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72화
정말 뛰어난 자들, 그러니까 기사로써 극한에 도달할 것 같은 인재도 있었다.
그러나 엘시아는 그런 자들이 나타나면 제대로 크기 전에 미리미리 제거를 하면서 관리를 했다.
엘시아가 죽음을 가장하고 은둔한 후에도 기사들의 발전은 없었다.
지금은 정말 비전서가 있어도 대부분 이해를 못 하는 수준이 되었다. 무술의 전반적인 수준이 확 떨어진 것이다.
원래 경지에 도달하려면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 길을 열어 지고의 단계를 깨우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령 내 전생인 로엔이 당대 최고의 8서클 마도사의 제자가 안 되었다면 9서클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여기 크리드 경은 그야말로 천재 중에 천재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뛰어난 스승을 만나지 않았다. 무가에서 자라 기사단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우리가 아는 무기술과 육체적 수련을 체계적으로 받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드 경은 마나 주입의 단계에 도달했다.
혼자 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미 50이 다 되어 육체의 노화가 시작되어서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갈 기력을 잃었다. 투지는 사라지고 기꺼이 어둠속을 걸어 길을 찾겠다는 의지는 꺾였다.
‘지금이야말로 스승이 필요한 때지. 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드를 보았다.
나는 마법사다. 그런데 기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있다.
사실 엘시아는 비전서 중 몇 개를 없애지 않고 따로 보관해 두었다. 마나 뱅크를 해킹하고 힘을 얻은 후 궁극 마법의 영구 현혹 마법으로 뛰어난 기사를 손에 넣은 후 키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걸 뿌우가 탐색을 하다가 찾아냈고 난 그것을 가짜와 바꿔치기 했다. 진짜는 지금 내 무한의 주머니 속에 보관해 놓았다는 거다.
거기에 난 크리드 경의 육체 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안다.
젊어지기 위한 노력, 늙지 않기 위한 연구를 세상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한 사람을 없을 거다.
만나지 않았다면 몰라도 만난 이상 손에 넣지 않을 수는 없지.
크리드 경, 자네는 이미 내 꺼야. 암.
일단 육체 노화부터 해결해 주겠어. 도망 못 가게 확실하게 묶으려면 이쪽부터 손을 써야 하거든.
“육체의 강화만 논한다면 그렇죠. 하지만 기사의 수련이라는 게 꼭 외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조금만 더 시야를 넓게 가지면 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많고요.”
“호, 마법으로 노화를 막을 수 있나?”
“마법도 가능하지만 그쪽 방면에서 최고는 역시 정령이죠.”
“정령?”
“예, 마법은 수십 년에 걸쳐 마나를 쌓고 술식을 연습한 후, 독자적인 깨달음을 얻어야 하지만 정령은 일단 계약하면 알아서 힘이 작용하거든요. 저도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허,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정령을 부린다고 했지. 그래서 모든 마법사들의 주목을 받는다고 들었네.”
내 소문을 제대로 듣긴 들었군. 그럼 약발이 제대로 먹히겠네.
나는 목소리를 살짝 줄여서 크리드 경에게 말했다.
“예, 정령공유라는 수법으로 바람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니 마나와 전혀 관계가 없더란 말이죠.”
“마나와 관계가 없다고?”
“그럼요. 마법사가 아니라도 계약이 됩니다. 제가 보기에 크리드 경도 될 걸요?”
“그게 정말인가?”
눈이 불타고 있다. 이 사람 제대로 낚였구먼.
월척일세.
“마나 주입이 가능하면 될 겁니다. 정령은 그쪽 마나를 써서 유지하니까요. 마법으로 가공된 마나는 오히려 쓸모가 없어요.”
“그쪽 마나라니? 잘 이해를 못 하겠군.”
“마법사의 재능이 타고나는 것처럼 정령친화력도 타고 나는 거 아시죠? 다행히도 저는 그걸 타고 났는데, 정령친화력이라는 게 기사가 수련해서 쌓은 내면의 마나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그게 정말인가?”
“예,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크리드 경의 경지에 오른 기사라면 누구나 정령과 계약할 수 있어요. 단지 계약방식이 마법진으로 이루어지는 거라서 그때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죠.”
나는 아주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크리드 경이 바보가 아닌데 내가 말하는 뜻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현재 이 바닥에서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딱 세 명, 그 중 두 명이 우리 데빌 베인에 있으니까.
아론 체프코트 경한테 가면 어떻게 하냐고? 안 갈걸.
크리드 경은 이미 그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어. 만약 아론 경이 이런 이야기를 크리드 경에게 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안 한 거야. 아니면 모르거나.
