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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75화 (75/250)

로엔의 마나뱅크 75화

내 신호를 받은 이반 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군대를 보내는 것은 몇 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텔문 가문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스톤 가문은 대륙 곳곳에 숨겨놓은 세력이 있습니다. 일을 크게 벌이면 엘시아 프리스톤이 몸을 숨길 가능성이 큽니다.”

“파병을 하면 그녀가 도망갈 거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도 암살이 실패를 했으니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아론 경이 중태라고 발표를 했고, 프리스톤 가문이 범인이라고 밝혀진 것을 모르니 아직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이반 경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제국과 마도가문의 정예들을 모아 기습을 감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스틱 엑스 경의 노력으로 프리스톤 가문의 방어마법 중 상당수를 무력화 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적이 눈치 채기 전에 포위를 하고 공격을 가한다면 틀림없이 엘시아 프리스톤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 지도 모르겠군.”

아론 경도 동의를 했다. 군대를 보내 봤자 큰 효용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리스톤 가문이 아니다. 바로 엘시아라는 희대의 마녀인 것이다.

더군다나 정확한 증거도 없이 군대를 파병했다고 엘시아가 행방을 감추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국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정복전쟁을 벌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좋소. 그렇다면 데빌 베인에서도 도움을 주시겠소?”

“저희는 그걸 위해 모인 집단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미스틱 엑스 경도 참가할 것입니다. 단,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덴판 제국과 아론 경인만큼 전체 지휘는 아론 경께서 직접 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었던 부분이오. 내 몸이 회복되는 대로 결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진행을 합시다.”

“그렇게 하지요. 관련 자료를 모두 드릴 테니 참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모르니 경께서 조사한 내용도 공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오.”

“그리고 아론 경을 암살할 때 쓰인 단검. 그것도 분석해 보고 싶은데 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단검을?”

아론 경은 즉시 대답을 못 하고 잠시 망설였다.

발데스 스팅은 특급을 넘어선 초특급 아티팩트다. 그걸 아론 경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물건을 넘겨주기는 아까운가 보다.

‘쯔쯔, 아론 경. 의외로 배포가 없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반 경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그 물건은 마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 년 정도 분석해 보고 돌려드리지요.”

“알겠소. 그럼 바로 보낼 테니 혹시 분석에서 다른 정보를 얻게 되면 본인에게도 알려주기 바라오.”

정보는 무슨, 마법적인 성과를 얻게 되면 연구 결과를 넘기라는 거군. 아무튼 욕심은 많아서.

“그야 당연하지요.”

이반 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대답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떤 식으로 비밀리에 십대마도가문의 수장들에게 프리스톤 가문의 상황을 설명하고 고위마법사들을 동원하는 방법에 대한 것인데, 그건 아론 경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십대마도가문의 수장들끼리 한 협약이 있어 의외로 손쉽게 전력을 갖출 수 있다고 한다.

단지 프리스톤 가문에서 다른 가문에 심어놓은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가주급 이외에는 최후의 순간까지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다.

“각 가문의 마법사들은 프리스톤 가문을 포위하기 전까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야 합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맡겨 두게. 나중에 날짜가 정해지면 데빌 베인에도 알리겠네.”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회의는 어느 정도 정리된 셈이다.

우리는 황제의 집무실을 나와 후궁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에 와 보니 세리아 공주가 와 있었다.

이제는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니 후작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잠시 칭호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냥 하던 대로 부르기로 했다.

“세리아 공주님, 오셨군요.”

“예, 저 내일 영지로 떠나야 할 거 같아서 그전에 뵈려고 왔어요.”

“직접 영지를 관리하시는 겁니까?”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데, 제가 원래 그쪽에 관심이 좀 있어요.”

아하, 세리아 공주는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군. 경영에 관심이 많다는 소리네.

요즘 느끼는 건데 공주 타이틀을 달고 있는 여성들은 의외로 가만히 인생을 즐기는 걸로 만족하지 않고 뭔가 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감이 공주라는 신분에 묻히는 게 싫은 걸까?

황실의 인형처럼 길러진 세리아 공주 역시 내면에는 그런 욕망이 있었는지 영지를 받자마자 떠난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세리아 공주의 표정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살짝 눈치는 보지만, 말린다고 해도 들을 마음은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법사에게는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고 오직 서클로 상하가 구분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지만 고위 귀족들이나 기사 계급들 사이에는 남녀차별이 상당히 심한 구석이 있다고 들었다.

“잠시 만요.”

나는 무한의 주머니를 열어 안에서 꽃모양의 보석 장식 머리핀을 꺼냈다. 하얀 색 꽃잎 여덟 개에 파란 토파즈 세 개가 꽃술 대신 장식되어 있는데, 수수하면서도 꽤 아름다운 핀이다.

“이걸 드리지요. 착용자의 머리에 피 흐름을 좋게 해주는 핀이에요. 여러 군데 신경을 쓰다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데, 그게 다 피의 흐름에 영향이 있다고 하네요. 유명한 여성 마법사인 세시아 경께서 항상 끼고 다니셨다고 하는 물건이죠.”

“어머, 고마워요. 고맙게 받을게요.”

나는 이미 세리아 공주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었다. 거의 두 번 만나면 하나씩은 선물을 주었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세리아 공주는 이번에 받은 머리핀이 특히 마음에 드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직접 영지 경영을 하는 것을 응원한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저렇게 기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렌 경도 영지를 관리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따로 조언해 주실 말씀은 없나요?”

