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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71화 (71/250)

로엔의 마나뱅크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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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째 연회는 조금 더 즐거웠다. 첫날 대부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기에 이제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세리아 공주는 오늘도 내궁의 의식에 참가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대충 들은 의식의 내용은 다른 황족들이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위의 안정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맹세를 하고, 황태자 또한 황족들을 경쟁자가 아닌 가족으로 아끼고 보살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황족들이 신분을 이용해 재물을 탐하거나 다른 귀족들에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삼가 하는 등 민폐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하는 시간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을 벌인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다는 맹세도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마법적인 의식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깨면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한다. 덴판 제국이 왕국이었을 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의식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전생에는 덴판 제국이 아직 왕궁이었지. 강력한 군사 국가였지만 주변에도 강국이 많아 성장에 한계가 있어 보였는데, 전 황제가 마족의 계약자가 되면서 주변 왕국들을 하나씩 병탄해 제국으로 성장시킨 모양이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마족과의 관계도 사라지고 명실공이 세계 최강국으로써 권위와 국력만 남았으니 당분간은 덴판 제국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어찌되었든 우리와의 관계도 돈독하고 말이야.

아무튼 지금 연회 분위기는 좋다.

어제보다 젊은 남녀의 출석률이 훨씬 좋아서 댄스를 보다보면 눈이 즐겁다.

이반 경은 아론 경과 함께 앉아서 담화를 나누고 있고, 가끔씩 어제 인사를 못 한 사람들이 오면 무뚝뚝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줄 뿐이다.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좋을 텐데, 그런 사교성은 기대하기 힘든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늘은 내 몸에 소울 섀이드 마법을 걸어서 인위적으로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도록 만들었다.

소울 섀이드는 영혼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척을 거의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각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정말 열심히 찾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는 마법인데, 유명한 사람들이 타인들의 이목을 피해 뭔가를 할 때 유효하다.

나는 관찰자 입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실력자와 권력자들을 보았다.

모두 열심히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위해 사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연회인데도 즐기는 사람은 젊은 몇몇 청춘남녀들 뿐. 나이가 든 사람들은 연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어! 저자는 조금 다르네.”

특이한 사람을 발견했다. 나이는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반백의 남자인데, 그자는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생각도 안 하고 혼자 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쌓여있는 음식 테이블에서 열심히 맛있어 보이는 것들만 집어먹고 있었는데, 품위 있는 동작 덕분에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거의 삼일은 굶은 사람처럼 화끈하게 먹고 있었다.

“재밌는 사람이네.”

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미식가는 많아도 이 분위기에 식탐을 발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저 남자는 먹기 위해 연회에 참석한 것 같았다.

“황족인가? 아니지 황족은 다 의식에 참가했을 테니 손님이라고 봐야 되는데…….”

권력에서 밀린 황족 떨거지면 저럴 수도 있지만 초대손님은 현재 대륙의 실세인 만큼 확실히 이상한 행동을 하는 중이다.

나는 관심이 생겨서 천천히 그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는 옆에 자리를 잡고 같이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연회 참가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아침을 조금 부실하게 먹었다. 그리고 몇 개 먹어보니 과연 제국의 황실 연회답게 음식들이 최고 중 최고라 할만 했다.

처음에 그 남자는 내가 바로 옆에서 먹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나한테 걸린 소울 섀이드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같은 음식을 집으려 했고, 손이 닿았다.

한번 접촉한 상대에게는 소울 섀이드의 효과가 반감된다. 그 남자는 그때서야 나를 인식하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아스타 산 연어와 철갑상어알의 요리지. 자네도 좋아하나?”

“해산물쪽은 다 좋아합니다. 물론 육류와 채소류도 맛있는 것은 좋아하지만요.”

“하하하, 맞아. 사람은 자고로 편식하면 안 되지.”

그 이후 우리는 음식에 대한 품평을 하며 같이 식사를 계속했다. 나는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아직 충분히 많이 먹을 수 있지만 이 남자는 내가 관찰하는 동안에도 3, 4인분은 먹었는데 지금도 전혀 먹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뚱뚱하거나 배가 나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신이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기사인가? 기사라면 확실히 10인분 정도는 먹는 사람이 있다. 극한 체력소모로 인해 범인과는 차원이 다른 음식 섭취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와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고 있었다. 고기를 쌓아놓고 마구 입안에 몰아넣는 일반 기사와는 또 달랐다.

잠시 후, 우리는 식사를 대충 끝내고 칵테일을 한잔씩 들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3인분 정도 먹고, 이 남자는 10인분 정도 먹은 것 같다.

식사를 하는 사이 우리는 먹는 것으로 통했고, 상대는 내가 음식에 대해 품평하는 것을 듣고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군. 난 자네가 제국의 후작 자제라 해도 믿겠네.”

황족이나 공작의 자제까지는 대충 다 안다는 소리군.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평민 출신 마법사입니다. 렌 브로스마이어라고 하지요.”

“오, 요즘 핫한 데빌 베인의 그 렌 경인가. 미처 몰라봐서 미안하네.”

“별 말씀을 하십니다. 저야말로 솔직히 경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있으니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하, 이런 이런, 내 소개도 안 했군. 나는 크리드라고 한다네. 철명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마스터 크리드!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웨폰마스터 크리드 경이구나. 마법사가 아닌 사람 중에 가장 강하다는 대륙 최강 기사.

전장에서의 지휘도 뛰어나 한때 소리암 왕국에서 대장군의 직위까지 하사하고 전쟁의 총지휘를 맡겼다고 들었다.

