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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69화 (69/250)

로엔의 마나뱅크 69화

*

전 황제가 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과거는 묻힌 듯 황도 전체가 더욱 화려하게 바뀌었다.

“하긴, 궁이 무너질 정도로 보물이 쌓였으니 재정이 빵빵하겠지.”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황제의 후계자였던 황태자는 대권도 잡고 재물도 얻었으니 기분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 데빌 베인이 살짝 바람을 넣었다.

사실 그쪽도 바보는 아니고,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마법사인 아론 체프코트 경이 궁중 마법사로 있는 곳이다.

조사를 해 보면 황제가 마족의 계약자라는 사실 정도는 나오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이 사실을 발표할 수 없다. 오히려 누군가 의혹을 보이기만 해도 국운을 걸고 그자를 철저하게 제거했을 것이다.

그런 덴판 제국측과 아론 체프코트 경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데빌 베인이다.

공식적으로 인증 받은 마족의 계약자를 추적하는 집단.

우리가 진실을 밝히면 그건 덮어버리기가 상당히 어렵다.

힘으로 누르기도 뭐 한 게 이반 경도 있고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미스틱 액스라는 존재도 있기 때문에 제거하려고 해도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우리 데빌 베인이 정말 순수한, 그러니까 기존의 이권이나 세력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마족을 척결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반 경만해도 마음만 먹으면 명성과 재물을 마음먹은 대로 얻을 수 있는 사람인데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속에서 목숨을 걸고 마족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제거하기도 회유하기도 애매한 집단.

그러면서 정말 중요한 정보를 쥐고 발표할지 모르는 상황.

아마 덴판 제국측에서는 우리에 대한 처리방안을 놓고 며칠 밤잠도 못 자면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먼저 조사 결과를 발표해 버렸다.

-마족의 계약자들이 대륙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황제를 암살했다!-

이걸로 끝났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덴판 제국에서 고민하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처리된 셈이다.

그들도 멍청한 사람들이 아닌데 우리가 진실을 모르고 그런 발표를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알고 보니 우리가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친하게 진할만한 집단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닫고 황녀를 통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우리가 꼭 흉수를 찾아내겠다고 다시 선언하니 그야말로 뭐든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식으로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가능한 한 숨기려고 했었던 황궁 내부에 대한 탐색도 허락을 했고, 우리는 나름 철저한 탐색을 해서 다른 마족의 계약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 그들에게는 암살범의 동조자가 황궁 내에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사실 조사 과정에서 몇몇 아티팩트들은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들은 그걸 모두 우리에게 기증했다. 단서가 되면 좋고, 안 되도 가지라고 했다.

그래봐야 산더미 같은 재물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당연히 줄 수밖에 없지.

그렇게 난 황제가 평생에 걸쳐 모은 재물들 중 가장 좋은 것 몇 개를 손에 넣었다. 사람이 수고를 했으니 이 정도 대가는 있어야 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덴판 제국은 위기를 넘겼고, 진실은 어둠속에 묻혔다.

우리는 제국의 가장 친밀한 집단이 되었고, 대륙의 모든 세력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분위기다.

이번 즉위식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외궁의 귀빈숙소 하나를 통째로 배당받았다. 그러니까 10대마도가문과 똑같은 대우다.

그리고 세리아 공주가 직접 찾아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아 참, 세리아 공주는 아직 정식으로 나와 약혼을 하지 않았다. 데빌 베인에 참가했다는 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조사의 공정성과 발표의 투명성을 위해 당분간은 덴판 제국과 어떤 직접적인 연계도 가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상황이 민감한 만큼 작은 구설수도 조심해야 한다. 제국이 진실을 감추기 위해 황녀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황제가 암살됐는데 황족의 혼담이 그대로 진행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황태자와 몇 번에 걸쳐 밀담을 나눈 결과, 황제를 암살한 흉수를 찾아내면 그때 정식으로 세리아 공주와의 혼담을 추진하기로 했다.

세리아 공주는 정식으로 후작부인의 작위를 받고 엄청난 영지를 하사받았다. 보물류도 창고 하나를 채울 정도로 나누어 받았다고 한다.

이게 다 나중에 우리에게 주려고 미리 챙겨 둔 재물이다. 역시 제국의 황제답게 입막음에 대한 대가는 확실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배포 있는 남자를 좋아하니 당분간 덴판 제국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정말 세리아 공주와 혼약을 해야 이러한 재물들을 챙길 수 있다는 점인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 중이다.

어쨌든 이렇게 되서 나는 아직 자유로운 신분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한 가지 사건을 벌여 여러 가지 결과를 동시에 내는 계획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작전을 고안해서 실행하는 중이다.

*

바쁘다면 바쁜 황궁에서의 첫 하루가 끝났다. 인사만 수백 명 했는데,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첫날부터 만나야 했다. 내일부터 또 일주일 정도는 계속 인사를 해야 한다.

중요한 순으로, 빠지지 않고 모두 만나야 하는 게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어휴, 이렇게 살다보면 마나수련이 그리워지겠군.”

나는 기운이 빠져 침대에 몸을 누이며 중얼거렸다. 혼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며 마나수련을 하는 것은 마법사의 의무이지만, 이런 생활 속에서는 일종의 합법적 도피처가 될 수도 있다.