“하하하, 미스틱 엑스 경의 영지를 대신 관리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 이렇게 데빌 베인의 일만 해도 바빠서 영지 관리는 전문경영인하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지요. 시간이 있어도 마법 수련에 써야 하는 입장이라 말이죠.”

“그렇군요.”

얘가 왜 얼굴이 발개지지? 아, 나중에 자기가 내 영지도 같이 관리해 주겠다고 상상하는 건가?

뭐, 상관없겠지. 문제는 정말 내가 세리아 공주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좀 된다.

암묵적 약혼까지 해 놓고 뭔 헛소리냐고?

암묵적이라 그렇지. 정식 약혼이 아니라고. 정치적인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는 상황. 파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없던 거로 하는 게 얼마나 간편하고 쉬운 일이겠어?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세리아 공주가 여자로 안 보인다. 어린 애로 보일 뿐이다.

이놈의 저주 같은 전생의 여성관은 언제쯤 고쳐질지 모르겠다.

엘시아에게 복수를 완성하면 미련이 사라지려나? 그러나 이미 영향을 받을 데로 받아 버려서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고 말이야.

나는 세리아 공주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와 함께 같이 식사를 하고 산책까지 하며 시간을 보냈다.

뿌우의 가르침에 따라 최대한 상대에게 배려를 했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까지 세리아 공주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별로 즐겁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싫은 것은 아니고, 예쁘게 생긴 어린 애와 놀아주는 느낌이다.

참고로 나는 아이를 꽤 좋아하니, 이것도 나름 나쁘지는 않다.

어쨌든 이건 내가 원하는 청춘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반대로 이걸 외면하면 정말 평생 제대로 된 연애는 포기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해서 참고 적응하기로 했다.

이런 내 심정을 전혀 눈치 못 채고, 세리아 공주는 오늘도 즐겁게 놀다 갔다.

*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황제의 즉위식을 포함한 7일간의 연회는 무사히 끝이 났다. 우리 데빌 베인은 그 사이 암중으로 텔문 가문과 접촉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끝내고, 결과를 아론 경에 넘겼다.

아론 경도 약속한 대로 그쪽의 조사 내용과 함께 발데스 스팅을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는 황도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반 경과 함께 무리를 빠져나와 따로 움직였다.

우리 일행은 나와 이반 경, 렉스, 마리, 그리고 렉스의 목줄에 기생하는 서피, 마지막으로 이번에 우리와 합류한 크리드 경이다.

크리드 경은 우리가 은밀하게 무리와 떨어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따라왔다.

같이 일하기 편한 성격이다.

며칠 간 길이 아닌 산과 들을 가로질러 이동한 우리는 거대한 숲이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크리드 경은 우리가 어디 있는지 깨닫고 말했다.

“여긴 대삼림이 아닙니까? 엘프이 영역이라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일단 여기 머물면서 안에 있는 우리 동료를 기다릴 거예요.”

“엘프의 영역에 사는 동료가 있다고요?”

“예, 며칠 기다리면 만날 수 있어요.”

성녀의 자격으로 엘프의 숲에 들어간 미리아는 이미 엘프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황이다. 엘프들은 그녀를 가족처럼 대했고, 계속해서 같이 숲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미리아는 인간이다.

시간이 정체된 것과 같은 엘프의 숲은 미리아에게는 평온하지만 지루한 곳이기도 했다.

이미 유년 시절 대부분을 거의 홀로 보낸 미리아였기에 화려한 도시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가끔씩 내 꿈에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는 미리아에게 나는 엘프의 숲에서 얻을 것을 다 얻은 후에는 나와서 같이 데빌 베인의 활동을 하자고 했는데, 이번에 미리아가 엘프들의 심사를 받고 정식으로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전에도 가족처럼 대했지만 이제는 정말 가족이 된 것이다.

더불에 미리아는 엘프들의 축복을 받아서 인간이 쓸 수 없는 강력한 숲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나 이외에는 어린 나이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바로 미리아일 것이다.

이제 약속대로 미리아와 합류해서 같이 마족의 후계자와 싸울 것이다. 엘시아를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미리아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마법으로 안락한 집을 만들고 대기했다. 그 사이 나는 매일 같이 크리드 경에게 무술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크리드 경은 내가 의외로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것을 알고는 점점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렌 경은 마법사가 아니었어도 기사로 성공할 수 있었을 걸세.”

“평민 출신이라 기사는 무리고, 용병은 가능했을 겁니다.”

“그렇군. 마법사가 좋은 점은 재능이 증명되면 무조건 귀족의 신분을 얻게 되는 거지.”

“운이 좋아야 하는 거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법사든 기사든 재능의 한계까지 자신을 갈고 닦는 거 아닐까요?”

“맞는 소리네. 그런 면에서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게.”

“으윽, 알겠습니다.”

육체는 이미 한계인데 옆에서 지켜보는 크리드 경은 아직 괜찮다는 판단인 듯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휴식을 멈추고 창으로 지르는 동작을 반복했다. 수련은 모든 마법무구의 효과를 지운 상태에서 행하기 때문에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땀이 흐르다 못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한 수련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도 미리아야. 빨리 나와라. 이 수련 계속하면 죽을 거 같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우리가 들판에서 머무는 사이 대륙은 어둠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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