그러나 정작 크리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바로 대장군직을 사퇴하고 원래 소속되었던 철명기사단에 복귀했는데, 놀랍게도 단장도 아닌 그냥 평기사로 남았다고 한다.

작위 수여도 거부하고 그냥 기사 신분으로 있으면서 일 년 중 거의 태반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한다는 기인.

10대마도가문에서 가디언 나이트의 제의도 많이 들어갔지만 전부 거절하고 오로지 홀로 수련을 한다는 고집쟁이이기도 하다.

마법은 없어도 워낙 무력이 뛰어나 6서클 마도사와 일대일로 붙어 이긴 적이 있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기사로써는 극한에 달한 자라고 할 만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가 마법사를 싫어한다는 거지.’

지금 대륙은 마도시대다. 마법적 재능이 있는 사람은 10살 때 마탑에 들어가 마법사의 길을 걷는데,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귀족 취급을 받는다.

반면 검의 길을 걷는 기사는 아무리 강해져도 마법사보다 아래로 취급된다. 실제로 크리드 경이라고 해도 7서클 마도사에게는 이길 수 없다.

거기다가 군대를 이끄는 것도 기사보다는 오히려 워메이지가 더 적합하다는 평가도 있다. 왜냐하면 마법사는 머리가 좋고 냉정하니까 병법을 공부해서 활용하는 방법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기사라는 존재는 두 가지의 길만 남았다. 근위병으로써의 길. 그리고 마법사의 호위 기사격인 가드 나이트의 길.

만약 크리드 경이 가드 나이트가 된다면 아론 체프코트 경이 자신의 가드로 임명할 가능성이 크다. 뛰어난 기사에 각종 강화 마법을 걸면 엄청난 전력이 되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기사가 최고의 직위는 되지 못하는 게 현재의 세상이다.

더군다나 크리드 경은 대장군으로 군대를 지휘할 때 마법사들에게 적지 않은 굴욕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도 타고난 재능만으로 마법사가 된 후 별 노력도 안 해서 하급 마법사에 머문 자들. 그들은 크리드 경이 실력과 노력으로 자신들보다 고위의 직위를 차지하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일부러 태업을 하며 군의 기강을 흐트러뜨렸다는 것이다.

크리드 경은 당연히 군법으로 이들을 벌하려 했지만 결국 마탑의 간섭에 의해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오히려 굴욕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전쟁 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협조는 미약했고, 결국 승리로 이끌기는 했어도 예상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마법사들의 권위주의와 신분적 차별행위에 자신의 수하들이 희생된 셈이다.

그래서 크리드 경은 그 뒤에 출세를 포기했다. 그저 수련을 통해 마법사들보다 더욱 강한 힘을 얻기를 원했지만 이미 마음도 꺾이고 한계에 부딪쳐 있는 듯하다.

“마스터라, 허허, 허명일세.”

“허명이라니요. 마나를 움직여 무기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스터의 경지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마법사가 걸어주는 파워 스트라이킹만 해도 비슷한 효과는 있지 않은가?”

이 사람이 아주 좌절을 했구먼. 이봐요. 파워 스트라이킹 하고 마나 주입은 수준이 달라도 한 참 다르거든요.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참고 말했다.

“파워 스트라이킹이 기사를 보조하기에 꽤 좋은 마법인 것은 맞지요. 하지만 마나 주입과는 다른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걸린다는 거죠. 파워 스트라이킹만 건 기사와 둘 다 건 기사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흥, 자넨 역시 마법사답게 생각하는구만. 난 기사라 파워 스트라이킹 없이 싸우는 것만 생각한다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마나 주입은 일종의 현상일 뿐, 그게 뜻하는 것은 크리드 경의 실력이 극한에 도달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현 대륙에서 크리드 경뿐인 것으로 압니다.”

“글쎄, 경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난 고위 마법사보다 강해질 수는 없었지. 그리고 이미 육체의 한계에 달해 더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네.”

살짝 공허한 눈빛이다. 아무리 수련을 해도 나이가 들면 육체의 힘은 떨어지게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반면에 마법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강해지는 경향이 있고.

자, 이쯤에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고, 그냥 길 가다가 금덩어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 것과 같은 상황이다.

마법사에게 실망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좌절한 최강의 기사가 있다. 대충 눈빛을 보면 왕국에 대한 충성심도 옅어 보이고 야망이나 출세욕조차 없다.

그저 이 크리드라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검으로 강해지는 것.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지만 한계를 넘어 어떤 마법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내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마도시대가 시작된 이후 엘시아가 한 일 중 하나가 기사의 내면을 개발할 수 있는 비법서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은 후 없앤 것이다.

마나뱅크의 마나를 독점한 시점에서 마법사들은 과거처럼 몸속에 마나를 쌓아 마법을 시전하는 시대가 된다면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마법 시전을 거의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고급 마법은 마법시전 시 거의 기절할 정도로 체력소모가 심한데, 마나뱅크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자들은 그걸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대륙은 별 힘도 못 쓰고 엘시아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변수가 있다면 바로 기사의 힘이다.

크리드 경처럼 마나주입이 되는 기사는 마법사에게 있어 상당한 위협이 된다. 이런 자들이 많이 있다면 아무리 엘시아라고 해도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엘시아는 혼자 전 대륙의 기사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시아는 기사들의 힘을 착실하게 약화시켰다. 정령에 대한 지식을 지운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마법사의 전성시대이고, 그 중 최강인 엘시아가 마음먹고 꾸준히 한 일이다. 뛰어난 기사들을 몰래 제거하고, 비법서를 모두 회수해서 아예 없애버렸다. 배신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자기네 가문에 속한 기사들에게도 마나 주입이 가능한 검법의 비전을 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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