전생에는 이정도로 열심히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충분히 할 거 다 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신참자 취급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잠이 온다. 피곤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문가에 버티고 서 있는 마리포즈에게 말했다.

“원견의 수정구 좀 줘봐.”

“여기 있습니다.”

마리는 내가 맡겨놓은 무한의 주머니로부터 사람 머리통만한 수정 구슬을 하나 꺼내 나한테 넘겼다.

그것은 덴판 제국의 황궁에서 우리에게 넘긴 아티팩트 중 하나로 멀리 있는 곳을 보여주는 성능이 있는데, 단지 거리가 무한에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살짝 개조했는데, 바로 위치고정을 통해 프리스톤 가문의 내부 곳곳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물론 경계마법은 전혀 발동하지 않는다.

또한 프리스톤 마탑의 요소요소에는 비트라는 이름의 작은 보석이 심어져 있는데, 이것들은 내가 보지 않아도 하루 종일 주변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원견의 수정구로 비트에 담겨져 있는 영상을 받아 빠르게 돌려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완벽 감시체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원견의 수정구를 발동시켜 비트의 영상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가장 처음으로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바로 엘시아의 방이다.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를 정확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현 가주인 말리온 프리스톤의 집무실을 비롯해 그쪽 가문의 일을 알만한 곳은 모두 장치해 놓았다.

“드디어 명령을 내리는 건가.”

나는 말리온 경이 엘시아에게 보고를 하고 명령을 받는 부분에서 정상 속도로 영상을 돌리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

“즉위식 전날 말입니까?”

“그렇다. 모든 사람이 아론 체프코트의 죽음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자가 죽기 전에 하는 말을 들어야 우리에게 유리해 지는 것이다.”

“정말 이 단검에 찔리면 아론 경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말하게 되는 겁니까?”

“그건 염려마라.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완벽하게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틀림없다.”

엘시아는 말리온 경에게 하나의 단검을 꺼내 건냈다.

그것을 본 나는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리며 전생의 기억이 격하게 되살아났다.

발데스 스팅, 로엔을 죽인 마족의 무구이다.

은은히 검은 색의 빛을 흘리며 빛나는 발데스 스팅을 보니 그날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격한 고통에 잠기지만 곧 심장이 정지하며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육체의 자유는 거의 사라지고 마법도 쓸 수 없게 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듯 한 느낌. 오히려 고통을 느낄 때보다 더 기분이 나쁘다.

결계의 로브를 뚫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

이번에는 로브에 구멍이 뚫려 있으니 굳이 발데스 스팅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겠지만 엘시아의 말을 들어보니 그동안 그녀는 이 무서운 무기의 성능을 개조한 모양이다.

“원래 이 무기는 모든 결계를 파괴하는 효능과 함께 사람의 몸속에 박히면 즉시 그자의 육체를 마비시키고 마나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순식간에 언데드와 비슷한 상태로 만드는 거지. 하지만 나는 아론 경을 필요할 때에 이용하기 위해 그동안 결계 파괴의 힘을 제거하고 대신 신체 조종의 마법을 걸어 놓았지.”

“그렇다면!”

“그래, 언데드처럼 굳어버린 몸을 단검이 조종하게 된다. 내가 미리 명령어를 입력시켜 놓은 대로 말해고 행동하게 되겠지. 본인이 죽기 전에 하는 말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호호호호.”

“과연, 그렇게 되면 체프코트 가문은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겠군요.”

“그래, 덴판 제국의 황제를 암살을 꾸민 게 바로 체프코트 가문이 되는 셈이고, 우리는 그 희생양으로 지목되었을 뿐이니 당당하게 체프코트 가문의 이권을 공격하여 가로챌 명분이 생긴다.”

“이미 전쟁 준비는 끝냈습니다.”

“전쟁이라 할 것도 없다. 비어있는 영역에 들어가 자리를 굳히는 작업이니 최대한 빠르게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예.”

그렇군. 역시 엘시아답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획을 세웠네.

마족의 무구에 담긴 힘을 바꾸어 버릴 수 있다니 과연 내 제자 자격이 있다. 결계를 뚫는 힘은 이미 필요가 없으니 힘의 원천만 이용하고 내용은 바꾼 것이다.

내가 들어봐도 엘시아의 계획은 좋다.

그녀는 체프코트 가문이 죽기 전에 흉수를 우리 데빌 베인이라고 선언하도록 하는 흉계를 꾸몄다.

바로 체프코트 가문이 마족의 계약자였고 그것을 눈치 챈 덴판 제국의 황제를 암살했는데, 데빌 베인이 그걸 눈치 채자 뒤로 손을 잡고 진실을 조작하려 했지만 결국 일이 틀어졌다는 시나리오를 썼다.

그야말로 라이벌을 제거하고 자신의 혐의는 벗어버리는 일석이조의 흉계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말리온 경이 단검을 받아들며 저토록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 것만 봐도 알만 하다.

“그런데 미안. 네 뜻대로 해줄 수는 없어.”

나는 미리 엘시아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한 마음은 없지만 그냥 그녀가 알든 모르든 말만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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