아마 모를걸? 그 양반이 마법만 팠지 기사에 대해 무슨 연구를 했겠어.
할 말을 한 나는 조용히 기다렸고, 크리드 경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나한테 물었다.
“정령과 계약하면 정말 육체 노화를 막을 수 있나?”
“기본적으로는 그래요. 그래서 8서클 마도사들은 수명이 늘어난다고 배웠어요. 100살을 넘게 사는 마법사는 다 8서클 이상이라고요. 거기다가 아론 경이나 이반 경만 해도 봐요. 이미 나이가 꽤 있는데도 왕성하게 활동하잖아요.”
“그렇지. 그건 확실히 그래.”
99% 넘어왔군. 그럼 이제 120%를 찍어보자.
“제가 가진 검법서 중 마검사로 유명했던 길레인 경의 스트리밍 에찌라는 게 있는데, 거길 보면 길레인 경도 소문대로 마검사가 아니라 정령과 계약한 검사라고 쓰여 있더군요. 정령과 계약해서 정령력과 마나 주입법을 융합해서 마법과도 같은 힘을 쓸 수 있었다고 하네요.”
“네가 스트리밍 에찌 검법서를 가지고 있다고?”
‘네가’라니, 언제 봤다고 ‘네가’야? 나 귀족이거든. 나이와 상관없이 이름에 ‘경’까지 붙여서 불러야 하거든.
나는 살짝 삐졌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넘어가기로 했다.
“전 원래 용병출신인 양부로부터 창술을 배우며 자랐거든요. 그러다가 재능이 발견 되서 스승님을 만나게 된 거죠. 지금도 전 마법에만 의지하지 않고 일종의 마검사처럼 싸우는 데 익숙해요. 그래서 검법서도 구하게 된 거고요. 운이 좋았죠.”
“운이라고 하기에는 스트리밍 에찌의 이름이 너무 높구나. 하지만 과연 너처럼 마검사를 희망하는 자라면 길레인 경이 하나의 이상형이겠지.”
“그래요. 그런데 막상 구해서 보니 길레인 경은 마법을 모르는 순수한 검사였다는 거지요. 저에게는 참고는 되지만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어요. 마나주입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요.”
꿀꺽
이 양반이. 침을 다 삼키네. 자각을 못 한 거 같지만 심하게 갈증이 나나보지?
눈빛 보소. 내 근래에 저 정도 탐욕에 불타는 눈빛은 전 황제 빼고는 못 봤는데 말이야.
이럴 때는 뺄 거 없다. 나는 조용히 무한의 주머니 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폈다.
“계약하실래요? 데빌 베인 가입선데, 여기 서명하면 평생회원이 되는 거예요. 핵심멤버는 중도 탈회도 안 되고요.”
“데빌 베인…평생회원…중도 탈회 불가….”
크리드 경은 움찔했다. 그러나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서명하시면 정령계약 주선해 드리고, 스트리밍 에찌 검법서를 넘겨 드리죠.”
“여기다 사인하면 되는 건가?”
역시 결단이 빠르네.
크리드 경은 내가 내민 핵심멤버 가입서, 그러니까 평생 노예 계약서에 서슴없이 사인을 했다.
이미 내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는지 우연히 만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확실한 것을 제시했고, 그는 받았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크리드 경은 우리의 숙소로 찾아왔고 이반 경을 만나 정식으로 가입의 의식을 치뤘다.
“정령 계약은 이곳에서 하기 힘드니 우리와 같이 돌아가세. 내가 보기에 자네는 아직 단독으로 정령을 소환할 힘은 없는 듯 하니 일단은 내 정령을 공유 해 주겠네.”
이반 경이 직접 약속을 하자 크리드 경은 안심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반 경은 이번에 물의 정령과 계약을 하는데 성공해서 정식으로 멀티 정령 유저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전에 조언한 대로 대지의 정령만 쓰고 물의 정령은 복합마법진을 쓸 때 기운만 빌리는 식으로 사용했는데, 이번에 크리드 경에게 물의 정령을 공유해 주기로 했다.
가입이 끝나자 나는 크리드 경을 데리고 뒤뜰로 향했다.
“크리드 경은 우리 데빌 베인의 모든 기사들을 지휘하셔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기사단장의 검을 준비했어요.”
“이것은 마법의 검인가?”
“예, 속박의 검이라고 공간 이동 계열 마법을 모두 봉쇄하는 효과가 있어요. 검 자체도 상당한 보검이라 바위도 자를 수 있고요.”
