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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68화 (68/250)

로엔의 마나뱅크 68화

*

밤이 되었다.

우리는 덴판 제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오늘은 도시로 들어와 모처럼 좋은 숙소를 구했다.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 그런지 시설도 완벽하고 침대도 좋아 보였다.

나는 뿌우와 마리에게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경계를 하라고 말하고는 침대를 옮긴 후 밑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침대 밑이냐고?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 중에 깨어있지 않은 상태로 시전 하는 마법이 딱 하나 있다.

잠을 자야 발동하는 마법. 바로 꿈 침투다.

6서클에 속하지만 주문시전은 안 되고 무조건 마법진으로만 발동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7서클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는 비전 중에 비전 마법이다.

생각해보면 이걸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미리아가 정말 대단한 거다. 마족의 계약자라 할 만 하다.

“다 됐군.”

내 마법진은 언제 봐도 완벽하다.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나의 작품을 잠시 감상한 후 침대를 마법진 위로 옮기고 그 위에 누웠다.

아래쪽으로부터 마나의 기운이 스믈스믈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등과 뒷목이 따뜻하니 잠도 잘 온다.

마법진에 새겨진 대상은 바로 엘시아. 그녀의 진명을 새겨 넣었기 때문에 안티 디텍션이나 마인드 블록으로도 방비가 안 된다.

백년도 넘는 시간의 강을 지나 드디어 다시 만나는구나. 엘시아.

비록 현실이 아닌 꿈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법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정말 꿈에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비록 가슴이 두근거려도 마법진의 영향인지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엘시아의 심층의식공간이다. 남의 꿈속에 무단으로 침투를 해서 그런지 몸이 좀 찌뿌듯했다.

“그게 아니군. 내 모습이 변했군.”

놀랍게도 나는 전생의 모습, 그러니까 로엔 프로시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죽기 바로 전의 모습이다.

결계의 로브를 입고, 침묵하는 모자까지 썼다. 물론 이것들은 그냥 형태일 뿐 원래의 능력을 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까지는 똑같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모습이 바뀌었다니. 나는 엘시아 앞에서는 렌이 아니라 로엔이었구나.

의식적으로 전생의 기억을 제외하고 습관이나 관점을 지우고 현생의 렌이라는 자아에 적응을 하려 했지만 여성에 관한 시점만큼은 과거의 영향을 받았었다.

비슷한 나이의 여성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 느껴진 데에는 로엔의 감각이 강렬하게 침투해 있기 때문인데 지금 그 이유를 알았다.

“그래, 떨쳐 버리지 못하는 과거도 있는 법이지.”

원인을 알았으니 저항하기 보다는 순응하기로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원래는 인위적으로라도 로엔의 모습으로 엘시아를 만나려 했는데 자동으로 변했으니 마력의 소모가 준 셈이다.

“그럼 가 볼까.”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저 멀리서 보이는 작은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빛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커졌다.

그곳은 하나의 작은 연구실이었다. 사방에 입체 마법진이 쳐져 있고, 엘시아는 두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주문을 시전하고 있었다.

탐색과 분석에 관한 주문이다. 놀랍게도 엘시아는 꿈속에서도 마나뱅크의 코드를 해석하고 있었다. 놀라운 집념이다. 그야말로 일심으로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하고 있구나.

“여기야. 여기가 안 풀려. 앞으로 몇 년 걸릴까? 오래 걸리지는 않아. 암.”

나는 잠시 엘시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걸음을 옮겨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엘시아는 내가 나타났음을 감지하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엘시아야. 여전히 아름답구나.”

나의 눈에 비친 엘시아는 나를 암살하던 날의 그녀의 모습이었다.

젊음을 소유하고 있는 가장 빛나던 때의 엘시아.

그녀의 의식은 그날의 외모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인가. 언젠가는 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의상도 그날 그대로였다. 현실에서 입고 있는 로브는 더 좋은 것이었는데 꿈속에서는 바꾸지 않은 것이다.

단지 하나 바뀐 게 있다면 머리에 쓰고 있는 침묵하는 모자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이 모자는 쓰고 있었다. 결계의 로브와 함께 내 물건 중 가장 뛰어난 아티팩트인데 이미 엘시아와 동화한 모양이다.

“그렇군요. 이것은 꿈이네요.”

엘시아는 곧 의식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꿈 침투 마법이라는 것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진짜 꿈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이렇게 스승님이 나타난 것을 보면 제가 정말 코드를 풀 날이 가까워졌나 봐요. 호호호.”

“너는 마음먹은 것은 꼭 이루는 아이니까. 하지만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구나.”

“모든 것을 걸었어요. 그리고 이제 곧 그것들을 다시 다 찾을 수 있지요.”

“그래, 마나뱅크의 마나라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구나.”

“흥, 기껏 꿈에 나타나서 훈계를 하는 건가요? 정말 웃기는군요.”

“앞만 보지 말고 주변을 살펴라. 정령이 너를 보고 갔는데 넌 코드만 보고 있구나.”

“정령이 날 보고 갔다고요!”

앞만 보지 말고 주변을 살피라는 말은 내가 틈만 나면 엘시아에게 해준 말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대마법사인 나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목표치가 너무 높았다.

