 대부분이다.
파우스 스승님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뛰어난 자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 난 그들에게 카탈라난의 교육을 시키고 있다. 마도사 한 명에 하급 마법사 50명으로 이루어진 카탈라난이라면 충분한 전력이 되지 않겠니?”
“아하, 워메이지 병단을 새로 결성하셨군요. 잘 하셨어요.”
역시 우리 스승님, 내가 웨어울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카탈라난은 50명의 마법사로 마법진형을 이루어 5천명의 병사를 강화하는 수법이다. 지휘가 되는 몇몇 사람만 있으면 다른 50명은 3서클로도 충분한 효력을 낸다.
그걸 스승님은 여러 개 만들 생각인 거다. 확실한 전력이 된다.
원래는 중앙에서 지휘하는 자가 나처럼 높은 정신체계와 집중력을 가져야 하지만 미리 지속적인 훈련을 시켜 카탈라난 전문 부대를 만들면 운용도 더욱 매끄러워 질 테니 아쉬운 대로 쓸 만 할 거다.
볼스테어 왕국측에는 확실한 전력이 되고, 콘돌스핀 가문은 마법사 수백 명을 워메이지로 교육시킨 무투파 가문으로 거듭나게 되는 거지.
“그 정도면 앞으로 전쟁으로 밀리지는 않겠네요. 제국처럼 뒤로 들어오는 암살 쪽만 조심하면 되겠어요.”
“새로 가입한 마법사들도 만족해하고 있단다. 그들에게 있어 카탈라난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마법적 가르침보다 고위의 것이니 말이다.”
“그렇죠. 카탈라난 정도면 워메이지 훈련을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죠.”
정령적인 부분은 뺐다고 해도 인체를 이용한 유동마법진형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안에 들어있는 고위 마법의 이론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 유랑 마법사들에게는 거의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람을 모아 교육을 시키면 발전을 하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도 튀어나오는 인재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 중에서도 마도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지금 현재로도 수백 명의 마법사를 받아들였으니 콘돌스핀 가문의 힘이 몇 배로 커진 것은 맞다.
파우스 스승님은 그 외에도 그동안 왕국과 가문에 있었던 일들을 대충 이야기 해 준 뒤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몇몇 중요한 일들은 내 의견을 묻는 것이 내가 의도하는 대로 운영을 하시려는 듯하다.
사실 파우스 스승님은 권력에 욕심이 없다. 지금 가문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상황이 그래서 하는 거지 내가 조금 더 성장하면 다 넘길 거라고 아예 못 박아 놓으셨다.
더군다나 스승님은 요즘 마나 수련에 재미를 붙이신 듯하다. 서클이 계속 올라 이미 3서클을 뚫었고, 이제 곧 4서클이 될 거 같은 기분이니 가문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탄을 하셨다.
그런데 한탄을 하면서도 힘든 기색은 없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역시 마법사는 이런 저런 거 다 필요 없어. 마법이 되어야 기세도 살고 인생도 행복한 거지. 암.
스승님께서 가신 후,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영지의 보고서를 읽고 쉬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비아 공주가 찾아왔다.
실비아 공주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생각해보니 이 여자는 언제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도리아 왕국의 상황이 여전히 좋아지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인가요?”
“우리 아도리아 왕국이 볼스테아 왕국과 합병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합병을 추진하고 있습니까?”
나는 살짝 놀라 되물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공주가 직접 언급을 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나보다.
실비아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아직 진행되는 것은 없어요. 단지 이번에 우리 측 왕실에서 말이 한 번 나왔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공주께서 저에게 의견을 묻는 이유가 뭐죠?”
“볼스테아 출신의 마법사들이 말하더군요. 렌 경이 이곳 마탑을 형성하면서 그들에게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고요. 그들은 방계로써 이용당할 것을 각오하고 콘돌스핀 가문에 들었는데 오히려 대접을 해주니 진심으로 감격해 하고 있어요.”
“가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에 의해 합병을 하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같은 식구가 된 것이니 잘해 줘야지요.”
“왕실에서는 콘돌스핀 가문이 마법사들을 회유하려 한다고 생각해요.”
“아, 그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군요.”
깨달았다. 이건 내가 오해 살만한 일이 맞다.
콘돌스핀 가문의 힘을 키우기 위해 아도리아의 마법사들에게 잘 해준 것이지만 아도리아 왕실에서 볼 때는 콘돌스핀은 볼스테어의 마도가문이다. 그야말로 자국의 마법사들이 볼스테어로 전향하는 느낌일 것이다.