“바위는 마나주입법으로 얼마든지 자를 수 있지만 이런 보검이라면 확실히 대단하군.”
휘익
크리드 경은 내가 준 속박의 검이 마음에 드는 듯 허공에 대고 몇 번 휘둘렀다. 그러자 묘하게 검날의 굵기가 살짝 얇아지며 검면에 새겨진 무늬가 변했다.
“으응? 이거 조금 더 가벼워졌군.”
“크리드 경의 힘에 맞추는 거 같은데요. 원래 특급 무구는 주인에게 최적화 되는 기능이 있거든요.”
“오! 그런 보물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내가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대장군 지휘를 맡으며 마법사랑 싸웠다면서요. 당연히 있어도 안 주겠죠. 없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속박의 검은 덴판 제국의 황제가 죽었을 때 우리가 조사 명목으로 빼돌린 보물 중 가장 뛰어난 부류에 속한다. 보기보다는 훨씬 강력한 무구로 그야말로 특급에 해당하는 아티팩트인 것이다.
이게 만약 검이 아니라 마법사의 지팡이였다면 아론 경이 우리에게 넘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이었기에 자기가 쓸 수 없는 물건이라 과감히 넘겼다.
남에게 주기는 아까운 물건이지만 무기는 주인을 만나야 비로소 제값을 하니까.
우우우웅
검이 운다. 얘가 정말 특급 값을 하네. 마음에 드는 주인을 만나서 기뻐하는군.
크리드 경도 그걸 느끼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령이나 검법서가 아니라 이 검만 봤어도 나는 데빌 베인에 가입했을 것 같네.”
“마족의 계약자는 거의 8서클 마도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한 것으로 여겨져요. 크리드 경은 그들과 싸워야 하니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할 거에요.”
“싸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싸워주겠다.”
각오가 깃든 말이다. 확실히 강적을 만나도 물러서지 않을 기백이 보인다.
이게 중요하다. 사실 내가 엘시아를 상대하기로 마음먹고 제일 우려하는 게 바로 마법사들로는 엘시아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반 경의 경우를 봐도 알듯이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엘시아의 이름만 듣고도 평소에 가진 힘의 절반도 제대로 못 쓸 가능성이 크다.
포위망을 짜도 예상보다 더 위축이 되면 구멍이 뚫릴 수 있다.
결국 엘시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위명에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이 필요하고, 기사의 정점에 있는 크리드 경이라면 딱 적임자라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스트리밍 에찌를 꺼내 크리드 경에게 건넸다.
“이게 검법서에요. 이제 크리드 경의 것입니다.”
“흐, 전설에 나오는 최강의 검법서를 보게 되다니.”
“저도 내용은 봤는데,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좀 많더라고요. 그러니 나중에 저에게도 가르침을 주세요.”
“그렇게 하지. 렌 경은 창을 쓴다고 했지?”
“예, 바로 이 지팡이가 창입니다.”
촹
내가 보석으로 된 단추를 비틀듯 누르자 스태프로부터 창날이 튀어나왔다. 파지직 하고 뇌전의 기운이 흐르는 창날은 약간 파란색을 띄고 있는 게 그 사이 더욱 날카로워진 듯 했다. 뿌우 녀석이 심심하면 창날을 다듬었나 보다.
“그것 역시 마법 무구로군. 대단하네.”
“정령의 집이거든요. 크리드 경도 정령을 얻게 되면 집을 만드셔야 하는데, 속박의 검이라면 충분히 집이 될 수 있어요.”
“그렇군. 정령에게 집이 필요하다는 것은 지금 처음 알았네.”
“집이 없으면 일일이 정령계에서 소환을 해야 하는데 귀찮거든요. 경은 아예 소환마법을 모르니까 더 그렇고요.”
“맞네. 그런데 자네 창술은 어느 정도인가?”
“혼자 연습해서 잘 모르겠네요. 한 번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가능하면 마법도 같이 쓰면서 해보게.”
아하, 무슨 생각인가 했더니 마검사와 싸워보고 싶었던 거군.
크리드 경은 정말로 강함을 추구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연회에 갈 시간이 되기 전까지 크리드 경과 대전을 했고,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 얻어맞았다.
처음에는 살살 해주는 듯하더니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된다고 판단하자마자 반쯤 실전처럼 공격을 하는 것이다.
지독한 인간, 모의대전인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에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 마법이든 무술이든 제대로 배워야 실력이 느는 것 같다.
당분간 크리드 경을 붙잡고 창술이나 더 연습해야지.
나는 속으로 결심을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연회에 참석했다. 엘시아가 명한 대관식 바로 전날의 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