그래서 엘시아는 자신이 이루려는 것에 집중을 하면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는 습관이 생겼다. 최소한의 여유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몇 번 문제가 생길 뻔 한 것을 내가 수습해 준 적이 있는데, 엘시아는 스스로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성격 문제 인듯 이 부분의 실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엘시아가 실수를 할 때마다 수습을 해주며 하던 말.

엘시아는 이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랐다. 이 말이 나왔다면 이미 그녀는 실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령이라면…그렇군요. 얼마 전 이반 헬비스트 경이 방문했었는데, 그자가 정령을 이용했을 거예요.”

“…….”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나의 방비는 완벽한데.”

“너는 대마법사가 아니다.”

“하아, 그래요. 아직 아니지요. 스승님 말씀대로 대마법사가 아니면 완벽한 방비는 불가능해요.”

“그래, 나는 네가 언젠가 대마법사가 될 거라 믿었었다.”

“염려 마세요. 전 그 이상이 될 거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할 일은 끝났다. 이 이상 있다가 그녀가 꿈 침투라는 것을 인식해 버리면 곤란하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엘시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만난 후 내가 그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새삼 느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엘시아에게 독을 심었다. 그녀를 파멸로 이끌기 위한 작업을 했다.

어둠 속을 걸어 꿈의 경계선까지 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고 묵묵히 경계선을 넘었다.

*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았다.

“으으, 힘들군.”

내 평생 수많은 꿈을 꿨지만 오늘의 꿈이야말로 최악의 악몽이라 단언할 수 있다. 전신이 아파오는 게 내가 꿈 침투를 당한 것처럼 힘들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어느 정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는 서서히 로엔에서 렌으로 돌아왔다. 잠이 깼다는 의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군. 곧 그녀가 손을 쓸 거야.”

원래 프리스톤 가문에서 뿌우가 돌아다닌 것은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다. 엘시아의 진명을 이용해 모든 방비를 무시하고 다녔기에 조사를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을 계획하고 프리스톤 가문의 마탑에 몇 가지 장치를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뿌우를 통해 일부러 흔적을 남긴 부분이다.

그것은 바로 대지와 불의 정령력을 이용해 경계마법들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수법이다.

복합 정령력이라면 그 정도 일은 가능한 것이다.

이건 조사하면 나온다. 엘시아라면 틀림없이 찾아낼 터이다.

대지의 정령은 이반 경의 특기다. 그리고 불의 정령은 아론 경의 영역이라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엘시아가 조사를 끝낸 후 어떻게 판단할까?

그렇다. 우리는 아론 경의 협조로 프리스톤 가문을 조사하러 간 것이다.

아론 경은 이미 프리스톤 가문을 의심하고 있었고, 우리를 통해 확인을 했다. 라고 판단할 게 틀림없다.

물론 아론 경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를 테지만 엘시아는 믿어 의심치 않겠지.

전쟁이 날 것이다.

원래 프리스톤 가문이 꾸민 전쟁은 다른 가문과의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대상이 바뀔 수밖에 없다.

표면적인 전력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지만 그것은 엘시아가 빠진 상태의 이야기다.

그녀가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반 경의 경우를 봐도 알겠지만 엘시아의 앞에서 당당하게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프리스톤 가문이 원래 디펜스 하나만큼은 최고인 만큼 쉽게 당하지는 않을 터. 또한 시간을 끌면 엘시아가 최후의 코드를 풀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십대 마도 가문이 연합을 하는 것이다.

아론 경이 프리스톤 가문을 마족의 계약자로 선언하고 모든 마도 가문을 연합해 공격을 한다면 아무리 엘시아라고 해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엘시아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체프코트 가문에 대해 선공을 하는 것이다.

일단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아론 경이 아무리 프리스톤 가문을 마족의 계약자라고 선언해도 이게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 그냥 선동이라 생각하기 쉽다.

다른 마도가문들은 두 가문의 전쟁에 쉽게 끼어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강력한 가문 둘이 싸워서 서로 손상을 입으면 그만큼 다른 자들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엘시아, 빨리 손을 써라.”

내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오늘에서야 엘시아를 자극한 것은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다.

덴판 제국 황제의 즉위식.

대륙의 모든 실력자들이 모이는 이벤트다.

체프코트 가문이 엘시아의 존재를 밝히기에 가장 좋은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런 만큼 엘시아는 즉위식 이전에 손을 써야 한다. 선공을 날려서 전쟁개막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공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엘시아는 체프코트 가문을 미래의 장애물 중 하나로 생각하고 미리 씨앗을 심어놓지 않았던가?

자신 이후 최강 마법사의 자리를 꿰어 찬 아론 체프코트 경에게 최강의 로브를 입혀놓았다. 그것도 구멍 뚫린 최강의 로브를.

“아아, 음모를 너무 꾸며서 머리가 복잡하네. 뿌우야. 산책이나 가자. 오랜만에 렉스나 타고 놀아야겠다.”

“그래랑, 너 얼굴 표정이 너무 무거워서 좀 걱정하던 참인데 잘 됐당.”

“내가 그리 무거워 보였냐? 하하하.”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고는 방을 나서 렉스한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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