“이렇게 하죠. 지금 파우스 스승님께서 새로 가문에 귀속된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카탈라난의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죠?”
“예.”
불안한 표정, 볼스테어의 국력이 급격히 상승하면 아도리아는 그만큼 독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카탈라난의 위력은 당해본 아도리아측이 가장 잘 알기에 이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이곳 마탑에서는 아도리아쪽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카탈라난의 훈련을 하도록 하죠. 그리고 거기에는 아도리아의 기사와 병사가 동원되는 것으로 하고요.”
“아!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아도리아의 워메이지로 계약하는 건가요?”
실비아 공주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카탈라난은 50인의 마법사와 5천의 병사로 이루어진 진형이다. 그 위력은 대단히 뛰어나서 이거 한 부대면 거의 3만의 군단에 필적한 전투력이 나올 거라는 평가가 있다.
아도리아의 현재 국력은 형편없고, 재정도 바닥이다.
유지할 수 있는 병사의 수도 예전의 5분의 1정도밖에 안 되서 이대로라면 독립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
하지만 여기에 카탈라난 부대가 몇 개 배치된다면 어떨까?
적어도 주변 왕국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무력은 갖출 수 있다.
“정식으로 아도리아 왕국과 콘돌스핀 가문의 계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하고, 우리 영지의 마탑은 아도리아 왕국을 전격적으로 지원하기로 합시다.”
“감사해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왕실 측에서도 안심할 수 있어요.”
이 여자가 미소 짓는 표정이 꽤 예쁘네. 지금까지는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항상 긴장된 상태만 봐서 몰랐는데 말이야.
실비아 공주는 잠깐 동안 기뻐하다가 곧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 대가로 우리 왕실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 놔, 그냥 해 준다고!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망국의 공주는 이렇게 매사에 조심을 해야 하는구나. 하긴, 세상에 공짜로 도와주는 사람은 없지. 특히 이런 국가 단위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더더욱 무서운 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가 아니겠는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영지는 데빌 베인을 위해 존재합니다. 공주도 맹세했듯이 우리는 국가의 이익보다 데빌 베인의 목적을 우선해야 하지요. 데빌 베인의 입장으로 볼 때, 아도리아 왕국이 망하는 것 보다는 이대로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는 게 이익이 되거든요. 이번 조치는 공주와 기사들이 데빌 베인에 가입한 대가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국가의 이익보다 데빌 베인의 목적이 우선이니…….”
어때? 마음에 와 닿지?
지금까지 실비아 공주는 말만 맹세를 했지 실제로는 아도리아 왕국을 위해 데빌 베인에 가입을 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실비아 공주도 고민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난 데빌 베인의 사정에 의해 아도리아 왕국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 거다. 그리고 실비아 공주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
“렌 경의 말씀을 잘 알겠어요. 저도 맹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노력할게요.”
똑똑한 여자네. 말을 돌려도 바로 알아듣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니 말이 길어지지 않아서 좋다.
중요한 일이 해결되자 실비아 공주는 훨씬 가벼운 표정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좋아지자 난 미리 준비했던 목걸이를 내밀었다.
“덴판 제국의 사건은 들었을 겁니다. 그 사건을 처리하면서 황궁 보물 중 몇 개를 얻었는데 이게 실비아 공주님께 어울릴 거 같더군요.”
커다란 붉은 루비가 박힌 목걸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실비아 공주를 조금은 화려한 느낌이 들게 해 줄 것 같았다.
마법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보물이고, 착용자의 피부를 보호하고 독을 모아 태우는 효능까지 있다. 말하자면 일급 아티팩트다.
실비아 공주는 상자에 담긴 목걸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것을 꺼내 목에 걸었다. 나는 얼른 손거울을 꺼내 공주에게 주었고, 공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왕실이 약해진 후 한 번도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고마워요. 정말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저야말로 그동안 공주께 조금 비정한 부분을 보여드린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조직을 위한 일처리였으니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이 아니라 솔직히 인간 같지 않은 면이 있었어요. 아무튼 잊도록 할게요.”
야, 그건 너무 솔직하잖아.
나는 살짝 삐지려다가 말았다. 잘 해줄 때에는 진짜 잘 해주라는 우리 뿌우 스승님의 말씀을 따라야지.
그 뒤 나는 실비아 공주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그녀를 저택 밖까지 배웅했다. 그것으로 나의 영지 첫날 일과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